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쇄신 운동의 영성적 고찰

2009. 6. 8. 오후 2:06:54

글자

 

신앙쇄신 운동의 영성적 고찰

심종혁 루가 영성신학 교수. 신부. 예수회. 서강대 총무처장

 

들어가는 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시면서 다가오는 새로운 천년기를 위한 준비로서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각 개인과 온 교회의 생활에 되도록 충실하게 적용하려는 새로운 투신을 불러일으키도록 촉구하셨습니다. 2000년 대희년의 준비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 걸쳐 모든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주님께 받은 구원 사명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고취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의회 이후 많이 사용되어 온 '새로운 복음화'란 말마디는 현대 세계의 여러 움직임 안에서 교회가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기 위한 노력, 즉 교회가 현대 세계의 여러 시대적 조류 속에 나타나는 여러 징표들을 올바로 읽고 식별해서 이에 대처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동시에 한꺼번에 몰려오는 시대이며, 광범위한 변화의 물결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여러 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급작스러운 변화는 때로 위기를 자아내 기도 하며, 여러 다양한 위기의식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것은 인간 공동체의 공동 관심사이고, 교회 역시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어떤 역할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하는가? 의 문제를 심각하게 숙고하고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 과학의 발전은 이제껏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을 축적해 왔고, 생물학의 발전은 생명의 신비를 파헤치고 미세한 유전자의 비밀을 탐구해 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주 과학의 발전은 광대한 우주의 신비를 파헤치며 우주 근원의 신비를 새롭게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과학적 분석 능력은 인간의 심층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인간의 행위와 그 책임에 대해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일반 관념들을 새롭게 수정해 갑니다. 생산의 자동화와 무역의 국제화는 기존의 노사 관계를 수정하고 경제적 및 사회적 제도를 새롭게 조직하도록 촉구하고, 통신 수단의 발달은 세계를 거대한 한 마을로 변화시키면서 인간의 행위와 사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또한 제 3세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에 대한 새로운 인식, 여성의 권리와 존엄과 평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기도 했습니다. 이예들은 단편적으로나마 변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현대 세계의 인간의 삶에 위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커다란 세계적인 조류는 인간이 전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특수한 문제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꾸르실료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꾸르실료 도입 30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열면서 꾸르실료 운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가늠해 보는 것은 신앙 쇄신운동으로서의 꾸르실료 운동의 고유한 정체성을 다시 한번 깊이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신앙 쇄신운동의 영성적 고찰'이라는 이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제를 순서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선 '영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설을 드리면서 영성 생활과 연관된 핵심적 영역을 언급할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정체성의 원천이 되는 하느님 체를, 즉 회심체험의 역동성에 관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의 의미를 집어 본 다음, 제삼자로서 사도적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 본 꾸르실료 운동의 몇 가지 특성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좁은 의미에서 영성신학이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등장하는 신비가들이나 금욕 수덕가 들의 영적 체험, 즉 그들이 체험한 하느님을 향한 내적 성숙의 여정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학문의 한 분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인간의 삶을 유아기, 아동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으로 신체적 혹은 심리적 모습의 변화에 따라 여러 단계로 구분하듯이, 인간의 내면의 모습, 즉 영적 영역에도 어떤 성장의 여정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고전적으로 인간을 영혼과 육신의 합성체로 파악했고, 영혼이 성장해 가는 단계를 정화의 길(purificatio), 조명의 길(illuminatio), 일치의 길(unio)의 세 가지 길(Tripple Ways)로 나누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정교하게 신학화 했습니다. 여기에 담긴 내용은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이기적 욕심에서 말끔히 정화될 때야 비로소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적 사물에 대한 깊은 인식을 얻는 조명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깊이 일치 할 수 있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영성신학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학문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거장들이 남긴 신학적 문헌들을 바탕으로 다루어 나가기 때문에,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 삶과는 거리가 먼 듯한 인상을 지니게 되는 약점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을 연구하면서 우리가 끊임없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질문은 "과연 이러한 내용과 가르침이 나의 삶에 무슨 의미를 전해 주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삶의 복잡함과 분주함에서 도피하고 싶어하는 유혹에서 오는 것이든, 아니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더 깊이 성찰하고 싶어하는 열망에서 오는 것이든, 요즈음에는 많은 이들이 소위 말하는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러한 풍조가 그리스도교 영역에서는 소위 '영성'이라는 주제에 큰 관심을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단어로서,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단어입니다. 