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톨릭신도가 개신교신도들에게
- 서론 -
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천주교)을 비방하고 폄훼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운 거룩한 가톨릭 교회 신자로서 가톨릭교회를 공격하는 개신교인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 글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을 얼마나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고 그 오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낱낱이 밝히기 위해 씌여질 것입니다.
제가 가톨릭을 공격하는 개신교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동굴의 우상(愚狀)"에 빠져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구원을 위해 마련해주신 그 모든 은총의 빛을 교회를 잘못 선택함으로써 받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사실 개신교는 영국의 성공회를 비롯해 정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독교회, 루터교회, 제7일안식교회 등 많은 파벌이 있고 또 그 파벌 안에서도 끊임없이 분열되어 300여개가 넘는 파에 이르렀지만, 이 중 성공회와 정교회 등 가톨릭교회와 "그리스도교일치"를 위해 대화하고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를 제외한 대다수 교회파벌이 가톨릭을 음해하고 비방하고 공격합니다만, 이 글에서 씌여지는 "개신교"라는 말은 모두 악의적으로 가톨릭을 중상모략하는 파벌에 속하는 개신교를 의미하니 그렇지 않은 개신교파분들의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개신교 신도들을 가르치는 목사들 자체가 악의적으로 가톨릭에 대해 이상한 요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신도들에게 진리인양 가르침으로써 그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도들은 모두 "동굴의 우상"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은 동굴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바라보아왔기에 그것이 실체인줄 압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그림자를 실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정작 뒤를 돌아보게 하여 진짜 실체를 보여주어도 그 실체를 오히려 거짓이라 여기며 자신들이 익히 보아온 그림자만이 실체로 믿으려합니다. 일예를 들어보면, 개신교 신도들은 가톨릭의 교리가 성경에 없는 것을 조작해서 만들어내고 그것을 진리라고 가르치고 순종하라고 억압한다고 말하여 가톨릭을 악마교라고 말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톨릭 교리가 대부분 성경에 적시되어있음을 모릅니다. 개신교에서 얼마나 많은 성경구절을 오역하고 진리를 훼손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개신교가 성경을 오역하고 진리를 훼손하면서 만들어낸 거짓된 이설을 목사로부터 그것이 진리라고 배워왔기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참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거짓교회라고 말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진리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신조와 교리를 이곳에 시리즈로 올릴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개신교 신자분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말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글을 읽어주십시오. 이 글들을 읽어나가시게 되면 개신교 신자분들이 그동안 가톨릭교회를 공격했던 것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씌여지게 될 이 글들에 포함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오직 하나인 교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운 교회는 오직 하나였다.
2) 거룩한 교회 : 거룩한 교회는 왜 가톨릭교회이며 가톨릭교회를 왜 거룩한 교회라 하는가(사도신경).
3) 공번된 교회 : 개신교 신자들도 외우고 있는 사도신경의 "공번된 교회(공교회)"는 어디인가.
4) 사도전래의 교회 :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여야 한다.
5) 교회의 영속성 : 예수께서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교회가 존속하리라 약속하신 교회는 어디인가.
6) 교회의 무류성 :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톨릭교회의 무류성을 보증해주시다.
7) 교회와 성경 : "오직 성경으로"만을 외치는 개신교의 오류.... 교회가 먼저인가 성경이 먼저인가.
8) 베드로의 수위권 :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바위라는 뜻)라는 인격 위에 교회를 세우심.
9) 교황의 수위권 : 예수께서 제1대교황 베드로에게 위임하신 수위권은 오늘날까지 이어짐을 증명.
10) 천사와 성인들의 기도 : 개신교인들도 외우는 사도신경의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고백의 참의미.
11)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 성모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셨음을 성경을 통해 증명
12) 원죄없으신 성모 마리아 : 인류 중 유일하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13)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 연옥신앙의 근거와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근거
14) 세례성사 : 신앙인으로의 새로운 영적 탄생 세례성사.
15) 견진성사 : 신앙인으로서 영적으로 굳건하여 지게 하는 성령의 은총을 받는 견진성사.
16) 성체성사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해 주신 인간 구원을 위한 가장 큰 은총 성체성사.
17) 미사 성제 :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해주신 거룩하고 완전한 제사인 미사 성제.
18) 고해(고백)성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사도들에게 위임해 주신 사죄권(赦罪權).
19) 잠벌,보속/선업,공로 : 죄에 대한 잠벌과 잠벌을 기워갚는 보속, 선업과 공로에 대한 보상
20) 대사와 '면죄부'의 진상 : 개신교인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면죄부'의 진상을 밝힘.
21) 소위 '종교개혁'에 대하여 : 중세 소위 '종교개혁'에 대하여...
