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기기-꾸르실료 4일과 그 영성, 영성생활

2009. 6. 8. 오후 1:59:03

글자

꾸르실료 영성과 영성생활

 
유양수 요셉 신학석사 논문
 

1. 서론
2. 영성이란 무엇인가?
3. 꾸르실료 영성이란 무엇인가?
4. 꾸르실료 영성생활이란 무엇인가?
5. 결 론

 

1. 서론

꾸르실료 운동의 기본사상」이라는 책에

꾸르실료란 "꾸르실료가 지닌 방법에 의해서 사람들이 크리스찬으로서 기본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함께 나누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교회 운동이다"라고 정의하고 있고, 또한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따인 우리들 각자가 우리들의 소명을 알아내어 완수하도록 도 와주고 복음으로 그들의 환경을 누룩처럼 변화시킬 핵심적인 크리스찬 그룹의 탄생을 촉진 한다"라고도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따가 지닌 고유한 카리스마에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의 사도적 사명에 동참하고자 하기 때문에 꾸르실료 영성을 사도적 영성이라고 합니다. 이 사도적 영성은 삶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삶의 모습)그래서 어떤 이론이나 논리보다 먼저 삶이 강조되는 귀납법적 사고방식이 꾸르실료 정신의 기초를 이루고 있고, 이러한 삶이 바로 꾸르실료 영성입니다. (그럼 여기서 먼저 영성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그리고 꾸르실료 영성에 대해서 살펴보기 로 하겠습니다.)

 

2.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영혼이 지니는 품성"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영성이란 단어가 있기 전에는 신비 또는 신비주의라는 말로 주로 영적인 의미로만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는 여러 분야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카리스마라는 용어는 가수나 탈렌트들 사이에서 여과 없이 쓰여지기도 합니다.) 실은 영성 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경우, 아주 최근(1970년대 초,미국의 경우 50년대 초)의 일입니다.

이 영성의 의미는 현대에 이르면서 점차로 삶과 연관되어 집니다. 즉 영성이란 "신앙체험 또는 하느님 체험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고, 증거 되는 모습"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성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우리의 행동과 생활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실재로 보여지고, 삶으로 이어지는가" 등에 관심을 둡니다.

신학적인 용어에 라틴어로 Praxis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체험(experience)과 성찰(reflection)이 교차하는 역동적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 Praxis 가 없는 삶은 영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의 부흥회나, 성령기도회, 우리 꾸르실료에서도 감각적 느낌 등, 하느님 체험이 단지 체험만으로 남았을 때는 영성이라고 하지 않음) 즉 어떠한 체험도 그 체험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어떤 행동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행동양식"(modus procedendi, way of proceedigs)입니다.

 

3. 꾸르실료 영성이란 무엇인가?

본래 꾸르실료라함은 꾸르실료의 3 단계인 꾸르실료 이전, 꾸르실료, 그리고 꾸르실료 이후를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핵심 부분인 3일의 꾸르실료를 대상으로 하겠습니 다. 꾸르실료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느님 체험이고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꾸르실료는 3일의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여정 즉 여행입니다. 이 여행은 3일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꾸르실료 이후의 삶이라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으로 넘어 갑니다. 그것이 꾸르실료의 영성을 사는 꾸르실료의 영성생활입니다.

인간이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거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이와 같이 영성형성의 과정을 (영성신학에서는) 대개 3단계인 정화, 조명, 그리고 일치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 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자기를 돌아보는 정화의 과정,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하는 조명의 과정,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일치의 과정을 통해서 영혼이 성숙되는 것을 말합니다.

꾸르실료는 하느님을 체험케 하는 3가지 요소와 3일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3 가지 구성요소란 

*기도 (5가지 묵상기도, 성체조배, 염경기도),

*담화 (14개의 롤료)

*신앙행사 (환영식, 참회예절, 분단성체조배, 마냐니따, 폐회식, 뛰어라, 노래잔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꾸르실료는 잘 조화된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3개의 요소가 잘 조화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5 가지 묵상은 꾸르실료 영성형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5개의 묵상 기억하고 계십니까? 

 

*목요일 저녁 대 침묵 중에 1) 묵상 "너 자신을 알아 보라"를 묵상합니다. 2) 묵상 "자비로운 아버지"를 묵상합니다.

*금요일 아침 3) 묵상 "그리스도의 세 눈길" 을 묵상합니다.

1) 묵상에는 마태 6, 26-31. 마태 6, 33-34. 무엇을 먹고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과 내일의 걱정은 내일만으로도 충분하다라는 위로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2) 묵상은 루가 15, 11-32. 일명 "탕자의 비유"라고도 하지요. 죄 많은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죄스럽고 송구한 마음에 몸둘 바를 모르게 되는 심정으로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3) 묵상에는 마르 10, 17-22 :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요한 12, 4-6 :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이야기 그리고 마르 14, 27-31: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의 배반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추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깨닫습니다. 꾸르실료 목요일과 금요일 묵상은 죄스러움 안에서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정화의 과정입니다.

