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 불여일견

2012. 7. 12. 오후 7:27:53

글자


백문이 불여일견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만나 구체적 관계로 들게 한 사건은 「원체험」이라 불리는 출애굽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물론 그 이전에도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그들의 하느님」이었을 뿐이다. 즉 이스라엘은 「누구 누구의 하느님」(소문으로 알게된)은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실존에 의해 체험되어지고 고백된 「나의 하느님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되고, 비로소 하느님과 구체적인 관계에 들게된다. 이 관계의 가시적 표현이 시나이 계약임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욥 역시 이제 소문에 의해 「이미지」로만 알아온 하느님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직접 체험된 하느님을 알게되고 소중한 내적 평화를 간직하게 된다.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은 삶의 문제를 타인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소문에 귀기울일 필요 없이 자신의 내면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고요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백 번 물어보는 것보다 내가 체험한 단 한번의 만남이 소중한 이유,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는게 아닐까. [가톨릭신문, 2004년 1월 11일]



「소문으로 알게된 하느님」은 「내」가 아닌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체험된 하느님일 뿐, 사실상 내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아무리 성서를 많이 알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제 삶이 행복과 구원으로 충만해있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저 남들의 신앙과 신학자들의 화려한 이론에 의해 전달된, 즉 「소문에 의해 전달된 하느님」만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되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발생하는 모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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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욥에 대한 자료를 공부하다가 느낀점이 있어 올려봅니다.
신앙은 실존을 느끼는 것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 복음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일때 신앙은 생명을 얻는가 봅니다.

체험하지 아니한 삶을 간접적으로 듣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사실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요즈음 교리봉사를 하면서
스스로 참 부끄럽습니다.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하고 반문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믿습니다.

내 삶의 모습이 초라하지만
내 삶의 모습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복음이야기를 선포하여야겠습니다.

나머지는 제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추수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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