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 일도 I

2006. 3. 4. 오후 10: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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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무 일도 I


   “끊임없이 기도하라”(I 테살 5,17)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교회는 그의 초창기로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일상생활 안에서 늘 기도하기를 권장할 뿐 아니라,경우에 따라서는 의무적으로 기도하도록(신자들에게는 주일과 대축일을 지킬 의무, 또  성직자들에게는 이 외에도 성무일도의 의무) 명하고 있다. 그러나 기도를 하려고 노력해도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지 모를 순간도 허다하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루가 11,1;마태 6,9)하고 스승 예수께 간청한 예수의 제자들과 같이 우리도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기도란 인간의 가장 내면적 생활 표현이다. 인간은 참된 생명인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갈망하며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데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 보다 더 위대한 어느 상위적인 힘을 찾고 그 힘에 의지하려 한다. 인간과 이러한 상위적 힘과의 관계를 간단히 말하여 종교라고 하겠다. 인간이 이러한 상위적 힘과 서로 상통하는 대화나 행동을 기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도가 없는 종교란 있을 수 없으며 종교인이란 곧 기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도 기도가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 박힌 행위라는 것을 표현한다고 하겠다. 인간이 자기의 영원한 생명, 죽음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위하여 상위적인 힘인 인격적 하느님과 상통한다고 할 때 기도는 구원의 길이다. 참되고 진정한 기도는 인격적인 신인 하느님과의 대화다. 인간이 어느 비인격적인 자연의 힘을 믿고 의지한다면 비인격적인 행위요 인간 홀로 푸념하는 독백이다. 인격을 지닌 인간은 인격적인  신과의 대화를 할 때 참된 기도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하나의 가상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보전하시는 위격적인 최상의 신으로서 우리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 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 17,28).이러한 깊은 신앙과 신앙 고백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만이 참된 기도다. 기도는 화해를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I 요한 4,8)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하늘과 땅을 결합시키시고 죽음과 생명을, 인간과 하느님을 결합시키셨다. 이 사랑의 표현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이요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고 승리하심으로써 죽음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다. 따라서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비를 표출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올려지는 기도다.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께 나가기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에 힘을 주신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힘으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됐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나가야 하며 이 길이 바로 그리스도 신자들의 기도의 특징이라 하겠다. 기도는 전시적 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경외심과 겸손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해 어린이와 같이 외치는 것이며 화해와 사랑의 정신으로 자신을 헌신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깊은 신뢰와 신앙 고백에서 항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실천 없는 신앙인’도 ‘신앙 없는 실천인’도 지정한 기도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교회의 기도인 성무일도를 고찰하고자 한다.


    제 1 장  역사적 개관.


    오늘 날 부제를 비롯하여 모든 성직자와 대부분의 수도 단체 회원들에게 의무를 지워주는 기도인 성무일도가 교회법으로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다(구교회법 135 조; 610 조 1항 2; 교회법전 276조 2항;1117조 1항). 이것이 브레비아리움(Breeviarium) 혹은 단순히 오피치움(Officium)이라고 하는 교회의 성무일도인 시간 기도다.

    이러한 기도의 시초는 교회의 창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물론 수세기를 두고 교회 내에 어느 특정된 지위 계층만을 위한 기도 규정이나 기도의 순서도 없었고 더욱이 법으로 명령된 기도는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면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관습이 서서히 발전되었다. 이미 디다케(Didache)라는 12사도의 가르침 안에는 모든 신자들이 매일 세 번 주의 기도를 열심히 받쳤다고 전하고 있다(8,2).

    이미 200년경에는 매일 3과시,6과시,9과시에 그리스도 신자들이 기도를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아침과 저녁과 오밤중에 기도하는 관습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 날 매일 기도하는 성무일도의 기도 시간인 3과,6과,9과 경(Hora tertia,sexta,nona)과 아침 찬미(Lauudes), 저녁 기도(Vesperae),그리고 밤중에 하는 야과경(Matutinum,Nocturnum)에 해당되는 독서기도 시간인 것이다. 다만 초기 교회 관습에는 오늘날의 성무일도 시간 구분 중 1과경(Hora prima)과 끝기도(Completorium)는 없었다.

    이러한 시간 기도에 대하여 첫 번으로 증언하는 분은 떼르뚤리아노(Tertullianus +220) 교부이다. 그는 이러한 시간 기도의 규정이 성서에서도 증언하고 있다고 그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3세(Tertia)에는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강림하셨고(사도 2,15) 6시(Sexta)에는 사도 베드로가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에 잠기셨고(사도 10,9) 9시(Nona)에는 ‘기도 시간으로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다(사도 3,1;10,3.30). 구약 시대에도 다니엘 예언자는 낮에 세 번 기도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다니 6,10). 따라서 이상에서 언급한 시간 기도 구분은 분명 유대교 전승에 그 기원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확실시 해주는 것은 1947년 사해 근처 ‘꿈란’ 동굴에서 발견된 강생 전 2세기의 것으로 생각되는 헤브레아어로 쓰여진 ‘두루마리’의 기사다(Regelbuch). 이 규칙서는 열심한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면서 ‘빛이 군림하는 시초와 그 여정의 절정과 그 빛이 규정된 자기 자리로 돌아 갈 때, 황혼이 시작될 때, 또 밤 여정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리고 빛이 다시 솟아오를 때’ 기도하였다고 한다.

    시간 기도의 내용에 대하여는 상세한 기술은 없지만 여러 가지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상기하면서 각 시간기도와 결부 시켰다. 성 아타나시오(295-373)는 ‘동정성에 대하여’하는 저서에서 동정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3시에 기도하는 것은 이 시간에 십자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고 6시에 기도하는 것은 이 시간에 주님께서 십자가상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때문이며 9시에 기도하는 것은 이 시간에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영신을 바치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잠자러 가기 전에 기도하는 것은 주님께서 고성소에 내려 가셨음을 회상하고 밤중에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며 기도할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주님의 부활을 아침기도와 결부시켜 잠에서 깨어 일어날 때 죽은 이들 중에서 부활하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하고 있다. 밤중 기도는 주님의 재림 사상과 결부시켜 생각하라고 하고 있다. 이로써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마태 25,6)”하는 성서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

    낮과 밤 하루를 성화 시키는데 오밤중에도 기도시간을 정해 놓았다는 것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일반적인 생활 율동이 오늘날과 같이 전기의 시설도 없었고 해가 지면 잠을 자야 하는 것이 자연 현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해가 지면 잠자려 갔다고 생각할 때 밤의 휴식 시간이 일일 평균 12시간 이 되었다. 따라서 밤중에 한 번쯤 일어나서 기도한다는 것이 그렇게 위대한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각 시과경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결부시키는 사상은 성무일도의 후기 발전 과정에서는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심 생활 안에는 중세기 전반에 걸쳐 이러한 사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신자들의 기도 생활을 돕기 위하여 중세기 말엽에 많은 소 성무일도가(livres d'heures, libri d'dre) 속출하였다. 이 소책자들의 기도문안에서 보다는 신자들이 각 시간을 따라 펴드는 삽화에 이러한 사상의 연관성이 잘 제시되어 있다.1)

   

   이미 15-16세기에 일반화된 매일 3번 종을 치는 삼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시간 기도들과 결부시켰던 옛 관습을 보존하고자 노력하였다. 1605년에 프라

그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는 아침에 종소리는 주님의 부활을 회상케 하며 정오의 소리는 그의 수고 수난을 기억케 하고 저녁에 종소리는 그의 탄생의신비를 회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동시대인인 벨라르미노 추기경은(+1621) 그의 교리서에서 시간적 선후 관계로 보아 아침에는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고 정오에는 그의 수난을, 저녁에는 그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제시한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초대 3세기 동안에는 교회에서 규정한 성무일도란 없었으며 신자들 모두가 하는 사적 기도의 형태로써 시행되었고 성직자들이 이러한 기도에 함께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4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기도의 많은 부분이 ‘전례적 성무일도’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현상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신자들이 사적으로 하던 기도가 부분적으로 또는 전반적으로 시간을 따라 고동체적 기도로서 전환된다. 이러한 공동체적 기도는 두 가지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그 하나는 신자들이 주교좌 성당에 함께 모여 기도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수도 단체들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 자유(313년 꼰스딴틴 대제의 종교 자유 칙령)를 얻게 됨으로써 적어도 도시에 사는 신자들은 주일 미사에만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평일에도 서로 모여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 기도에 신자들 각자는 자유로이 참여 할 수 있었지만 매일 모든 기도 시간이나 밤중 기도 시간에도 함께 모여 공동으로 기도를 했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반적으로 주교좌 성당에서는 두 개의 시간 기도가 신자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 하나는 아침기도로서 현재 성무일도의 아침찬미(Laudes)에 해당하는 것이고(초기에는 이 기도를 단순히 ‘Matutinum'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하나는 저녁기도로서 현재 성무일도의 저녁기도(Vesperae)에 해당되는 기도였다(전에는 'Lucernarium'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 기도는 등잔을 키는 시간에 했기 때문이다).