비교적 정적인 입장에서는 "영혼이 지니는 품성"이라는 의미로부터, 동적인 입장에서의 "하느님 체험이 삶의 현장에 드러나는 양상"이라는 의미까지 아주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성은 "하느님을 대면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생활, 혹은 하느님의 성령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면서 그 의미가 점차 삶과 연관되어지면서 "인간의 총체적 체험의 의미를 명상과 성찰을 통해 살펴보는 추구로서, 인간 삶의 현장인 이 세상과의 연관 속에서 계속되는 인간의 총체적 체험의 의미를 명상과 성찰을 통해 살펴보는 추구"로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가 우리의 행동, 생활 양식, 타인과의 관계 등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은 주로 개념과 사상을 다루는 사변 신학과는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영성이라는 언어가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나, 단지 가톨릭 전통 안에서만 국한되어서 이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 실존의 영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그 실존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의미하며, 그러기에 단지 특출한 몇몇 사람에게 국한된 영역은 아닙니다. 교회의 전통 안에서 영성 사상을 공부하고 이해하기 위해 살펴보아야 하는 자료들은 대단히 풍부합니다. 영성의 대가들은 무엇을 읽었고, 무엇을 저술했는가? 그들의 영성의 특성을 표현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등의 관심을 지니고 주어진 자료들을 연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양상과 믿는 양상(lex orandi, lex credendi)과는 깊은 상관 관계가 있기에 영성의 연구에 있어서는 전례의 양식, 즉 장소, 건축, 성당 구조, 전례 도구, 성화, 예절 종류, 음악 등 뿐 아니라, 성서와 전통, 기도 양상, 행동 양식, 신심 행위 등을 폭넓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신체적(biological), 심리적(psychological), 영적(spiritual) 등의 세 수준에서 복합적으로 묘사합니다. 영성이란 특별히 인간의 영적 수준의 존재 양상에 우선적으로 관심 하면서, 다른 두 수준의 존재 양상을 바라본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즉, 인간 내면의 세계가 적극적으로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표현되고 있는가? 의 질문을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체험 혹은 하느님 체험이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살고 증거 되는 모습을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프락시스(praxis), 즉 영성이란 "체험(experience)과 성찰(reflection)이 교차하는 역동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찰(reflection)이란 마치 거울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지니는 다양한 체험을 돌이켜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또 다른 면에서 영성을 '실천적 영적 지혜'(practical spiritual wisdom)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이 아는 것(知)과 사는 것(行)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발생합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에서 발생하는 역동적인 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도가 소위 말하는 '사도적 영성'의 주요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어떠한 체험도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어떤 행동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은 구체적으로 하느님 체험에서 흘러나오는 '행동 양식'(modus procedendi, way of proceedings)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꾸르실료의 영성은 꾸르실리스따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드러내고 있는가, 혹은 꾸르실리스따들의 신앙에 합당한 행동 양식은 어떠한 것인가 등의 문제를 지시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의 영역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주제들은 영성 생활의 전반에 걸쳐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으며, 이와 관련된 실천적 지침들은 무엇인가의 영역으로 넓혀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선 관련된 핵심적 주제들을 간단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기도:
우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흔히 언급하고 강조하는 '기도'라는 언어가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언어에 담긴 진정한 내용은 바로 우리 마음 안에 깃들인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열망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는 마음이 중심 되어 전개되어 나가는 체험이 바로 기도의 체험입니다. 그것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든 아니면 대화의 형태로 이루어지든, 고백적 성격을 보이든 아니면 묵상의 성격을 지니든, 그것은 분명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바라는 우리 인간 심성 깊이 간직된 열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꾸르실료 운동은 어떤 양상 혹은 어떤 형태의 기도 생활을 꾸르실리스따들에게 가르치고 권고합니까? 기도가 인간 심성 깊숙이에 담겨 있는 열망의 언어라면, 꾸르실료 운동이 지니는 기도의 영성에는 어떠한 바램과 기대가 담겨 있는가 등의 질문을 깊이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죄: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열망'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기적 욕심, 자기애, 자존심, 이기심, 등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내가 내 삶의 여러 행동에서 원만하지 못할 때, 분명 우리의 열망 속에는 '이기심'이 스며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연관되어 다루어야 하는 내용이 '죄'라는 주제입니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죄란 '분열을 가져오는 원천'을 말하고, '일치의 원천'은 늘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 내면의 체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내부에서 겪는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방법', 가령 어떻게 기도할까? 어떤 자세로 기도할까? 등등에만 관심을 갖지만, 이런 '방법'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 할 수 있다는 태도는 지극히 위험합니다.