앞으로 이 글을 읽게 될 모든 분들은 자신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이 글을 접해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지만, 개신교회의 성경해석(교리)은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의문이 증폭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개혁자들(?)"이 상당부분의 성경의 참뜻을 훼손시켜버렸기에 앞뒤가 잘 맞지 않고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진리가 관통하는 흐름 자체가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개신교파가 끊임없이 분열되면서 성경의 훼손은 더욱 더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의문을 가진 채 살아가다가 가톨릭 교리를 접하면서 많은 분들이 의문을 풀고 진리를 찾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30년 동안 개신교 목사셨던 정춘수님은 가톨릭교리를 접하고 아내되시는 분과 함께 가톨릭으로 귀의하였고, 또 수십년 동안 목사직에 있던 한인수님, 서창제님, 장로이던 오봉순님, 김건영님 외에 여러 명의 유명한 개종자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가톨릭을 비방하는 그 주된 목적은 탄생 배경 자체가 가톨릭과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리와 신학에서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열등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신도분들을 "갈라진 형제"라고 보고 사실상 같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우리의 형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개신교 성직자와 신도분들이 가톨릭을 비방해도 거기에 별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쳐주신 진리를 온전히 보존하며 전세계 신자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교회이기에 그만큼 당당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서론에서 마무리 짓기로 하고 향후 이 글을 읽게 될 모든 분들에게 성령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1. 오직 하나인 교회
하나라 함은 온 교회가 일치하여 동일한 계시의 교리를 믿고, 또 동일한 목자의 권위에 순종함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교회내의 신앙의 일치와 교도의 일치를 요구하셨다. 이것은 성경 여러 군데에 명백히 기록되어있다. 수난 전날 밤에도 기도하시던 중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 17, 20-21)
즉 교회가 일치되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천주 성부로부터 유래하였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성부와 일체되어 계시듯이 신자들도 일치한 신앙으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이단(그리스도교 신조 중 하나 또는 몇 가지를 배척하는 것)과 이교(영적 지도자의 권위에 불복하는 것)의 죄를 살인과 우상 숭배의 죄와 동일시하였고, 또 각종 이단의 발단자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갈라 5, 20-21 참조).
로마 옥중에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신앙의 일치에 대하여 엄격한 어조로 역설하였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회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 3-6).
다시 말해서 '너희가 훔숭하는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고 여럿이 아니며, 너희가 신앙하는 구속의 중개자도 다만 한 분뿐이고 여럿이 아니다. 너희는 다만 한 분뿐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聖化)되었으며, 너희가 희망하는 하느님도 다만 한분이시다. 이와같이 너희는 다만 하나인 신앙을 받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는 신앙의 일치 못지않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 통치의 일치이다. 예수께서는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복수 명사를 쓰지 않고 오직 단수로 말씀하셨다. 즉,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들을 세우겠다"고 하시지 않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18)라고 하셨다. 이는 주께서 처음부터 서로 충돌되는 여러 모양의 교회를 여럿 세우시거나, 또 그런 종류의 무엇을 허용하실 뜻이 도무지 없었다는 증명이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일치 단합하여 한 지도자의 통치 아래 있도록 하신 안배임이 분명하다. 교회라는 것은 가견적(可見的) 단체이므로 가견적 우두머리(목자,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왕국에 비유된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 32-33).
질서가 잡힌 국가에는 반드시 한 사람의 원수가 있고 한 정부가 있고 온 국민이 받을어 지킬 일정한 법전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도 하나의 정신적 왕국인 만큼 반드시 한 사람의 우두머리가 이를 이끌어 가고 신자들은 모두 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교회 통치의 형식이든 신도들이 받들어 지킬 법전이든, 반드시 일정한 계통의 질서 정연한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망하고 어느 동네나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지탱하지 못한다"(마태 12, 25)라는 말씀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양의 우리'라고 부르셨다. '한 우리 안의 한 목자' 아래 있는 양에 교회를 비유하셨다(요한 10,16 참조). 교회의 일치에 대한 비유 중 '양의 우리'라는 말보다 더 아름답고 적절한 말은 없을 것이다. 양들은 항상 떼지어 다닌다. 양들은 잠시 흩어졌다가도 급히 다시 모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양떼는 같은 풀밭을 걸으며 같은 목장에서 사육되고 같은 목자에게 순종한다. 낯선 이의 소리에 놀라 도망친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이 비유로써, 당신 '우리' 안에서 모든 양떼가 동일한 성사(聖事), 동일한 생명의 양식(성체성사)으로 사육되고, 동일한 신앙의 법칙을 하늘 나라에 이르는 지침으로 삼으며, 동일한 우두머리 목자를 따르고 낯선 거짓 목자를 힘써 경계하고 피해야한다는 신앙 행위를 의미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베필'(묵시 21,9)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받았다. 그리스도 교회 율법은 일부 다처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한 분에게 여러 '베필', 즉 여러 교회가 있을 수 없다.