   3세기초에 로마에는 아침에 공동으로 기도하였다는 흔적이 있다. 로마의 히뽈리또가 저술한 ‘사도 전승(Traditio Apostolica)’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부제들과 사제들은 매일 아침 주교가 계신 곳에 함께 모여 백성들을 교훈하고 기도해야 한다.1) 백성을 교훈 하였다는 것은 분명 성서에서 발췌한 독서를 한 후 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후대에 성무일도가 독서와 기도로 구성된 것이다. 저녁기도(Vesperae) 라고 하는 기도의 시발도 같은 저서에서 발견된다. 매일 저녁 때 아기뻬(Agape)라고 하는 자선 향연을 베풀었다. 공동체의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과부들을 위하여 희사를 하고 성직자가 사회를 주관하는 공동 향연을 베풀 때 빛을 축성하고 시편을 읊었다. 시편을 읊을 때 성직자들은 시편 구절을 선창하면 신자들은 각 구절마다 ‘알렐루야’로 응답했다. 오늘날 주일 저녁기도(Vesperae) 때 우선 ‘알렐루야’ 시편을 활용하고(시편 110편) 있는 것도 옛 관습과 연관을 갖고 있었다는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저녁기도가 그 당시 매일 시행 됐다고 볼 수 없다. 주교좌 성당에서 공동체적 기도로서 아침과 저녁 기도(Horae matutinae, vespertinae)가 시행된 것은 4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이루어 졌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오(+397)는 모든 신자들은 가능한 한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당에 오도록 간곡히 권유하고 있다. 4세기 말엽에 안띠오키아 지방의 교회 생활에 대하여 전해주고 있는 ‘사도 헌장(Constitutio Apostolica)'은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백성들이 매일 아침과 저녁에 성당에 오도록 훈계하고 권면하라‘ (II,56). 신자들은 성당에 모여 아침에는 시편 62편을 노래하였고(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뜻이 찾나이다). 저녁에는 시편 140편을(주님께 올리는 나의 기도 분향 같게 하옵시고, 처든 손 저녁 제사 같게 하옵소서) 노래하였다.

   40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던 경신 예배를 순례자 에테리아는 이와 비슷한 기도 행위를 전하고 있다. 아침과 저녁 기도 때 주교와 성직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백성이 함께 모여 아침찬미가(Matutini hymni)와 저녁시편들(Psalmi lucernares)을 노래하였다. 아침기도가 끝나기 전에 여러 가지 필요한 사정과 교회의 여러 지위에 있는 성직자들을 위한 청원기도가 있었고 저녁 기도가 끝나기 전에는 공동체가 특별히 기도해 주어야 할 자들의 이름을 서판에 목록을 적어 낭독하였고 매 구절이 끝날 때마다 아이들의 무리가 합창으로 ‘주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환호를 하였다.   

   순례자 에테리아는 사적인 기도로서 전승된 시간 기도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처 전례적 성격의 기도로 전환되었는지에 대하여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간 기도들이 수도 공동체를 통하여 공동체 기도로서 전환되는 후기 발전 과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4세기에는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동방 교회에서는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오직 종교적이며 수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그룹이 생겨났다. 즉 덕을 닦고자 하는 수도자들의 그룹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수덕 생활을 하고자 하는 단순한 동료들의 집합으로서 특별한 결속 규정이나 의무 수행 규정도 없이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착실한 신자들이면 누구나 하던 기도들,3시와 6시와 9시 그리고 밤중에 하던 기도들을 어느 순교자의 무덤이나 성지라고 생각하는 곳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받쳤다. 그들은 당시에 하던 기도에 차츰 시편을 첨부하여 확장시켰다. 밤중 기도에는 12개의 시편을 읊었다.

   순례자 에테리아는 이러한 그룹들을 예루살렘에서도 발견했다고 한다. 그들은(에테리아는 이들을 ‘monazontes et parthenae'라고 하고 그들 중 일부는 젊은 처녀들로서 각자 가정에서 살았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부활 기념 성당에 모여 함께 기도하였다. 즉 밤중 자시가 지나자 첫 닭이 울기 전에 기도하였고 그 다음 일반 신자들도 참여하는 아침에 아침기도를 하였으며 6시와 9시에도 함께 모여 기도하였다. 3시 기도는 사순절에만 하였다. 그들은 시간 기도에서 찬미가와 시편을 노래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적 기도가 전례적기도라고는 할 수 없다. 법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모임들이 하는 기도가 교회의 인준을 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 기도에는 두 세 명의 사제나 부제가 주교에게 축복을 청하고 ’기도합시다‘하며 기도를  끝맺었다. 이와 같이 이러한 기도는 순수 사적인 기도가 아니었고 그 후 교회의 인준을 받아 전례적 기도로 전환되게 되었다. 주교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아침찬미와 저녁기도 외에 밤중과 3시,6시와 9시에 하던 기도가 전례적 기도 시간인 교회의 규정된 성무일도의 완벽을 기하게 되었다.

   40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시행된 현상에서 우리는 하나의 과도기적 상태를 볼 수 있다. 과도기란 곧 고정된 형태로 변경되는 법이다. 덕을 닦고자 하던 자들의 그룹과 동정녀들의 그룹에서 수도원이 창설되었고 이러한 수도원들은 속세를 떠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기를 선호했다. 이러한 수도원에는 점차 경신 예배를 주관할 사제가 요청되었다. 그러나 도시에 그대로 머무는 수도 단체들도 있었다. 도시 특히 주교좌가 있는 도시에는 대성전들이(Basilica) 웅장하게 세워졌다. 이 대성전들에서 아침저녁으로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가 계속되고 다른 시간 기도를 하는데 수도 단체들이 불림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도시나 성지에는 수도원이 창설되고 그들이 대성전의 기도 생활을 관장하게 되었다. 로마에서는 8세기에 성 베드로 대성전과 4개의 수도원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제로 7세기에 로마의 마르띠노 수도원의 원장인 요한 이라고 하는 분이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가대 단장으로서 노래를 책임지고 있었다. 수세기를 거치면서 수도원에서는 낮과 밤을 포함하여 시간 기도를 하며 성무일도를 발전시켰고 대성전이나 도시에 있는 성전들에서는 재속 성직나들이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아침과 저녁 기도를 발전시켯다.