영신 식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적 영성에서는 영신 식별(spiritual discernment) 이라는 주제가 늘 중심 주제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과연 하느님 체험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니는 종교적 체험들은 얼마만큼 진지하게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가 다루어져야 합니다.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식별한다는 것은 결코, 마치 보물찾기하듯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것, 나의 체험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찾는 것,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확신을 지니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올바로 행사하여, 자신의 소명에 합당한 바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의 은총의 충동, 그분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원천적인 소명과 열망의 빛에 입각해서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다운 행동 양식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바로 우리의 죄스러움 때문에 우리는 은총의 충동에 둔해집니다.

인간의 행동 양식은 각자가 타고난 성품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즉 각 사람의 성품, 취향에 따라 다른 '식별'의 결과를 얻게 되기에, 우리는 주어진 성품과는 달리 은총에 의해서 든지, 은총이 충동하는 인간적 노력에 의해서 든지 단련되어야 하는 성품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물려받은 수덕 생활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은총' '영신 식별' 등의 주제들을 어떻게 실증적 측면에서 다루어 나갈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나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등의 문제가 신학적으로 성찰되어야 합니다. 기능적인 측면이 아닌 카리스마의 이상적 자아, 즉 우리의 내면 속에 담긴 원천적 열망이 힘을 발휘하여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칠때, 비로소 우리는 내부로부터 오는 충동과 직면하게 됩니다. 이 움직임을 성서에서는 '성 령'(Holy Spirit)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는 충동에 응답하는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기도하는 삶은 바로 내면의 정화를 이루어, 성령의 충동을 점차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찰이란 성서에 비추어 '어떻게 성령께서 나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가?'를 살펴보는 기도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기본 맥락은 '공동체'이고, 이것의 신학적 표현이 '교회'입니다. 공동체란 성서와 사도들의 전승과 역사 안에서 제도적으로 형성되어온 전통을 물려받아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그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고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 '신앙'을 지니지는 못합니다. 신앙이란 전통을 통해 전수 받은 것이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 공동체의 전통을 통하여 전수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과 전통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수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그리스 도교 공동체의 생생한 신앙 체험이 바로 전통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행위의 원천적 자료는 성서이며, 그 성서가 전하는 의미를 그 역사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 속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안에서 서로 나누어질 때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전통의 형성에 기여할 것입니다. 이러한 역동성이 무시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 신자의 기도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쇄신운동을 영성적으로 고찰한다 함은 위에서 언급한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대변하는 기도, 인간관, 공동체, 행동 양식 등의 주제가 각 쇄신운동에 어떠한 모습으로 반영되고 있는가를 살핀다는 말인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모든 신앙 체험 즉 하느님 체험은 회심 체험이며 동시에 소명 체험이라는 관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날 교회내의 신앙 쇄신운동은 어떠한 맥락에서 하느님 체험을 제공하고 있는가? 