비나이다, 비나이다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 주시고,
당신의 손길이 저와 함께 있어
제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재앙을 막아 주십시오”(1역대 4,10).
새해, 모든 이를 기억하며 바치고 싶은 기도이다.
지극히 기복적이지만 엄청나게 효험이 있는 기도인 까닭이다.
기도한 것을 그대로 이룸 받았음을 성경이 증명해 주고 있다.
이렇게 단순하고 모든 필요를 다 원하는 기도가
하느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제 우리도 정직하게 소원을 말씀드리자.
이룸 받고 싶은 새해의 꿈을 야베츠처럼 당당하고 뻔뻔하게 기도드리자.
새로운 다짐을 하고 좋은 희망도 갖게 마련인 새해의 내 계획은 무위도식이다.
사제가 되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안식년을 얻은 덕이다.
사실 한 해라는 긴 시간이 삼백 육십 오일이라는 날짜가
내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어렵다.
늘 분주하게 무엇에 쫒기 듯 살아온 탓에
이제 느긋함은 곧 느슨함이나 게으름으로 오인되는 까닭일 것이다.
익숙하지 못한 탓에 자칫 주어진 떡을 먹지도 못하고
바라만보다 썩이는 것은 아닐까 조마 조마하다.
스스로 ‘긴장하자’ 하면서 자신을 옭죄는 것을 보면,
습관이란 얼마나 질긴 인간의 심사인지......
일의 중독, 만남의 중독, 관계의 중독에 걸린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안식년을 위해 세운 계획이 빡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장 요긴한 것, 꼭 해야 할 일 외에는 쉼에 익숙해지는 일이
안식년의 큰 숙제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모든 계획을 치웠다.
안식년을 제대로 쉴 수 있을 때에
다음에 맞이하는 여섯 해가 제대로 굴러갈 것이며
가끔은 멋들어진 모습을 살아낼 힘이 축적되리라는 것을 믿기로 했다.
아무튼 올해는 나에게 특별하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크고,
야베츠처럼 원하는 것을 모두 받으리라는 배짱도 챙기게 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일하지 않는 일 년을 맞고 보니,
마음이 자꾸 선해지는 까닭이 재밌다.
아, 선한 것은 이렇게 넉넉하고 편안하고 느긋한 것임에랴......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에 철저히 계산적이고
자녀를 갖고 키우는 일에도
나 같은 구세대(?)를 비웃는 듯 놀라운 계산 법칙이 있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최고로 키울 자신이 없으면서
자식을 낳는 일은 한참 모자란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무지의 결단이라 여기는 탓에
스스로 부모자격을 반납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을뿐더러,
사회적 여건에 눌리고 이끌리느라
권리를 박탈당하는 일에 있어 지극히 관대하다.
그들의 삶은 이토록 명료해서 똑 부러진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약고 잽싸고 지극히 이기적인 일마저도
그들이 추구하는 세련의 첩경이며 생활의 요소이고
삶의 관록이라 여기기에 매사에 틀림이 없다.
계산적이고 이성적이며 자신의 삶에 관한한
확실한 비전을 가진 젊은 세대들이 마냥 믿음직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속이 허한 기미가 처처에 드러나는 탓이다.
사주카페, 타로점집이 그들의 거리를 점령한지 오래이다.
그들은 이제 눈에 든 이성친구가 생기면 먼저 사주카페를 찾는다.
하루를 태양 점에 물어 계획하고 타로 점에 솔깃해 한다.
하다못해 그 날 입은 옷 색깔에 따라 하루가 설 수 있고
운세에 영향을 주리라 믿는다.
아기의 머리카락을 모으던 엄마가
이제 아기의 배꼽에서 떨어진 탯줄로
도장을 새겨 주기 위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른바 뱃속머리로 만든 ‘태모 붓’이나
탯줄 말린 것을 넣어 새기는 도장의 가격이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그 소망인지 꿈인지 구별할 수 없는 의미가 가관이다.
탯줄도장으로 첫 통장을 개설하면 아이가 부자로 살고
태모로 엮은 붓을 가지면 급제를 한다니,
21세기 문명인들의 행위가 하느님의 눈에 고약할 터이다.
패망한 이스라엘땅,
사마리아로 강제 이주되어 하느님 야훼를 알게 되었던
“바빌론과 쿠타와 아와와 하맛과 스파르와임 사람들”(2열왕 17,24)이
“주님을 경외하면서도,
자기들을 유배시킨 민족들의 관습에 따라
자기네 신들을 함께”(2열왕 17, 33) 섬기려 했던 모습이다.
