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루카복음 특강. 2005. 6. 15. 연지동 성당)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랑’은
성경의 ‘아가페’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우리말의 ‘사랑’보다 더 깊고 넓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사랑을
좋아하는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이고, 사랑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또
성경의 아가페를 성적인 사랑과 혼동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또 사랑을 소유욕(독점욕)과 혼동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먼저 사랑의 반대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무(無)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반대는 ‘아무것도 없음’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신 분이고,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의 반대는 ‘아무것도 없음’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 사랑의 반대 모습은 성경에 없습니다.
사람끼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인데, 사랑의 반대는 ‘존재하지 않음’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없다면 세상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평양 같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는 작은
물고기 같은 존재입니다.
물고기는
태평양이라는 바다를 모르지만, 그 안에서 자유스럽게 살아갑니다.
사탄의
유혹은 그
물고기를 바다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낚시의 미끼 같은 것입니다.
그 미끼를 물면 바다 밖으로 나가게 되고, 그러면 물고기는 죽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숨 쉬는 공기와도 같습니다.
인간들은
평소에는 공기를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공기가 희박한 곳이나, 공기가 오염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공기의 중요함을 압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공기 중에 가득한 전파와 같습니다.
그
전파를 수신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주파수를 잘 맞춰야 합니다.
주파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일이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
사랑이란 내려가 주는 것, 같아지는 것.
루카복음
2장 8절-20절은 예수님
탄생 후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하늘과 땅이 하나로 이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하느님이 세상으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셨음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또
3장의 예수님의 족보는
하느님과 사람이 하나의 족보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보통 사람들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생애였습니다.
할례, 봉헌, 세례, 유혹, 배고픔, 죽음 등.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사랑인데,
하느님의 위치에서 사람의 위치로 내려와서 같아지신 사랑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그런데
내려와서 같아진 것에서 멈추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올려서 하느님과 같아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와서 같아지는 사랑을 주셨으니
우리도 올라가서 같아지는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우리가
올라가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인간들이 회개하고 변화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사랑”입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루카 12,30).”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알면서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인간들이 밑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밑에 그대로 두면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내려온
것도 사랑이고, 위로 끌어올리는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사랑에 응답하고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실천>
1)
황금률 :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황금률에서
‘남’은 하느님도 되고, 이웃도 됩니다.
하느님께
바라는 그대로 하느님께 드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바라는 그대로 이웃에게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카 10,29-37)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황금률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강도를 당했다면 바라게 되었을 그 도움을 강도당한 사람에게 줍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내려가 주는 사랑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노새에서 내렸고,
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엎드렸고,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을 자기 노새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더라도,
다친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시간과 돈을 포기한 그 사랑이 내려가 주는 사랑입니다.
옛날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님으로 해석했는데,
요즘에는
강도당한 사람을 예수님으로 해석합니다.
우리가
강도당한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예수님을 돕는 것입니다.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3)
같아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하고, 이웃과도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36).”,또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 6,37-42).”
같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일치를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미움의 고통보다,
나를
미워하고 있을 그 어떤 사람의 고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안 미워하려는 노력을 하기 전에 먼저 미움 받을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로
내려갔다면, 다시 데리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적선”으로 그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일치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정도의 선행이 아니라,
굶어도 함께 굶고, 먹어도 함께 먹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교도소
사목을 할 때 실감한 일인데,
감방
안에 들어가서 함께 살지 않는 한, 신부와
재소자들의 거리는 늘 멀었습니다.
재소자들은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고, 신부는 밖에서 잠깐 안에 들어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는 ‘그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병자
사목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병을 함께 앓기 전에는 그 병자와 같아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같아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그래도
우리는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그날까지.)
같아지지
못한 자의 불행의 좋은 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 나오는 부자입니다.
같아지려고
노력한 자의 행복의 좋은 예는 ‘자캐오’(루카 19,1-10)입니다.
예수님은
자캐오의 위치로 내려가셨고,
자캐오는 예수님의 위치로 올라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랑과 고통>
1)
빠스카의 신비 - 사랑이 클수록 고통도 커집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입니다.
또
그때의 고통은 그 자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어떻든
그 고통을 참고 견뎌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빠스카의 신비의 과정은 고통이지만, 종점은 승리와 영광과 기쁨입니다.
2)
일치되지 않을 때의 고통
하느님은
생선을 주시는데 인간이 뱀을 원할 때(루카 11,11),
하느님은
달걀을 주시는데 인간은 전갈을 원할 때(루카 11,12),
인간도 고통스럽지만 하느님도 고통스러우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다를 때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라고 하셨던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3)
고통은 사랑의 기회
이웃의
고통은 내가 사랑을 실천해야 할 기회이고,
나의
고통은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고통이 아예 없다면 더 좋겠지만, 인간 세상이 그렇지가 않으니.
4)
고통은 은총의 기회
하느님께서
일부러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고통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기회가 됩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5)
고통은 회개와 보속의 기회
편안할
때에는 그냥 그 편안함에 안주하기 쉽지만,
고통을 겪게 되면 좀 더 회개하게 되고, 보속하게 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편안할
때에는 우상숭배에 빠졌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민족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에게 채찍을 내렸고,
그러면
정신 차리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채찍은 바로 사랑입니다.
6)
고통은 단련과 성숙의 기회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 3,12).”
좋은 뜻으로 예수님을 말렸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 라고 혼났던 베드로 사도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그 고통은 그의 성숙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가 겪게 된 그 자신의 참회와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7)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고통을 겪는 것을 허락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무한히, 영원히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은
... 첫 번째 자기 자신입니다.
그 다음은 가족이고, 그 다음은 가까운 이웃이고 ... 그리고 전체 인류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고통으로 좌절하고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주변에서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장)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