   오늘날 성무일도의 시간 배열 중 1과경과 끝기도(hora prima,completorium)인 두 개의 시과경은 중세 초기까지 없었다. 이 두 시간 기도는 수도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옛부터 전승되어 오던 아침찬미와 저녁기도(Laudes,Vesperae)는 수도원에서도 성대한 기도였다. 그런데 이 기도 시간을 앞당겨서 하고자 하는 경향과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성 베네딕또의 규칙서에도 아침찬미를 밤중 기도 시간에 이어서 먼동이 틀 때 하도록 하였다. 밤중 기도를 한 후 다시 잠을 잘 필요가 없이 아침찬미를 하도록 했다. 또 저녁기도도(Vesperae) 저녁 식사를 일찍이 하고 촛불을 켤 필요가 없도록 앞당겨 하도록 했다. 그래서 저녁기도가 옛 시간보다 한 시간쯤 일찍 시작하였다. 그 결과 아침 기도부터 3과경(Tertia) 까지, 저녁기도부터 밤 휴식 때까지 달갑지 않은 시간적 간격이 생겨났다. 그래서 아침찬미부터 3과경 사이에 1과경을 삽입하였고 그래서 실제로는 1과경이 아침기도가 되었다. 동방 수도회를 널리 순망하며 수도원에 대하여 전문적 견식을 갖고 있던 요한 까시아노(Joannes Casianus +435)는 1과경을 도입하게 된 일화를 전하고 있다. 베틀레헴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몇몇 수도사들이 아침 찬미기도(Laudes) 후에 다시 잠을 자다가 3과경 때까지 늦잠을 잤다. 이러한 자들에게 방해물을 놓으려고 1시과경을 도입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1과경은 그날 일과를 시작하는 첫 기도 시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저녁기도 후 잠자려 가기 직전에 끝 기도도(Completorium) 도입되었다. 그래서 이 두 시간 기도가 사적인 성격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8세기 갈리아 지역에서 발견된 필사본에는 이 기도들은 성당이나 경당에서가 아니라 수도자들의 침실에서(ubi dormiunt) 바쳤다.2)

   1과경은 시대가 지나면서 하나의 시간 기도에 해당할만한 부록이 첨부되어 있었다. 1과경의 중심 부분은 다른 낮 시과경들과(3과경, 6과경, 9과경) 같은 구조를 갖고 있고 이어서 'Officium Capituli' 라는 명칭으로 부렸다.  이 일과경도 수도원 생활 환경에서 기인한 것이다.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이 아침기도를 한 후에 그 날 해야할 일을 분배하여 주는데서 유래한다. 수도사들은 육체적 노동이나 경전들의 필사나  수도원 경영 학교 수업.... 등의 일을 하였다. 이러한 일과를 분배하면서 기도와 함께 규칙서 중에서 한 장을 읽었다. 그래서 이 기도의 명칭도 'Capitulum'이라고 했다. 이 기회에 다른 여러 가지 권고나 지시 사항도 전달됐고 근자에까지도 수도원의 공동체적 기도 안에서 시행되던 ‘Officium Capituli'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그날의 순교록도 읽었다(사사로이 성무일도를 바칠 때는 생략하였다).

   주교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된 시간 기도인 성무일도의 외적 발전은 8세기에 일단락 되었다. 이러한 모양의 성무일도는 수세기 동안 수도원이 관리하는 성당이나 수도원에 한정되어 있었다. 재속 사제들이 관리하는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영신 지도의 임무로 옛 관습을 분별 있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관습을 유지한다는 것은 많은 곳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528년에 유스띠니안 황제는(Caesar Justianus) 훈령을 통하여 성직자들에게 공동체적 합창 기도의 의무를 강력히 지시하였다. 재속 사제들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타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밤이나 아침과 저녁 기도 시간을(nocturnas et matutinas et vespertinas preces) 엄수해야 한다고 명했다. 내용상 저녁기도 외에 아침기도를 이중으로 요구한 것 같지만 중세기 초에 로마의 한 문헌에서는 하나의 아침기도만 언급하고 있다. 교황청 사무국에서 사용되던 여러 가지 양식들을 제시하고 있는 일기 책자(Liber diurnus)가 있다. 이 책자에는 로마 근교에 있는 주교들이 성성식 때 서명하는 교환 증서 양식도 있다. 이 교환 양식에는 주교들은 매일 그들의 모든 성직자들과 함께 첫 닭이 울기 전부터 아침까지 성당 안에서 전야제(Vigilia)를 공동 합창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의무화시키고 있다. 전야제 때 기도로서 독서의 수와 시편의 분량도 기재해 놓았다. 밤이 짧은 여름철에는 그 분량이 적고 밤이 긴 겨울철에는 그 분량도 많았다. 주일에는 시편과 독서를 봉독하며 기도를 바쳤다. 여기에 기재되어 있는 시편과 독서들이 후대에 야과경(독서의 기도)과 아침찬미(Matutinum 과 Laudes)에 활용됐다. 특히 갈리아 지역 주교회의들은 지방에 설립된 교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합창 기도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본당 사제는 청소년들에게 학업을 시작하기 전에 제자들로부터 협조를 받든지 노래를 할 수 있는 몇몇 제자들로부터 협조를 받아 합창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당시 지방에 사는 성직자들은 그 수가 적었고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성직자들은 일찍이 공동 생활을(Vita communis) 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공동 생활의 표본은 수도원의 수도자들의 생활 양식이었다. 재속 사제들의 공동 생활은 성무일도의 광범한 전파를 위한 과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공동 생활로써 여러 가지 위험성과 경직성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고 그들 신분에 적합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띠노도 자기의 주교좌 도시 히뽀에서 성직자들과 공동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성직자 공동 생활 운동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분은 760년경에 멧쯔의 주교 크로데강(Chrodegang) 이었다. 그는 성직자들이 공동 생활을 하도록 확고히 규정  하였다. 규칙을 따라 생활하는 수도자들을 정규 공동 생활자들(Regulares)라고 불렀고 교회의 규범을 따라 공동 생활 하는 재속 사제들을 참사회원(Canonici) 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중세 초기에 있던 주교좌 참사회 운동이다.3)

   공동 생활은 함께 거처하며 사는 것뿐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것도 뜻하였다. 따라서 재속 사제들도 수도원에서 밤과 낮에 하는 공동 시간 기도들인 수도원의 성무일도를 받아 들였다. 그들은 이미 오랫동안 로마 대성전에서 사용하던 전례서들이나 성가집에 있는 양식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찾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직자들의 공동 생활은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주교좌가 있는 대성전의 성직자들에서 주교좌 성전 참사 회원이 형성됐고 다른 도시의 성당들에도 성직자들이 모이는 동료 참사 회원을 형성하였다. 817년 악헨(Aachen)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는 성직자들의 공동 생활(Vita communis)을 모든 성직자들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 결정하였다.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동료 참사회(Collegiales Capituli)가 새로이 설정되었고 그 참사 회원들 중에는 밤낮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임무만을 수행하는 동료 사제들도 있었다.

  그러나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곳에서 이 공동 생활이 해이해지기 시작된다. 위대한 혁신가였던 교황 그레고리오 VII세(+1085)는 이러한 공동체의 생활의 분열과 해이함을 막고 다시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했지만 그 효과는 별로 없었다. 성직자들은 모든 소유를 공유화 하라는 것을 억압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각자는 자기의 사재를 보유하고 사생활에 활용하였다. 이제 공동적인 것은 참사 회원들이(Canonici) 매일 주어진 시간에 함께 모여 기도하는 성무일도 합창밖에 없었다. 공동 기도 시간에 참여하지 못하는 수도자들은 가능한 한 시간에 사적으로 성무일도를 해야한다는 성 베네딕또 규칙서에(C.50) 규정된 것과 같이 성무일도 합창에 참여하지 못하는 참사 회원들에게도 사적으로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성무일도의 의무는 참사 회원이 아니더라도 대품을 받은 성직자, 각자로 생활하는 사제들과 성이나 귀족들의 대궐에 상주하는 사제들도 참사 회원과 동일하게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했다. 12세기에 여러 주교회의들은 모든 성직자들에게 성무일도의 의무를 강력히 지시하였다. 그 후 13세기에는 이 의무를 상세히 규정하여 확정하였다. 교회록(Beneficium)을 받는 모든 성직자들과 차부제품을 받은 자들은 이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 때부터 성무일도를 사적으로 바치는 경향이 고조되었다. 이는 사제들의 사목적 과제가 확장되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합창기도가 쇄퇴 했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근자에까지도 주교좌 성당에 함께 기거하는 참사 회원들도 이 합창기도에 단편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성무일도의 합창기도(Chorgebet)의 성장 발전은 종결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 전례에서 뿐 아니라 다른 전례에서도 수도자들을 통하여 오랜 동안 성무일도의 분량이 확장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 전례에는 저녁기도(Vesperae)와 끝 기도(Completorium) 사이에 또 하나의 밤 기도가 삽입되어 있다. 비쟌띤 전례에는 1과경, 3과경, 6과경,9과경과들 사이에 각각 짧은 시과경들을(Μεσώριον) 삽입시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서방 교회 여러 수도원 특히 끌루니(Cluny)에 있는 수도원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그 당시 수도원의 생활 양식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 전까지는 베네딕또 수도원에서는 수도 사제이건 평신도 수도자들이건 차이를 두지 않고 육체 노동과 기도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수도원 안에서 육체적 노동을 전담하는 일반 평수사들이(Conversi) 점차로 많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 당시 아직 학문 연구라든지 다른 과제가 없던 시대에는 수도 사제들은 기도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전념하게 되었다. 10-11세기에는 매일 성무일도 외에도 성모의 소일과를 첨가하여 바쳤고 대축일을 제외하고는 돌아가신 수도원 창설자나 은인들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매일 ‘죽은 자들을 위한 성무일도(Officium defunctorum)'도 바쳤다. ’죽은 자들을 위한 성무일도는 본래 장례날 고별식에서 하던 기도였다. 이 것들만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많은 날에 성무일도를 시작하기 전에 15개의 층계 시편(15 Psalmi graduales =Ps 119-133)을 노래하고 1과경에는 살아 계신 은인들을 위하여 7개의 시편(Psalmi poenitentiales)을 첨부하여 읊었다. 또 각 시과경 시초와 끝에 마리아 찬미가(Antiphona finalis B.M.Virginis)를 첨부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찬미가중 성모 찬미가(Salve Regina)와 이어지는 기도가 그 첫 자리를 차지했다. 중세기 말기에는 각 시과경 시초에 ‘주의 기도(Pater noster)와 성모송(Ave Maria)’을 하고 끝날 때 ‘주의 기도’를 속으로 바치도록 했다. 대략 1000년경에는 매일 경신 예배의 절정을 이루던 것은 3과경 후에 단체로 거행하던 대미사 성제(Missa Sollemnis)였다. 그 당시에 각 수도 사제들이 지내는 사사 미사가(Missa privata) 도입되었다. 이 모든 것을 총괄한다면 하루의 일과가 기도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래도 어느 수도원들 예컨데 카르테시안 수도자들은 11세기경까지도 주일과 대축일에만 미사 성제를 거행하던 전통을 보존하였다.