그 신앙 쇄신운동이 추구하는 영성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 그리고 신앙 쇄신 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도적 양성에 얼마만한 관심을 지니고 있으며 과연 이에 합당한 양성 과정을 제공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들이 교회 내의 여러 신앙 쇄신운동에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영성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의 원천이 되는 하느님 체험, 즉 회심 체험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어떻게 이 회심 체험이 소명 체험이 되는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회심 체험의 역동성
'회심'이란 한 개인에게 종교적 변화를 가져오는 핵심 체험을 의미합니다. 신약성서의 표현을 빌린다면 '새로 태어남' (요한 3,3)을 의미합니다. 분명 여기에 어떤 해석의 문제, 의미 부여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취하는 입장은 어떤 체험의 순수 신학적 내용은 결코 그것이 진행되는 그 순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체험을 돌이켜 보며 성찰하는 가운데 그 체험과 연관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찰(reflection)이란 마치 거울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지니는 다양한 체험을 돌이켜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는 성인들의 자서전이나, 각 신심운동 혹은 수도회의 창립자들의 전기에 기술된 회심 체험에 대한 회고담은 바로 그분이 속한 전통의 이러 저런 요소들을 확인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바로 성찰하는 현재의 맥락에서 그 체험들이 재구성되며, 새로 얻게 된 신앙이나 인식 등을 설명하고 방어하면서 전통의 요소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체험을 조금만 진지하게 성찰해 보면 즉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은 늘 우리의 죄스러움과 연관된 현장이나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죄스러운 현장에 더 깊이 밀접히 현존해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기적 욕심에 가득 찬 눈에는 가려져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입니다. 그래서 더욱 멀리 계시다고 느껴지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죄스런 상황에 정면으로 도전하시면서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창출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며, 새로운 창조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부르시는 장본인이십니다. 우리의 구체적 삶 안에서 자질구레히 겪는 사랑과 절망, 좌절과 희망의 경험들, 즉 작은 회심의 체험들 안에 주님의 부르심들이 있습니다. 뒤집어 표현한다면, 우리 각자의 고유한 사도직 소명과 특질은 우리 자신이 평상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고, 회심하고, 새 희망을 발견하는지 등을 성찰해 보면 식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회심의 체험은 소명의 체험이기에, 모든 회심의 여정은 소명 의식을 통해서 성숙되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회심이란 예수님을 향한 전폭적인 변환,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 회심의 여정은 때로는 세세한 변화와 회심의 점차적인 완성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돌발적인 변화 이후의 점진적인 완성일 수도 있습니다. 회심 체험은 분명 개인적 체험이며, 체험하는 주체의 내면적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통합적 체험으로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과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인식, 감성, 실천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변화로서, 감성적, 지성적, 윤리적, 종교적 영역에서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회심 체험을 정체성의 형성과 연관시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회심 체험은 자기 통합적 특질을 지니고 (quality of unifying self),
2) 긍정적 행동을 가져오고 (positive resultant function),
3) 강도 있는 투신을 불러오고 (intensity of commitment to ideology),
4) 변화의 결정적 순간이 있으며(decisive moment),
5) 소속감 내지는 정체성을 깊이 확립시켜 줍니다(identity oriented).

