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채보상운동 주창자 중 한 사람인 서상돈(1850~1913) 선생의 증손자 서공석(72)씨는 평생을 신부로 살아 왔다. 2005년 10월 성당 주임신부에서 은퇴해 현재는 부산 금정구 구서동 선목사제관에 머물고 있다.
서 신부는 22일 “증조부께서 하신 일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국민들이 좋은 일로 기념해 주는 것에 대해 정말 기쁘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 신부는 “당시 국채보상운동은 한국에서 제일 먼저 생긴 시민운동으로 한국 사회가 기념할 만한 것”이라며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가 결성되고 기념공원과 기념관 건립 등 각종 기념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것에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들었는데 증조부는 천주교 박해로 옥에 갇힌 당신의 삼촌들이 배가 고파 소여물을 먹는 것을 본 뒤로 쌀밥을 드신 적이 없었다”면서 “증조부는 돈이 많았지만 자신을 위해 쓰신 적이 없었고, 결국 그런 마음이 국채보상운동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조선교구(敎區)에 이어 대구교구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독립할 수 있었던 것도 서상돈 선생이 물심 양면으로 지원한 덕분이라고도 했다.
서 신부는 “증조부가 시작했던 일에 대해 후손이라는 이유로 나서는 것은 옳지 않고, 지금의 각종 기념사업과 행사들이 국민(자생적)운동으로 펼쳐져야 원래의 취지에 맞는 것”이라며 “100년 전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국민의 마음을 되새겨 좋은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 신부는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중 1955년 가톨릭대학에 들어갔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로마 그레고리안대학에서 8년간 유학한 뒤 1969년 광주 가톨릭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부산 메리놀병원장,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등을 거쳐 부산 사직성당 주임신부로 있다가 2005년 10월 은퇴했다.
서 신부의 증조할아버지인 서상돈 선생은 1900년대 초 인쇄소였던 ‘대구광문사(廣文社)’ 부사장을 지냈다. 서 선생은 국채가 1300만원(현 시세로 3300여억원)에 달했던 1907년 1월 29일 지역 유지들 모임인 ‘문회(文會)’에서 “국채를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며, 800원(당시 쌀 80㎏들이 한 가마에 7원)을 내놓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주창했었다.
[부산=권경훈기자 werther@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