   이렇게 확장된 성무일도는 자연적으로 관상 수도회 수도자들만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이러한 과중한 염경기도로써 수도자들이 관상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른 일부에서는 특히 재속 사제들은 성무일도를 간소화하여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성무일도의 규모를 간소화하여 재속 사제들의 업무에 상응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끔 적응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동체적 합창 기도인 성무일도를 위해 필요한 책들에서 간추린 간소화된 책자(Breviarium)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브레비아리움(Breviarium)이라는 말은 성무일도를 위해서 필요로 했던 것들의 목차의 순서를 색인한 종이 조각이나 서판을 뜻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시간 기도의 모든 기도문을 수록한 성무일도를 뜻하고 있다.

   성무일도를 합창으로 하는 합창 기도소에는(Choras) 여러 가지 책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은 아무런 책도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편들을 암기하고 있거나 합창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경청하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구절로써 응답만을 반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성가대 합창 단원들은 선창을 위한 선창집 또는 후렴집(Antiphonale)이 필요했으며 이는 공동으로 합창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였다. 독서 후에 응답을 위한 응송집(Responsoriale)과 특별히 북 구라파 지역에서 발전 확장된 찬미가를 수록한 찬미송집(Hymnale)도 필요했다. 그 뿐 아니라 성무일도를 주관하는 사제는 맺음 기도를 하기 위해 기도문들을 수록한 기도집이(Collectarium) 필요했다. 또한 독서들을 위한 많은 책들이 필요했다. 성서, 수난사(Passionarium),성인들의 전기(Legendarium),순교자들의 순교록(Martyrologium),교부들의 강론과 설교들을 모은 강론집(Homiliae)과 설교집(Sermones)등이다. 독서의 선택 규정이 엄격하지 않은 당시에는 수도원 도서실에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책은 독서로 활용되었고 오늘날 수도원 식당에서 읽혀지는 독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성직자 각자는 의무적으로 성무일도를 바쳐야 하고 여행 중에도 그 의무가 부과됨으로써 성무일도의 여러 부분들을 작은 책에 모아 들고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간소화 작업의 첫 단계는 10-11세기에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성무일도의 형태를 갖춘 간소화 된 성무일도가 13세기에 초에 로마에서 출간되었다. 이 성무일도는 로마 성청 직원들의 사용을 위한 성무일도(Breviarium sucundum usum Romanae Curiae)라고 불렀다. 로마 성청 직원들은 여행을 많이 하게 됨으로 이러한 간소화된 성무일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복음 선포를 위해 여러 지역에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던 성 프란치스꼬 수도자들은 간소화 된 이 성무일도를 각지에 전파시켰다. 그 결과 교구 참사 회원들이나(Capitulum) 동료 참사 회원들(Collegium capituli)도 그들의 성무일도를 이 간소화 된 성무일도로 대치하였고 당시 인쇄술의 발명으로 쉽게 대량 출판이 가능하게 되었다. 간소화 된 성무일도는 공동으로 합창 기도소에서 하던 성무일도의 부분들을 간소화시킨 것이었다. 간소화 된 부분은 이미 합창 기도소에서 간소화되기 시작했던 독서 부분이었다. 11세기에는 매년 성서를 전체로 봉독해야 한다는 근본 규정을 견지했지만 간소화 된 성무일도에는 오늘날과 같이 성서에서 일정한 부분을 발췌하여 봉독 하도록 했다.


성무일도를 대규모적인 간소화의 제2단계 과정은 16세기에 이루어졌다. 이는 15세기를 거치면서 발생한 영성 생활에 큰 변화와 성무일도의 간소화 작업이 연관됐다는 것은 우연한 일치만은 아니다. 네델란드에 수도자들에게서 시작된 ‘현대적 신심(Devotio moderna)'과 그로부터 유래되는 묵상 방법이 전파되었다. 물론 예로부터 수도원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영적 독서(Lectio divina)를 하면서 명상 내지 묵상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묵상을 위하여 수도자들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영적 독서 책이 분배되었다. 그러나 성무일도의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염경기도에 큰 비중을 두었다. ’현대 신심‘과 함께 발전된 묵상 기도를 위하여 먼저 그 준비를 하고 시작하고 끝맺는 방법에 대한 일정한 주의와 암시를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미리 묵상의 제목으로서 적절한 대상을 제시하고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묵상을 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묵상법이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 방법은 그 당시 절실히 요구되었던 수도 단체들과 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여러 수도회들이 이러한 묵상을 그들의 일과에 도입하였다. 도미니꼬 수도회에서는 1505년 그들 원장 총회에서 묵상 도입을 결정했고 몽세랃과 같은 베네딕또 수도회들도 이 묵상 방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묵상 방법을 선호한 분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de Loyola)였고 그 분이 창설한 예수회는 이 묵상 기도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으며 따라서 성무일도를 공동체적 합창 기도로 하지 않고 각자가 사사로이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묵상 기도는 많은 주목을 끌기도 했지만 또한 많은 반대도 받았다. 그러나 후대에 창설되는 수도회들은 신자들의 영신 지도와 사목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이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배후를 근거로 16세기에 착수하여 보급시킨 성무일도의 개편 작업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시도는 많은 호평도 받았지만 지속적인 효과는 없었다. 1529년 교황 끌레멘스 7세는 프란치스꼬 회원이던 뀌노 추기경(Cardinal de Quinones)에게 성무일도를 새로이 개편하도록 위임하였다. 1535년 그는 새로운 성무일도를 개편하였고 그 후 추기경의 경당의 이름을 부처 성 십자가의 성무일도(Breviarium sanctae Crucis)라고 했다. 이 성무일도는 시편을 간소화하고 많은 경우에 단체로 하지 않고 사적으로 바칠 수 있는 것을 감안하여 폭 넓은 쇄신을 했다. 또 독서 후에 하는 응송을 어느 정도만 남기고 각 시과경 때 하던 소독서(Capitula)들을 제한하였다. 후렴(Antiphona)과 찬미가들을 강력히 제한했지만 그 반면 특히 신약 성서에서 발췌된 독서들을 현저하게 삽입하였다. 이 성무일도는 몇 십년 동안에 100판이 출판됐다. 그러나 스페인에 여러 곳에서는 이 성무일도를 단체 기도에도 활용했지만 신자들에게는 찬사를 받지 못했다. 사라곳사(Saragossa)에서는 신자들이 격분하여 성 주간에 대성당을 떠나서 옛 성무일도를 하는 수도원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재속 성직자들간에도 이 성무일도애 대한 반대의 원성이 높았다. 그 이유는 교회의 옛 전통이 이 성무일도안에는 충분히 보존되어 있지 않기 대문이었다.