자기 정체성의 원천이 되는 카리스마의 쇄신
이처럼 모든 하느님 체험은 회심 체험이며 동시에 소명 체험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를 재확인한다는 말은 우리 소명의 의미가 담긴 하느님 체험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며, 이 원리를 교회 내의 각 쇄신운동에 적용한다면 그 운동의 창립 시기의 고유한 하느님 체험을 현대의 새로운 상황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내의 모든 쇄신운동은 본래 그 운동이 지니는 카리스마의 원래 내용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수도회의 경우를 예로 본다면, 각 수도회에서는 모든 회원들이 그 수도회의 창립자의 정신과 카리스마의 다채로운 요인들을 알고자 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수도회의 창립과 연관된 여러 체험들을 신비적, 수덕적, 사도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이해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신비적 측면이란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양상으로서 부르심을 반영해 주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수덕적인 측면이란 이 하느님과의 만남이 가져다 주는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가 어떠한 응답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깊이 성찰한다는 의미이며, 사도적 측면이란 이러한 부르심과 응답이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가져오는 결과를 의미 하기에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봉사의 측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잊고 지내던 재산을 새로이 발견하고 그 현실성을 깨닫는 것처럼 카리스마의 재발견은 모든 쇄신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이러한 준비와 연구를 바탕으로 교회 내의 각 신앙쇄신운동이 지니는 카리스마의 독창성을 찾아내고 그 카리스마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정체성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모든 수도회나 교회 내의 신앙 쇄신운동에 관한 최근 문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느님의 말씀과 창립자에게로 소급되는 논거와 인용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역사의 움직임에 대한 개방성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카리스마의 원천인 창립자의 하느님 체험을 연구한다는 것은 결코 이미 낡은 것, 과거에 속한 것을 되찾는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것을 찾는 작업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카리스마의 기능적 의의, 혹은 역동적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카리스마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으로서의 새로운 발견입니다. 내가 속한 신앙 쇄신운동의 카리스마가 자신의 이상적 자아에 결정적으로 부여해 주는 계시적 의미가 정체성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여해 주신 고유한 이름, 즉 나의 고유한 사도적 사명이 내가 속한 단체의 카리스마에서 보다 완전하고 보다 명백하게 표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의 의미 -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음
이제 특별히 우리 모두가 지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이 이름에 담긴 정체성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구원의 궁극적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찾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안에서, 그분과의 참된 만남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으로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분명 하느님의 계시의 결정적 사건이며, 구원 역사의 결정적 계시입니다. 그분은 분명 역사의 원천이시며, 동시에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마르꼬 8,29) 하시는 예수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전적으로 객관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자렛 예수의 삶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계시는 오직 개인의 신앙 안에서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단지 우리가 누구인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시급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교회란 무엇인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즉, 책임 있고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문제가 전체 그리스도교 교회라는 지평에서 밝혀져야 하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제자직, 즉 사도적 사명 의식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양성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면서 세상의 악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을 함께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 함은 하느님과 세상을 향해서 어떤 특정한 태도를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태도의 뿌리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하느님 사랑의 원초적인 경험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가 지닌 중요한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결심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걸으신 길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길은 바로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는 연대감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걸으신 길을 따르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이는 바로 세상의 악에 대항해 싸우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름에 있습니다. 이는 바로 그분과의 만남이 세상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름잡으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선택은 바로 한 인간의 전폭적인 응답의 태도이기에 삶 전체의 여러 측면에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분의 제자로서의 삶에 핵심을 이루고, 이 요구는 모든 제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러기에 정점은 가난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멸시를 당하신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함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께 이르는 완전한 길이시며 모범이십니다. 예수가 겪으신 수고와 고통은 진정 우리가 영원한 행복이신 그분과 동참하면서 그분을 본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따르는 수고와 고통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는 순수한 마음의 결정이며 전인적인 응답이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 함은 단지 그분을 본받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분의 삶과 사명에 완전히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제자직은 바로 사도적 사명에 투신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적 영성의 관점에서 본 꾸르실료 운동의 몇 가지 특성
꾸르실료 운동은 분명 교회에 봉사하려는 의지에 가득 찬 이들로 구성된 신앙 쇄신운동입니다. 꾸르실리스따들은 자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꾸르실료 운동은 그 자체가 지닌 방법에 의해 사람들이 크리스찬으로서 기본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교회 운동이다. 그것은 그들 각자의 소명을 알아내어 완수하도록 도와주며, 복음으로 그들의 환경을 누룩처럼 변화시킬 핵심적인 크리스찬 그룹의 탄생을 촉진한다" ([꾸르실료 운동의 기본사상], #74). 자신이 지닌 고유한 카리스마에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의 사도적 사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꾸르실료 운동은 분명 사도적 영성을 나누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도적 영성의 관점에서 꾸르실료 운동이 지닌 몇 가지 특성 혹은 방향성을 그려보겠습니다.