“그들이 반드시 너희 마음을 그들의 신들에게 돌려놓을 것”(1열왕 11,2)이라는
성경의 예언이 울어버릴 일이다.
탯줄도장으로 자녀에게 돈복이 쏟아지길 빌고
베이비 펜이라는 기괴한 물건으로 부적으로 삼는다면 ‘우상숭배다.’
그렇게 최고이기를 선망하고 최선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야베츠처럼 기도하라.
다만 모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라.
세상에 또 한 사람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가 청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1역대 4,10)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느님의 은혜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믿을 수 있고,
언행일치하며,
신선하고,
매혹적이고,
새로움에 열려있어야 한다.
어른을 자처하고 스승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먼저 젊은이들을 매혹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를 위해서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노력도 필요하다.
어른의 몫은 그들이 이해받고 있음을 알게 해주고,
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감동을 느끼도록 해 주는 일이다.
젊은이들은 진리를 추구하지만 선택에 망설이고 그에 따른 결과를 두려워한다.
또한 모든 문화와 이성에 개방되어 있는 반면에
늘 무언인가를 기다리는 불확실함도 그들을 힘들게 한다.
때문에 그들에게 공식적이고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은 늘 식상하다.
젊은이들의 특성은 지극히 구체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까닭이다.
우리 어른들은 그들이 앓고 힘들어하는 그 시간들을 이미 겪은 이들이다.
젊음의 혼돈을 앓아 본 시간이 주는 관록으로 어른이 될 수 있었다.
해서 안식년이 나에게 주는 과제는
그분의 빛에 나를 비추어보는 양심성찰이 되기 원한다.
그동안 참 많이 떠들었다는 생각은
내 삶과 언행이 함께 했던 젊은이들에게
자유를 선물하지 못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위하고
그들의 걸음에 동반해 주지 못했던 사실을 인정하기에 그렇다.
이제 그들을 느끼고 그들의 표현 방법을 이해하여
예수님의 참된 이상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자리 메김 하기를 꿈꾼다.
모든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작고 큰 소망은 내일의 기대치를 높여주기에 삶의 원동력이다.
인간의 꿈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이기에
내일에 얻을 성취를 위하여 오늘을 희생하는 일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은 미래를 향한 소모품이며
거름으로 소비해버리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때문에 오늘 빈손으로 누울지라도
꿈은 모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진실한 욕구이며 삶의 끈이 된다.
세상에는 자기가 하늘로부터 왔다하고,
신의 전갈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타의 종교지도자들과 모든 면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분이다.
이유는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하고 특별한 하느님의 아들이신 까닭이다.
뭇 세상의 어느 종교지도자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는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한 적이 있겠는가?
“나를 믿지 않는 일이 곧 죄”라고까지 단언할 수 있었든가?
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종교 창시자들과의 하늘과 땅 같은 차이임을 드러내는 일이다.
현인들의 가르침에서 선하게 살아가는 모든 원리를 찾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다만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기 전에
인간이 스스로 닦아 오를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줄 뿐이다.
그리고 그 어떤 방법도 인간의 죄를 없애주고 영생을 주지 못한다.
해마다 아기로 태어나
우리를 찾으시는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자라남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징표이다.
작은 아기처럼 매일 매일 자라나는 하늘나라를 꿈꾸시는 하느님의 고백이다.
하느님은 이 땅의 젊은 부모들이 소중한 자식들에게
‘눈치’를 가르치고 ‘흉내’ 내기를 가르치지 않고
진리와 행복을 살아 보이는 매혹적인 어른이기를 바라신다.
“캥거루 족”을 자처하며
“이태백”의 처지에 비관하고
“낀 세대”로 자칭하지 않는 힘찬 후대를 키워내는,
참 어른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신다.
사제생활을 하고 처음 얻는 안식년의 여유로움이 낯설지만,
함께 기도할 것을 약속한다.
시골의 새벽길을 지치도록 걸으며 기도하고
별을 감추는 새벽바다에서 찬바람 맞으며 기도할 것이다.
세상의 젊은 엄마 아빠 모두가 야베츠의 축복을 탐하는,
정말 좋은 엄마 아빠가 되기를 기도하겠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분께로부터 온다.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콜로 2,8).
- 장재봉 신부님의 '오른 길 옳은 길'디다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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