이러한 불만과 쇄신 요청에 부응하여 트리데틴 공의회(1545-1563)는 성무일도의 새로운 쇄신을 촉구하였고 1568년 교황 비오 5세 때 새로 개정된 성무일도가 로마 성무일도(Breviarium Romanum)이라는 명칭으로 출간되었다. 이 성무일도는 단체적 성격을 다시 부각 시켰다. 중세기에 많은 성인들의 전기에서 발췌되어 우대를 받았던 위경적인 독서들을 정비하고 성서 중심의 독서로 대치시켰다. 대폭 간소화 된 것은 새 로마 성무일도의 입문 회칙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가적인 성무일도의 의무를 -성모의소일과(Parvum officium marianum),죽은 자들을 위한 성무일도(Officium defunctorum),참회 시편(psalmi poenitentiales),층계 시편(psalmi graduales)-개인적으로 할 때는 면제하고 단체로 하는 경우에도 몇 날에만 하도록 한정시켰다. 또한 200년 이상의 전통을 갖고 그들 고유의 성무일도를 시행해 오지 않은 라틴 교회에 속한 교구나 수도원들은 모두 이 새 성무일도를 받아들이도록 의무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구들과 2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많은 교구들도 자발적으로 이 새 성무일도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성 베네딕또 수도원에서는 성 베네딕또에게 까지 소급된다고 하는 수도원 고유의 성무일도를 근자에까지도 견지하였다. 이 수도원의 성무일도는 그 구성이나 시간 구분은 로마 성무일도와 동일하지만 시편을 분배 삽입하고 각 시과경의 시편 수(예컨데 저녁 기도에 5개의 시편을 하는 대신 4개의 시편을 했음)와 각 시과경의 맺음 기도 전에 ‘주의 기도’를 하고 각 시과경을 끝맺는 양식이 달랐다.

로마 성무일도는 새로 시성된 성인들의 축일을 삽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수세기를 거처 오면서 거의 변경되지 않았다. 교황 우르바노 8세 때(1623-1644) 수 많은 찬미가들을 인문 주의적 관점에서 검토 수정하도록 한 위원회에게 위촉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다행스러운 수정은 아니었다.

성무일도의 적응 발전의 제3다계는 교황 비오 10세(1903-1914) 때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성직자들의 사목 활동의 다양화로 성무일도의 적응이 필요했고 따라서 성무일도의 활용된 시편들을 새로이 규정했다. 우선 사목적 상황을 고려하여 주일 야과경인 독서의 기도를 간소화 시켰다. 예로부터 야과경은(Nocturnum) 3부분으로 구분되어 12+3+3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새로운 규정에는 3+3+3의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매 주간 150편의 시편 모두를 노래하는 것이 전승되어 오던 규정이었다.  그래서 주간에 어느 성인들의 축일이 삽입되어 있으면 성인 축일을 위한 시편을 읊고 평일에 규정된 시편을 반복하였다. 새 성무일도는 매 주간 150편의 시편 모두를 해야 한다는 로마의 기본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이 반복을 피하도록 새로 규정하였다. 이와는 달리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전례는 예로부터 150편의 시편을 2주간에 거처 순환되도록 분배하였다.

성무일도의 제 4단계 발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변경이 교황 비오 12세 때 이루어 졌다고 하겠다. 비오 12세는 알아듣기 어려운 시편의 라틴어 번역문을 이해할 수 있게끔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해 달라는 성직자들의 요청에 부응하여 교황청 직속 성서 대학원으로 하여금 시편을 완전히 새로 번역하도록 위임했다(이를 주관한 분이 추기경 베아=Card.A.Bea 였다). 1955년 ‘규범 간소화 율령’이 반포되어 매 시과경 시초와 끝에 속으로 하던 기도(주의 기도, 성모송, 신경)를 삭제하고 아침찬미와 저녁기도 때 하던 청원 기도(Preces)를 일정한 날에만 하도록 제한하였다. 1960년에는 새로운 규범집(Codex rubricarum)이 출간되어 독서들에 첨부된 부속물을 제한하는 등 여러 부분에 간소화가 이루어 졌다.

현대 사제들의 사목 생활과 분야가 전에 비해 다양화되고 특히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 교육과 청소년 사목의 교육이 확장됨으로써 중세기 수도원들이나 교구 참사 회원들에게 부과되었던 전형적인 성무일도의 규모와 실천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성무일도의 쇄신은 성직자들의 상황에 적합하도록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기도인 성무일도가 성직자들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사목과 영신 생활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무일도의 중요성과 함께 쇄신과 개편을 결정하고 단행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차후에 고찰 할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성무일도의 간략한 역사를 일괄하여 볼 때 많은 변화를 거처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시간 기도인 성무일도가 사적 기도로써 시작되어 후에 공동체적 기도로 전환된 과정과 성직자들의 의무적인 기도로 발전되었음을 고찰하였다. 오늘 날 성직자들에게 의무화된 성무일도를 대부분 사사로이 바칠 수 있게 허용됐다는 것은 사적으로 시작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자발적이며 사적으로 시작된 시간 기도인 성무일도가 초대 그리스도교 밀기에 수덕 생활을 목적으로 모인 수도 단체가 공동체적으로 기도하면서 기도의 분량을 확장시켜 놓았다.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경신 행위를 그들 생활의 첫 과제로 삼았고 따라서 일과의 대부분을 기도로 채우고자 했기 때문에 기도의 분량이 확장되었다.


이와 같이 대규모로 확장된 성무일도가 수도자들에게 뿐 아니라 모든 성직자들에게 전가되어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사목이 경신 예배를 중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재속 사제들의 공동 생활 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그 당시 영성 생활이 거의 염경 기도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차원 높은 문화로 발전된 수도 단체들의 성무일도는 사제의 영성 행활의 발판으로서 봉사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재속 사제들의 공동 생활이 해이해지고 사목적 분야도 다양화되었지만 성무일도의 의무는 과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무일도의 간소화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사제들의 상황에 맞게 성무일도의 개편 작업이 서서히 진행되었다. 이것이 13세기에 성무일도가 브레비아리움(Breviarium)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15-16세기에 묵상과 관상을 중요시하는 현대적 신심이(Devotio moderna)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를 많은 수도원들이 도입했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제들에게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20세기에 이러한 묵상의 필요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구 교회법 125조) 신심 생활의 새로운 형태로 부각되었다. 성무일도 중 과중했던 독서가 간소화되었고 공동 생활을 하지 않는 사제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여 주었다. 인쇄술이 발명된 후에는 성서나 영적 독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또한 수덕 신학자들이나 주교와 교황들도 사제들에게 영적 독서와 특히 성서를 묵상하도록 장려하고 권고하였다.


성무일도의 발전 과정에서 특이한 현상은 처음에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신심에서  시간 기도가 시작되었지만 그 후 발전에 있어서는 ‘신자들에 대한 고려가’ 없이 성직자들에게 국한된 의무적 성무일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고전 시대까지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아침 새벽에 하던 야과경과 아침찬미 그리고 저녁기도 때 성당에 함께 모였을 뿐 아니라 그 때에 봉독되던 독서들도 경청하며 영신적 양식을 얻었다. 아우구스띠노가 그의 고백록에서(V.9) 전하는 것과 같이 그의 어머니 모니까 성녀는 매일 두 번씩 성당에 가서 “그녀는 당신 말씀 안에서 당신을 듣고 당신은 그녀의 기도 안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ut illa audiat Te in Verbis Tuis et Tu audias illam in illius precibus)”고 하였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라벤나의 주교가 신자들에게 자기가 주해한 욥서를 읽히도록 했다는 것을 듣고 그 주교에게 편지를 하여 그 주해서는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중단하라고 권고까지 했다고 한다. 가경자 베다도(Beda venerabilis +735) 신자들이 자기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자기의 저서를 성당 안에서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성무일도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기도 중에 고수되던 라틴말이었다.