*토요일 4)묵상 "그리스도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시고 완전한 신이십니다. 그분은 시장하셨을 때 잡수셨고 피곤하실 때 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기에 그분과의 친교가 가능하며 하느님이시기에 무엇이든 우리를 위하여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확신케 됩니다. 토요일 묵상은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회심케 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 할 수 있게 하는 조명의 과정입니다.

*일요일 파견의 날 5) 묵상 "꾸르실리스따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 를 묵상합니 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분신으로 살 때 어려움이 닥치거나 고난이 닥칠 때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용기를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파견의 날 묵상은 이제는 잘 살아야 하겠다는 소명인식 안에서 이웃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치의 과정을 지향합니다. 즉 꾸르실료 3 일의 구조는 첫째 자기와의 만남(하느님 체험) 즉 정화의 길이며 둘째 하느님과의 만남(회심체험) 즉 조명의 길, 셋째 이웃과의 만남(소명체험) 즉 일치의 길이라는 과 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이 만남이 얼마나 주요한 곳인가? 바오로 사도의 다마스커스로가는 도중에 예수님과의 만남, 성인들의 하느님과의 만남들은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꾸르실료 3일의 과정은 꾸르실료 구조에 합당하고 적절하게 담화와 신앙행사가 짜여져 있 습니다. 이러한 꾸르실료의 요소와 구조를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회심을 체험하며, 그 리고 소명체험을 함으로서 꾸르실료의 영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꾸르실료는 이냐시오 영신수련이 기초를 이루고 있기에 극히 수도원적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나"라고 하는 연결 고리 안에서 회심이 반복됨으로써(순환함으로써) 역동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그것은 꾸르실료가 일회성이 아니라 삶 안에 존재하는 어떤 수련(양성)의 연속임을 말해 줍니다. 마치 수도회 재속회의 삶과도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3박 4일의 꾸르실료를 체험한 후에 꾸르실료 교육을 받고 왔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꾸르실료는 교육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꾸르실료는 하느님 체험을 위한 여정이지만 교육의 효과는 있습니다. 교육은 원칙적으로 지적 수준의 향상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영성과는 무관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다음단계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과정, 대학교과정, 또는 대학원 과정이라던가 말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자격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체험이나, 회심 체험은 자격증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은 순환됩니다. 그래서 역동적이라고 합니다.

 

4. 꾸르실료 영성생활이란 무엇인가?


꾸르실료 이후의 삶인 꾸르실리스따의 영성생활은 과연 어떤 것인가?이제 이 대답은 명확해졌습니다. 바로 꾸르실료 영성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꾸르실료의 영성은 꾸르실료를 통해서 체험한 하느님이, 우리 일상(매일)의 삶 안에서, 드러나는(표현되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꾸르실리스따가 꾸르실료 영성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회 수도자는 예수회 영성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는 프란치스코회 영성을 사는 것이 당연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각 수도회의 수도자가 그 수도회의 영성이나, 카리스마를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 수도회의 수도자가 아니겠지요. 꾸르 실리스따 역시 마찬가지로 꾸르실료 영성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꾸르실리스따가 아닙 니다.

꾸르실료를 어떻게 수도회에 비교 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꾸르실료의 근본이, 그리고 꾸르실료 최초의 시작이 수도회의 영성(특별히 예수회- 이냐시오 영신수련)이였고 수도자들의 영성 형성 과정의 특성인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의 과정을 꾸르실료도 갖고 있으며 수도자가 평생을 수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꾸르실리스따도 평생을 꾸르실료 방식에 따라 즉 팀회합을 하면서 수련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꾸르실료를 좀더 알기 위해서 꾸르실료가 탄생한 소위 텃밭에 대해서도 잠시 알아보지요. 텃밭이라고 표현했는데 맞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텃밭의 위치는 스페인이였고, 그리고 이냐시오라는 성인의 영성이였어요. 사실 꾸르실료 뿐만 아니라 레지오 마리애, M.E등 많은 크리스찬 운동과 피정 특히 다른 모든 영신수련의 모체는 이냐시오 영신수련 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이냐시오 성인을 모든 영신수련의 주보성인으로 모셨고 교회가 성직자 수도자의 공식 피정 방법으로 영성수련을 채택하고 있는데 30일 피정이 그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에 대한 것을 조금은 이야기해야 될 것 같습니다. 15세기 당시 가톨릭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수난의 시기였습니다. 안으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고 밖으로는 말틴루터, 헨리8세, 등 교회가 소위 종교개혁에 휘말려 있을 때 홀연히 교회를 수호하겠다고 나타난 분이 바로 이냐시오 성인 이였고 그러한 정신으로 『예수회』를 창설하셨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베네딕도 성인이나, 프란치스코 성인,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 소화 데레사 등 모든 영성의 대가들이 바오로 성인처럼 하느님과의 첫 만남에 의해서 회심케 되지요.