하느님 체험의 현장으로서의 일상 현실: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에 출발한 꾸르실료 운동은 평신도 운동으로서 인간의 구체적이며 일상적 삶의 현장에 현존하여 인간의 전인적 존엄성을 위해 봉사할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교회에서 자신들이 지닌 세속적 성격을 지니며 고유하고 특별한 역할을 다합니다. 세속 안에 섞여 살면서, 모든 인간이 나누는 공통적 삶의 현실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꾸르실리스따들이 자신들의 전문적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바로 그 삶의 자세를 통해서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누룩처럼 세상을 내부로부터 성화 시키는데 기여하도록 부르십니다.

꾸르실료 운동과 같은 사도적 영성의 그리스도교 운동은 분명 우리의 삶의 경험 한복판에서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직접적으로 다가 오시기에 우리 마음의 문을 열면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분명 꾸르실료 운동이 교회 내에 기여하는 고유한 양성의 한 방법은 바로 그 운동에 참여하는 꾸르실리스따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의 한 복판에서 하느님을 농도 짖고 깊이 있게 체험하도록 도움을 주는데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을 한번 만나게 되면 우리의 삶은 영원히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만남은 한 인격을 전폭적으로 변화시키고 해방시켜 전적인 사랑으로 남을 위해 투신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일깨움: 꾸르실료 운동의 창시자들이 제시한 기본적인 행동 노선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꾸르실료 운동은 그리스도인 다운 삶의 근본을 케리그마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안을 각 사람이 지닌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일깨워 주는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소망을 하느님만이 채워 줄 수 있다는 하느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제시해 줌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 다운 신앙이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신앙의 선택이란 하느님의 뜻을 관대하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봉사하고 그분께 영광을 되돌려 드리는 것이 적극적인 자세를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일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가슴 안에는 세상의 어떤 것도, 또 어떠한 힘도 만족시킬 수 없는 내적 갈구와 공허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전 삶을 사랑을 위해 투신하기를 갈망하고, 이 갈망은 분명 바로 사랑의 원천이신 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사도적 마음 자세를 지니는 우리의 삶을 감싸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더욱 하느님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한 올곧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꾸르실료 운동의 모든 양성 도구는 각 구성원들로 하여금 어떠한 것이 하느님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하는 길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발견하도록 성령에 귀기울이도록 촉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적 봉사에 헌신:
꾸르실료 운동은 그 출발 때부터 네 가지 영역, 즉 복음화, 인간의 성화, 그리스도인 다운 양심의 형성, 다양한 공동체와의 여러 가지 환경에 복음의 정신을 침투시키는 교회의 사도적 사명에 적극 참여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적 정신을 지니는 꾸르실료 정신은 결코 꾸르실리스따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떠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병원에서, 고아원에서, 그리고 공공 기관의 여러 영역에서 그 말씀이 펴져 나가도록 촉구합니다. 인간이 고통 당하는 곳이면 어디라도 그리스도의 동정 어린 마음은 꾸르실리스따들의 마음과 손을 통해서 전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희생도 이것보다는 더 위대하지 못하며, 어떠한 고통도 이것보다 더 크지 않으며, 어떤 가난도 이것 보다 더 비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개별적인 필요에 봉사하도록 부르시는 초대에 응답하면서도 꾸르실료 운동은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애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열정:
꾸르실료 운동은 분명 교회 운동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느님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모습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이며,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꾸르실료 운동이 보여주는 교회에 대한 헌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돌보고자 하는 원의의 표시일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자이며, 하느님 백성의 봉사자이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기에 하느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이라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려는 우리의 노력 자체가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더욱 생생하게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우리의 사명을 보다 깊이 인식하게 만들어 줍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되려면 우선 자기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우리의 삶 한가운데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희망의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심성 깊은 곳에서부터 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 안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사명 의식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실망시킬 수많은 반대 앞에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을 발견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꾸르실료 도입 30주년 기념을 맞아 "한국 꾸르실료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을 여는 꾸르실리스따 여러분 모두에게 바로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꾸르실료 운동의 고유한 정체성을 더 깊이 인식하고, 그 카리스마에 합당한 방법으로 하느님 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이루시는 구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자 하는 교회적이며 사도적인 열정으로 불태우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끝)

"주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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