그렇지만 신자들 각자가 매일 하는 시간 기도가 그리스도교 고전 말기에 완전히 페지된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도 1과 3과 6과 9과경을 하는 것도 전 중세기를 통하여 신자들의 생생한 신심 행위로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 1480년에 간행된 프란치스꼬회 수도자였던 데드릭히 첼데(Dedrich Coeelde)의 ‘그리스도 신자들의 거울’이라는 책자다. 그 밖에도 1237년에 영국의 콘벤트리(Conventry)의 주교는 신자들에게 매일 성무일도 시간에 맞추어 7번 주의 기도를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지시도 초창기부터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요구하던 기도 시간에 신자들에게도 기도하는 전통을 유지하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습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중세 말기에 평신도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던 간소화된 성무일도인 ‘소일과(Horae minores)'이다. 이 당시 ’성모의 소일과‘이외에도 성삼의 공경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소일과등이 속출했다. 이와 같이 이 당시에 수 많이 출간된 이러한 소일과들은 그 당시 신자들의 신심생활의 잔재를 보존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신자들의 생활 양식이 변화되고 따라서 신자들은 성직자들이 의무적으로 하는 성무일도에 참여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초대 교회에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함께 하던 시간 기도가 성직자들의 의무적 기도로서 라틴어 전용 성무일도가 되었다면 신자들에게도 그에 상응한 기도를 병행 발전시킬 수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전 중세기를 거처 부정적으로 남아 있었다. 신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하는 저녁기도에 참석하여 수도자들이 장엄하게 라틴어로 노래하는 후렴이나 찬미가(Antiphona,Hymnus)나 화려한 예절이나 향의 연기 속에서 감상하면서 신심의 양식을 얻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모국어로 저녁기도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마르틴 루터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잉골스타드의 본당 신부 요한 엑크(Johannes Eck)도 그의 본당을 위한 경신 예배의 일년간의 계획서 안에도 모국어로 할 수 있는 예배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큰 축일에 모국어로 부른 몇 개의 성가뿐이다.4)

근대에 와서 사제가 신자들과 함께 성당에서 거행할 수 있는 ‘신자들과 함께 하는 예배(Volksandachten)'양식이 발전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특히 두 가지 근원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13세기 이후에 단체로 하는 성무일도중에 성체를 현시하고 특별히 저녁기도(Vesperae) 후에 몇 가지 찬미가와 기도로 성체성사를 공경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또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시과경을 끝맺고 하던 성모 찬미가(Salve Regina)를 확장시켜 예배 행위로 발전시켰다.5)

이러한 예배 행위에서 점차로 모국어 사용이 탈출구를 찾았고 그 후 급속도로 ‘신자들과 함께 하는 예배(Volksandachten)'라는 신자들의 오후 예배가 자유롭게 형성 발전되었고 이러한 형태의 예배가 여러 교구에서 번창하여 교구 공과나 기도서나 성가집에 수록되었다. 18세기부터는 폴랜드나 독일 여러 교구에서는 주일과 대축일에 신자들과 함께 하는 저녁기도를(Vesperae) 모국어로써 노래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전례운동과 함께 모국어로 하는 저녁기도와 끝 기도(Vesperae,Completorium)가 많은 교구에서 번창하게 되었다. 근자에는 간소화된 모국어 성무일도가 독일, 불란서, 홀랜드로부터 전 세계로 전파되었고 이태리, 스페인, 북미 대륙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이러한 모국어 예배 양식은 그 때까지 전해 오는 성모 소일과를(Officium parvum Beatae Mariae Virginis) 모국어로 번역하든지 어느 수도 단체에서는 라틴어 성무일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중세기에 성무일도가 성직자중심의 전례로 전락됨으로써 신자들의 신심 생활에 생겼던 골을 메꾸어 주었다고 하겠다.


제2장 성무일도의 각 부분 고찰


제1절 야과경(Matutinum),현재의 독서의 기도.


성무일도중에 가장 부피가 큰 시과경인 야과경(Matutinum)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에 신자들이 하던 기도를 후에 수도원에서 밤중에 하는 기도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야과경의 유래를 초대 그리스도 신자들이 공동으로 거행하던 전야제에서 찾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 이유는 전야제는 야과경과는 그 구조가 다르며 또한 연중 일정한 날에만 거행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수도원들은 신자들이 사적으로 하던 밤중 기도를 공동으로 바치는 시간 기도로 보강시켰다. 비쟌띤 전례의 야과경(Μεσονυχτιχὀν)은 이러한 근원을 갖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로마의 성무일도의 야과경도 이렇게 유래하여 발전되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도 있다. 오히려 로마 성무일도의 야과경은 현재 우리가 아침찬미(Laudes)라고 하는 아침기도의 입문 기도의 연장으로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 베네딕또 규칙서에는 이 시과경은 밤중 여덟째 시과(새벽 2시)에 시작하고 그 후 잠시 쉬었다가 곧 이어서 아침찬미(Laudes)를 하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6) 실제로 근자까지 시행된 규정에는 야과경은 공동체적 단체 기도로 바치는 경우에는 아침찬미(Laudes)와 연결하여 기도하였고 옛 전례 학자들도 이 두 시과경을 하나의 연결된 시과경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무일도의 시과경을 여덟이 아니라 일곱으로 생각하였다. 하루의 기도 시간을 일곱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은 ‘나는 매일 같이 일곱 번씩 당신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나이다’(시편 118.146)하는 시편 구절에 영향을 받아 그 시각대로 기도하고자 노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야과경의 기본 양식은 축일이 아닌 평일 야과경에 잘 제시되어 있고 1960년 성무일도 쇄신으로 주일도 이에 준하도록 했다: 야과경은 초대송(Invitatorium)과 함께 시편 94로써 시작된다. 이 시편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성대한 호소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초대송은 성가대가 하는 시편 구절에 응송으로 반복한다. 그 후 9개의 시편과(교황 비오 10세의 쇄신 전에는 12개의 시편을 했다) 3개의 독서로 구성되어(Nocturnum) 있었다. 이 3개의 독서 다음에는 각각 하나의 응송이 뒤따른다. 현재는 시편 3개와 독서 2개로 구성되어 있고 주일과 축일에는 사은 찬미가를 첨부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축일과 주일에는 야과경이 3부분으로 구성되었고 각 부분은(Nocturnum) 3개의 시편과 3개의 독서와 응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3부분으로 된 야과경은 공동체적 단체 기도로 할 경우에는 각 부분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3 부분이 한나의 기도를 형성하기 때문에 그 중간에 간격을 둘 수 없는 가장 부피가 큰 밤중 기도였다.

야과경의 발전 단계는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야과경은 본래 시편들로만 구성되었었는데 후대에 아침찬미(Laudes)를 공동체적으로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독서들이 삽입되었다. 그리고 좀더 폭넓은 변화를 갖고 기도하기 위하여 주일과 대축일에는 3부분으로 나누어 독서들을 분배하여 삽입시켯다.

대축일과 주일을 제외하면 야과경과 낮 기도(Horae minores)에 시편을 채택하는 방법이 이색적이다. 이 시과경들에는 어느 일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시편의 순서를 따라 채택하였다. 이러한 양식으로 시편을 기도하는 것은 이미 4세기의 은수자들이나 초기 수도원의 수사들이 일반적으로 실시하던 관습이었다. 이들은 어느 일정한 중심 사상이나 주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시편의 순서를 따라 기도하였다. 따라서 어느 때는 하루에 시편 전체를 읊기도 하였다. 이렇게 단순히 시편 전체를 읊으면서 하느님 앞에 될 수 있는 한 오래 머물며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했다. 이와 같이 시편들을 단순히 순서에 따라 읊은 것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시과경들이 수도원 생활에서 기인됐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근자에까지도 변함없이 전승되어 온 성삼일의 야과경의 중요한 구성 요소에도(이 때에는 초대 시편인 시편 94를 하지 않았다) 시대를 거처 오는 동안 외적인 형태가 변화되었다. 야과경 시작에는 낮은 목소리로 주의 기도, 성모송, 신경이 첨부되었다. 주의 기도와 사도신경은 아침에 하는 첫 기도로서 이미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지만 성모송은 중세기 말엽에 첨부되었다. 새로 영세한 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성스러운 두 가지 기도인 주의 기도와 사도 신경을 더욱 잘 익히고 실천하도록 마음에 새겨 놓으라고 교회는 권고하며 그들이 이 중요한 기도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반복하여 익히도록 했다. 또한 매일 저녁 취침 전에도 이 기도들을 하도록 권고하였으며 따라서 근자에까지도 끝 기도를 마칠 때 이 기도들을 하도록 하였다.