그분은 원래 직업이 군인인 기사였습니다. 불란서와의 전쟁에서 부상하여 병상에 있을 때 성인전과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하느님과의 첫 만남을 체험하고 회심하여 수도자가 되려고 예루살렘 성지로 떠납니다. 그리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바꾸어 놓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정신이 우리 꾸르실료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꾸르실료의 첫 번째 시작은 이냐시오 영신수련 8일 피정 이였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한 프랭크 더프씨도 예수회에서 설립한 학교를 나왔고 또 그의 영신 지도 신부는 예수회 신부인 마이클 브라운 신부 였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군대조직은 예수회의 조직인 로마 군대의 조직과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수석 장군인 마리아를 대장으로 모시는 마리아 군대인 레지오 마리애도 이냐시오 영신수련이 모체입니다.

영신수련 2번째 주에 두 개의 깃발이라는 묵상을 하는데 그것은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인 루치퍼의 군사와 예수님 깃발 아래 모인 그리스도의 군사가 치열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상황 의 묵상입니다. 우리 꾸르실료 역시 예수님을 장군으로 모시는 예수님 군대입니다. 다만 레지오처럼 군대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꾸르실료는 특공대입니다. 그래서 레지오 마리애처럼 우리도 레지오 끄리스띠라고도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나 꾸르실료 모두 악의 세력과 싸우는 예수님을 수호하는 예수님 군사들입니다.)

특별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꾸르실리스따들의 삶의 터전은 한정된 곳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넓은 곳을 지향하고 있고 그 곳에서 핵심그룹으로서 꾸르실료의 영성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꾸르실료 이후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5. 결론



"꾸르실료 운동의 기본사상"이라는 책에는 꾸르실료 이후의 삶을 "크리스찬으로서 기본을 살고 나누는 삶"이라고 조금은 막연하고 어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박 4일의 꾸르 실료의 체험을 조금만이라도 기억해 본다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먼저 우리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 깊은 성찰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도였습니다.

꾸르실료 영성생활의 첫째는 기도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안에서 증거 하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따라서 둘째는 이웃과 나누는 삶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 나누는 삶은 혼자서가 아니라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셋째는 핵심그룹으로서의 삶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교회를 수호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삶입니다. 결국 구체적 의미로서의 우리 꾸르실료의 영성은 바로 이 네 가지의 삶 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해 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현대 사회와 같은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우리 교회가 만들어준 화살기도입니다. 어렵고 지쳤을 때, 화가 났을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그리고 배신을 당했거나, 위로가 필요 할 때도 "주님,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즉시 우리 곁으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둘째는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려는 노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누구에게나 친절하십시오. 친절은 생명을 구하는 기적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는 꾸르실리스따 중에서 친형제처럼 지낼 수 있고 무슨 말도 마음을 열고 말할 수  있는 형제 하나 또는 둘을 만드십시오. 그것이 핵심그룹입니다.

넷째는 교회를 사랑하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교회를 수호하는 파수군이고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이제 "꾸르실료 운동의 기본 사상" 제2장 제1절 내용의 일부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는 것으로 결론을 끝맺을까 합니다.

"교황 및 교구 주교와의 자녀관계 속에서 확고하고도 진정한 친교의 증거, 즉 오늘의 교회에 대한 자각은 친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라고 했고,(96항) "이것이 그리스도가 원했던 교회의 모습이다. 육신에 의하지 않고 성령에 의하여 바로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그 생명과 더불어 일치하고, 상호간의 허용과 사랑과 순명으로 각자가 받은 것을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서로 나눔으로써 일치하여 마침내 모두가 하나의 영혼, 일치된 마음이 되기를 바 랐다 (사도 4. 32). 이 같은 친교는 하느님의 모든 백성(성직자와 평신도)을 한 몸이 되게 한다. 이 친교는 교황과 주교들이 이미 그들이 실제로 친교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고, 일치의 원천이요 기초이며, 영구적이고 볼수 있는 일치의 중심이 됨으로써 교회 안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라고 97항과 교회헌장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의 일치의 모습이 꾸르실리스따의 본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박 4일의 꾸르실료를 마친 꾸르실리스따들이 사도의 시간 때에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께 맹세했던 고백 중에서 왕이신 그리스도, 주님의 용사, 거룩한 교회의 군사, 그리스도 왕국의 충실한 전위대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자신을 봉헌했던 것을 상기하면서 꾸르실리스따의 정체성을 생각해 봅니다.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수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군사인 용맹한 용사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수호하고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과 그 대리자들을 충실히 보호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 꾸르실리스따들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 다.

또한 용맹한 그리스도의 용사는 세상의 불의와 모든 악의 세력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용감히 물리쳐야 하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몸소 그리스도를 사는 전투적 사도가 되어야 하는 소명을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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