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물질이 아닌 사람

2011. 3. 9. 오후 1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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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물질이 아닌 사람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성물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묵주나 십자고상, 성모 마리아 상등 각종 성상을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축복’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복을 빌어준다는 말입니다.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복을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기도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복을 받는 주체는 인격체이지 물질이 아닙니다.


 때로는 물질에 성수를 뿌리고 향을 피우며 십자표를 그어 축복을 합니다. 그러나 그 물질에 하느님의 능력이 붙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물질의 본질은 그대로 있고, 다만 신앙심을 가지고 그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전례에 사용하는 성물을 축복하는 것은 그 도구들을 하느님 공경에 바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축복한 기도의 모든 도구들을 성상이라 하고 축복한 물을 성수, 축복한 초를 성초…라고 부르니까 자칫 그런 물질에 하느님의 능력이나 은혜가 붙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미신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축복받은 물건이나 물질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기시키는 것이므로 소중하게 다루어야하지만 일회성이 강한 것들은 사용 후 폐기하여도 무방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 초를 사용하지만 조명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지가지도 당일 사용 후 버릴 수 있습니다. 다만 그때를 회상하고 믿음을 일깨우기 위하여 집에 보관한다면 그것을 말릴 이유는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신심 도구나 일상적인 건물, 집기를 축복하는 것은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어 주는 기도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축복의 대상이 사람이지 결코 물질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대하게 축복할지라도, 또 교황님이 축복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실건물을 지었는데 교황님이 축복한다고 안 무너지겠습니까? 교통법규를 무시하고 난폭운전을 하는데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 기적의 패를 달고 다닌다고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까? 묵주나 십자가가 자동차 자체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가정이나 자동차에 소위 성물을 두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을 상기하고 자신이 신자임을 자각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심 도구가 민속신앙의 부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책 속 미술관]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1435-45년, 패널 위의 템페라, 194x194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400?-1455년)는 이탈리아 화가로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이자 훗날 수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일생을 경건한 기독교 신앙의 표현에 헌신하였다고 하여 ‘베아토 프라 안젤리코’ 곧 ‘축복받은 천사수도사(天使修道士)’라고 불렸으며, 존 러스킨은 “프라 안젤리코는 예술가라고 불리지만, 예술가라기보다는 영감을 받은 성자이다.”라고 하였다. 밝고 경건한 신앙에 충만하고 천상적인 맑음과 밝은 미를 표현한 종교화를 위주로 한 그의 섬세한 양식은 이탈리아 회화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수태고지’는 신약성서 루가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자렛 마을의 처녀 마리아에게 파견된 대천사 가브리엘이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한 뒤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이는 예수 탄생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수태고지’를 보노라면, 천사와 마리아가 나누는 이 성스러운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이 작품은 기존의 프레스코화가 보인 비사실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정확하고 세밀한 이미지가 돋보인다. 코린트식 기둥들로 장식된 로마식 건물을 비롯해 정원의 온전한 나무와 꽃들, 실제 새의 것을 닮은 가브리엘 천사의 날개와 중국 명대의 자기에 그려진 디자인에서 취한 옷자락의 아라베스크 문양, 정원의 꽃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궁륭 천정 별들의 이미지가 자연에 대한 화가의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에 도입된 과학적 원근법은 이 경건한 순간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비현실적 공간이 아닌 바로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는 공간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런 사실성과 현실적 이미지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성스럽고 신비스런 기운을 표현한 프라 안젤리코의 재능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프라 안젤리코는 바로 자신의 예술을 신의 영광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그림의 주된 테마는 마리아의 집에서 벌어지는 마리아와 가브리엘의 대화이다. 천사는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루가 1,35)라는 말을 하고 있으며,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대답한다. 이 모든 일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섭리임을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놓인 기둥 윗부분에 임하신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 또한 축복이라도 하시는 듯 이 순간 하느님께서는 손을 뻗쳐 강한 황금빛 빛줄기를 성령 비둘기와 함께 이 건물 안에 보내고 계신데, 그 빛이 멀리 마리아의 ‘초라한’ 침실에 머무는 것 같다.
 
지금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자로서의 가브리엘은 그 성스러운 임무에 들뜨고 적극적인 모습이며, 마리아는 성령을 따르는 온유하고 겸허한 모습이다. 머리 모양을 보더라도 구불구불하고 멋진 가브리엘과 곱게 빗어 단장한 동정녀의 머리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두 손을 가슴에 댄 것은 부끄러움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명하신 의무에 복종하겠다는 모습이다. 천사의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 분홍빛 옷자락과 마리아의 청색과 분홍색 옷 역시 이런 순간의 적극성과 수용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분홍이 환희라면 청색은 가난을 사랑하는 겸손함이며 하늘의 여왕인 동정녀를 상징하는 색이 아닌가?
 
마리아의 무릎 부분은 천사가 오기 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흠모하며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잉태하는 젊은 여성에 관한 이사야 7장 14절을 음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림의 왼편에는 낙원에서 추방되는 최초의 부모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보인다. 흔히 대천사 성 미카엘이 이들을 에덴에서 고통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이는 원죄의식을 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가 인류를 죄에서 구하고자 세상에 태어남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금 하느님께 버림받아 부끄러움에 가죽옷을 걸치고 마리아의 정원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가브리엘이 인류의 어머니에게로 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정원은 수태고지가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장소이자 추방된 아담과 하와가 발을 딛는 험난한 세계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죄를 지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더불어 구원의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섭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공간이다. 아무 죄가 없기에 동정녀 마리아를 ‘가시 없는 장미’라 부르지 않는가? 이 정원에는 마리아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백장미들이 피어있으며, 그 꽃 위를 죄를 짓고 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가 딛고 있음은, 오늘 우리 삶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샤갈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사 석사, 파리 3대학교(Sorbonne)에서 아폴리네르의 조각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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