다른 시과경에서와 같이 야과경에서도 낮은 목소리로 주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이 끝나고 초대송과 초대 시편이 끝난 후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하는 청원 기도가 선행한다. 요한 까씨아노(Joannes Cassianus)는 이미 광야에서 살던 은수자들은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시작할 때 이 시편 구절을 즐겨 읊었다고 한다. 야과경에서는 ‘주님, 제 입을 열어주소서’하는 또 하나의 구절을 선행시켜 이 청원을 더 한층 강조하고 있었다. 이는 고요한 침묵의 밤이 지났으니 주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자들의 입을 열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초대 시편인 시편 94편이 끝난 다음에는 축일에는 그 축일의 중심 사상을 주제로 하는 찬미가(Hymnus)가 따르며 평일에도 찬미가가 따른다.

그 다음 하나의 부분으로 되었건 세 개의 부분으로 되었건 시편으로 된 첫 부분을 끝맺고 독서로 구성된 둘째 부분은 하나의 도입부를 갖고 있다. 맨 마지막 시편의 후렴(Antiphona) 다음에 성 베네딕또 규칙서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또 하나의 구절(Versiculum)이 있는데 그 역할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해답이 없다. 그 다음에는 주의 기도를 한다. 공동체가 단체적으로 할 때는 주의 기도를 장엄한 양식으로 한다. 이러한 주의 기도는 야과경의 여러 부분중 한 부분을(Nocturnum) 끝맺는 기도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그 후에 따라 나오는 맺음 기도는 이러한 종결의 의미를 더 한층 강화시킨다. 이는 미사 성제 때 주의 기도에 이어 하는 부속 기도(Embolismmus)와 비슷한 의의와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야과경 독서들은 먼저 봉독자가 주례자에게 강복을 청하고 주례자는 봉독자를 강복 한다. 야과경의 첫 부분의(Nocturnum) 독서들은 일반적으로 성서에서 발췌하였다(평일 성무일도 야과경은 하나의 부분만 갖고 있다). 시초에는 야과경의 셋째 부분의 독서들도 신약 성서에서 발췌되었다. 그런데 칼 대제 때부터 야과경 셋째 부분에 그날 축일의 복음을 해설하는 설교를 읽도록 규정하였다. 그 후 야과경의 둘째 부분에서 교부들의 강론 중에서 독서를 발췌하여 삽입시키거나 성인들의 생애나 전기를 읽었다. 근자에까지 봉독 되던 독서들은 일반적으로 교황 비오 5세 때 규정된 독서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역사 비판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옛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의 전기에는 근거 없는 야화들도 많았다. 이러한 야화들은 차기 성무일도 쇄신에서 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오늘날 성무일도에는 이러한 독서들이 수정되고 개정되었다.

독서들 다음에 응송이 따른다. 대축일과 주일에는 마지막 독서 후에 응송 대신 사은 찬미가를 한다. 이 찬미가는 대 영광송(Gloria in excelsis)과 같이 초대 그리스도교의 찬미 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개정된 성무일도의 독서의 기도는 그날 첫 번째 기도로서 시작될 경우에는 초대송과 초대 시편을 하고 그날의 첫 기도로서 시작되지 않을 경우에는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영광이..’하고 시작한다. 그 다음 그날의 찬미가를 한 후 시편 3개를 한다. 시편이 끝나면 간단한 구절과 함께 성서에서 발췌된 독서와 교부들이나 교회 성현들이나 교회의 공식 문헌에서 발췌된 독서를 한다. 주일과 대축일에는 사은 찬미가를 첨부한다. 그 후 그날에 맞는 기도를 하고 ‘주를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끝맺는다.


제2절 아침찬미와 저녁기도(Laudes,Vesperae).


초대 교회에서 신자들의 참여와 함께 가장 먼저 전례적 성격을 지녔던 아침찬미와 저녁기도인 두 시과경은 공적인 경신 예배로서 거행되었다. 이 두 시과경은 오늘날에도 축제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두 시과경들은 위에 언급된 야과경을 제외하고는 다른 시과경들과 같이 기본 구조는 시편들과 성서에서 발췌된 성서 봉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첫 부분인 시편들은 역사적으로 그렇게 오래된 부분은 아니다. 야과경이나낮기도라고 하는 작은 시과경들에 배치된 시편들은 단순히 순서를 따라 배열된 반면 아침찬미와 저녁기도에는 시편의 다른 배열을 채택하고 있다.

근자에까지 이 두 시과경의 첫 부분은 5개의 시편들이 읊어지고 있었다. 아침찬미의 시편들(속죄의 날에 시편들을 제외하고는)중 첫 번째 시편은 언제나 하느님의 나라 또는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칭송하는 것이었고 이어서 읊어지는 두 개의 시편들은 두 개 시편 모두의 내용이나 적어도 그중 하나의 시편 내용은 아침을 칭송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네 번째 읊어지는 것은 시편에 없는 것으로서 구약 성서에서 발췌한 찬미가(Canticum)였다. 마지막 시편은 한 개의 시편만을 읊은 것이 아니라 그 폭을 넓혀 3개의 찬미시편(Laudate)인 시편 148-150편을 읊었다. 이 찬미 시편에서 이 시과경의 명칭인 아침찬미(Laudes)도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아침찬미의 시편 배열은 교황 비오 10세 전까지는 거의 그대로 전승되었다.


저녁기도(Vesperae)는 주일과 대축일을 제외하고는 다음과 같은 특수 원칙에 따라 시편을 발췌하였다. 주일의 저녁기도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경축하는 시편 109편으로 시작되었다. 그에 이어 따라오는 시편들은 축일과 평일 저녁기도 때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시편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다.

아침찬미와 저녁기도의 각 시편 앞에는 고유한 후렴(Antiphona)이 있다. 대축일에는 그 축일의 중심 사상의 뜻을 드러내는 후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시과경들의 둘째 부분은 옛 구조대로 독서와 노래와 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독서들이 그리스도교적 기본 사상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으로 점차 대축일에는 신약성서의 구원 질서를 드러내는 신약성서의 내용이 채택되었다. 처음 큰 의미를 지녔던 독서는 그 후 야과경이 팽창됨으로써 성경 소구라는 의미로 독서가 축소되었다. 성 베네딕또도 이 시과경들과 다른 시과경들에도 성경 소구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또 오래된 수도원에서도 간소화된 독서를 실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독서는 성서에서 발췌하여 읽은 것이 아니라 성서에 능통한 수사 중 한 사람이 기억하고 있던 성서 구절들을 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독서들은 상당히 긴 것이었다. 이러한 독서가 단편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시과경들안에 짧은 독서로 삽입되어 성서를 보존했다는 것은 성서 봉독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요 특히 옛 전례 계획에는 독서가 기도의 근본 요소로 높이 평가된 것이라 하겠다.

독서다음에 이어지는 노래는 이 두 개의 시과경에는 응송이 아니라 시적 찬미가이다. 이 찬미가들은 중세기에 특히 북 구라파 지역에서 열심한 시풍의 소산물로서 속출되었다. 로마에서는 그들의 간결한 성격 때문에 12세기까지 성무일도 안에 수없이 첨부된 시적 찬미가를 제거하고 로마 성무일도(Breviarium Romanum)에는 소박한 찬미가만을 받아 들였다. 그렇지만 이 두 개의 시과경에는 옛부터 발전되어 오던 신약성서에 기재된 두 개의 큰 찬미가들을(Cantica) 보존하고 있다. 아침찬미에는 즈카리아의 노래(루가 1,68-79)와 저녁기도에는 성모 찬미가(Magnificat, 루가 1,46-55)들이 각각 고유한 후렴으로  읊어졌다.

아침찬미와 저녁기도를 공동체적 단체기도로 성대하게 할 때는 이 찬미가를 부르는 동안 제대와 참여한 자들에게 분향을 하였다. 옛 전례서들은 이 두 찬미가를 단순히 기쁜 소식(Evangelium)이라고도 했다. 왜냐하면 이 두 찬미가는 구원사업과도 연관을 갖고 있으며 공동체로 하는 단체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사상의 빛을 밝혀주며 기쁨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시과경을 맺음 하는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원 기도로서 공동체의 기도(Preces)와 이어서 하는 주례자의 기도다. 아침찬미와 저녁기도 때 교회의 여러 가지 염려지사와 여러 계층의 지위를 위한 청원 기도를 바쳤다는 것이 특색이었다. 그러나 근자에 와서 속죄 시기의 성격을 갖지 않은 날들에는 이 청원 기도가 삭제되고 주례자의 기도만이 남아 있었다. 현재는 이 두 시과경에 청원 기도를 다시 부활시켰다.

기타 다른 시과경에서와 같이 ‘주님을 찬미합시다’(Benedicamus Domino)하는 맺음 구절로서 파견식이 있었고 죽은 이들을 위한 평화의 기원도 했다. 오늘날에는 강복의 말과 함께 강복으로 끝을 맺으며 파견한다.  주일과 대축일 저녁기도는 축제의 저녁기도뿐 아니라 그 축일 전야에 이미 저녁기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일과 대축일에 하는 제1저녁 기도와 제2저녁 기도다. 갈라아 지방에서는 제1저녁 기도가 더 큰 비중을 갖는 고유한 기도로서 일반적으로 유일한 저녁기도였다. 이는 하루의 시작을 해가 지는 저녁부터 계산하는 유대식 계산법에 근거한 것이며 중세기를 거처 오는 동안 로마 전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955년 전례법 쇄신으로 이러한 유대식 사고방식이 후퇴하고 옛 로마 전례의 전통이 다시 소생되었다. 그러나 주일과 대축일에는 유대식 계산법을 따르고 있다.7)


제3절 낮 기도들(Horae minores).


오래된 낮 기도들도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3과경, 6과경, 9과경뿐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진 1과경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각 시과경은 일반적으로 응송 구절로써 간단한 도입구로 시작한 다음 매번 반복되는 각 시과경의 고유한 찬미가를 한다. 이 찬미가로써 해당되는 시과경의 축복을 표현한다. 이어서 3개의 시편이나 긴 시편을 3부분으로 나누어 읊지만 시편의 순서를 따라 채택되었다. 둘째 부분은 아침찬미나 저녁기도에서보다 더 단순하고 간단하지만 그 구조는 옛 형식을 갖고 있다. 독서의 상징으로서 성경 소구와 짧은 응송과 맺음 기도가 있다.

이 시과경들 중 특수한 형태를 가진 것은 1과경이다. 1과경의 시작 시편은 시편의 순서를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주간의 날들을 감안하고 있다.8) 이 1과경을 실제 아침기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성경 소구(Capitulum)와 응송(Responsorium)과 기도가 이어지며 이 세 개의 부분 모두가 대축일에도 그 축일의 중심 사상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아침이라는 시과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1과경이 생겨나게 된 특수한 이유와 과정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서의 기도가(Officium capituli) 첨부되어 있었다. 순교록(Martyrologium)을 봉독한 후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Deus in adjutorium meum)하는 호소를 3번 반복하였다. 이러한 반복은 옛 수도원 기도에는 다른 기도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 독서의 기도는 시편 구절을 읊지 않고 즉시 기도를 한다. 이 기도는 두 가지 모양으로 끝을 맺는다. 첫 부분은 수도원 가족에게 강복하시고 보호하시어 하는 일이 잘 되도록 해달라는 간단한 구절로써 끝맺는 주의 기도와 둘째 부분은 ‘우리를 인도하여 주소서’(Dirigere)하는 기도였다. 이 기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구세주’(Salvator mundi qui vivis)라는 기도의 맺음 양식으로 보아 옛 갈리아 전례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의 맺음 양식은 갈리아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안 열교를 반대하여 중요시되었던 그리스도께 직접 올리던 양식이었다.

독서 기도에는 강복을 청하고 강복을 주는 부분이 따른다. 근자에까지 사용된 로마 성무일도는 이 강복 부분 대신에 9과경에 있는 것과 같은 성경 소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다시 강복을 청하고 강복을 준다. 첫 번째 강복은(Benedicite) 성무일도  주송자가 하기 때문에 불규칙적인 양식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강복은 공동체가 청하는 강복에 주례자가 주는 강복이었다(Deus benedicat). 이상에 언급한 불규칙적인 강복의 이유는 13세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일정한 양식의 강복을 준 것이 아니라 인사를 주고  받는 양식이었다. 이는 공동 식사 시간에 서로 만날 때라든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경우에 강복하소서(Benedicite)하고 인사하던 것과 같이 일을 시작하려 일터로 떠나면서 하던 인사말이었다. 누가 자기의 벗에게 인사할 때도 그에게 축복을 청하였다.(복수형은 존대의 표현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개정된 성무일도에는 이 1야과경이 삭제되었다. 3개의 낮 기도는 공동체로 하지 않는 경우에는 제시간에 맞는 낮 기도 하나만 하면 의무를 채우도록 했다.


제4절 끝 기도(Completorium).


마치 1과경을 아침 기도로 생각한 것과 같이 끝 기도(Completorium)도 저녁 기도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 구조에 있어서도 1과경과 비슷하고 간접적으로는 낮 기도와도 비슷한 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끝 기도는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다. 이 기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3개의 시편이었고 성경 소구로써 시작되는 맺음 부분이었다. 또한 1과경의 경우와 같이 이 부분은 매일 동일한 양식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찬미가도 있었지만 이 시과경의 시작 부분이 아니라 성경 소구 바로 앞에서 하였다. 이 끝 기도 시작 부분은 교황 비오 5세 때 로마 성무일도에 도입되었다. 이 부분은 두 개의 요소로 구성되었는데 첫 번째 요소는 수도원 공동 생활에서 장상의 저녁 훈계와 공동 영적 독서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근자에는 매일 동일한 독서(베전 5,8 게속)로 대치되었고 저녁 시간에 대한 하느님의 충고에 관한 사상이 들어 있었다. 전에는 여기에서 긴 독서를 하며 강복도 청하고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독서의 기도(Officium capituli)에 상응하는 이 부분을 장상 훈계의 기도(Officium collationis)라고 표현하기도 했다.9) 둘째 부분은 하루를 끝맺으면서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고 고백의 기도로 참회의 정을 발한다. 다른 여러 시과경에서와 같이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하는 호소의 기도로 시작한다. 그 다음 양심 성찰의 순간을 갖는다. 죄를 고백하는 고백의 기도를 하고 이중의 사죄경으로 끝을 맺었다. 본연의 이 시과경은 ‘저희를 변화시켜 주소서’(Converte nos)하는 구절로 시작되었다. 이 시과경은 공동 저녁 기도라는 사상으로 충만하며 아침찬미나 저녁기도(Laudes Vesperae)의 경우처럼 신약 성서에서 발췌된 찬미가가 선행하고 있다. 이 찬미가가 자기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감사의 정으로 노래하는 노인 시am온의 노래다.

‘이 집을(habitationem istam)' 은헤로이 찾아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원하는 맺음 기도는 끝 기도가 성당이나 경당에서가 아니라 수도원에서 잠자려 가기 전에 각자가 하던 저녁 기도였음을 확인 시켜 주고 있다고 하겠다. 끝 기도는 가장의 영적 축복으로 끝을 맺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개정된 성무일도는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로 시작한 다음 양심 성찰을 하고 고백의 기도나 미사 경본에 있는 참회 양식을 자유로이 선택하여 할 수 있다. 다음 찬미가를 하고 시편을 읊은 후 성경 소구를 한다. 짧은 응송을 한 후 후렴과 함께 시므온의 노래를 한다. 그 다음 마침 기도를 한 후 시기에 상응한 성모 찬송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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