계시가 아니고 상식으로만 판단해도 하느님께서 견해가 다른 여러 교회를 세우셨을 리는 결코 없다. 하느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다. 이런 하느님께서 어떻게 한 교파에서는 일체에 삼위가 계시다 하고, 또 한 교파에서는 일체일위만 계시다 하는 설을 동시에 용인하실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 자신을 하느님이라 가르치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만 한 인간일 뿐이라고 가르치시겠는가. 한 사람에게는 지옥의 존재는 영원하다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유한하다고 계시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상반되는 이 두가지 설 중 하나는 반드시 허위가 아닐 수 없으며, 허위는 하느님께서 가르치실 수도 없고 또 용인하실 수도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고 평화입니다"(고린1 14,33).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천주교 하나 외에는 참교회가 없다 하나, 이 세상의 교파란 것은 외부에 속한 문제이니, 어떤 교파든지 내용이 한 하느님을 공경하고 한 주를 믿어 같은 진리로 나아간다고 하면 몸에 여러 지체가 있으나 결국 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심령적으로는 한 교회로 볼 수 있느니, 교회 분열이나 교회 번식을 찬성하는 바는 아니지만, 결코 구원을 못 받는다고까지 하는 것은 너무 우완(愚頑)한 판단이다" 이제 이에 대하여 비판하여 보려 한다.
교파 분열은 결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상 내적 문제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 정교나 영국 성공회는 겉으로는 가톨릭과 비슷하지만, 그 신조가 다르고 동일한 지도자의 통치를 받지 않으므로 각각 별개이다. 그렇지만 동방교회합동(곱트)파 같은 교회는 겉으로는 가톨릭과 다르나 내실은 동일한 신앙으로 동일한 지도자의 통치를 받고 있으므로 서로 같은 것이다.
"한 구세주를 믿어 같은 진리로 나간다면..." 등의 말도 엄정한 비판을 받아야 할 성질의 말이다. 구세주께서는 천국과 지옥의 영원성을 계시하셨지만, 만일 그 영원성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구세주의 말씀을 불신하는 죄가 아닐 수 없다. 구세주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입으로는 구세주를 믿는다고 하는 소위 '믿는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한갓 말장난일 뿐이다. 그리고 그 영원성에 대한 인정과 부인이 다 같이 '같은 진리'로 용인되기는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또 이런 종류의 불가능이야말로 절대적인 불가능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상반된 신앙을 가지고 통치상 아무 연락도 없이, 각각 따로 떠도는 저 많은 교파들을 다만 소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막연한 말의 테두리 안에 집어넣어, '동일한 혈액' 순환의 생활과 동일한 머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한몸에 비유하려 드는 것은 논리의 무모한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독자가 정말 자기 영혼 구원이라는 대사(大事)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 대하여 주의 깊이 연구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계획적으로 행동하실 리가 없다. 교회는 다만 하나만 세우셨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내걸고는 자유 분방한 사상을 모체로 하여 함부로 생겨났고 또 생겨날 저 무수한 교파에 대하여 예수께서 책임지실 리가 없다.
가톨릭과 신앙을 달리하는 프로테스탄트교회에는 전체적으로 보든지 파별적으로 보든지, 사실 신앙상으로나 통치상으로 '일치'라는 것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 내에는 수백 개의 독립된 교파가 있는데, 그들은 신앙 교리의 약간만이 다를 뿐 아니라 근본 교리조차 서로 매우 다르다. 그 많은 교파, 계속되는 분열, 그칠 줄 모르는 논쟁은 확실히 그리스도 교회의 한 큰 치욕이며 또 미신자들의 입교에도 크나 큰 장애가 된다. 개신교회에도 이 교파가 저 파와 서로 다를 분 아니라, 한 교파내에도 여러 분파가 있어 서로 반목하고 있다.
개신교회는 교리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교회의 통치 기관이나 기율(紀律)조차 천차 만별이다. 영국 교회는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이며, 어떤 교파는 교직으로서 집사, 장로, 감독의 필요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다른 교파에서는 이러한 교직자 계급을 전혀 불필요한 것이라고 배척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신앙과 치교(治敎)의 근본적 일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는 다만 가톨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현재 전세계 가톨릭 신자는 2012년 현재 12억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한 하느님과 한 신앙과 한 세례와 한 신조를 가졌고, 동일한 성사를 받으며 동일한 성제에 참여하고 동일한 지도자의 지도를 받는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불행히 신조의 일부를 부인하거나 정당한 목자를 배반하거나 하면 교회는 이런 사람을 주저없이 제명해 버린다. 교회는 교회의 생명을 침식하는 병적 지체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차라리 그 지체를 잘라버린다.
영국왕 헨리 8세가 혼인에 관한 교회법을 어겼을 때(왕비 캐더린 아라곤을 버리고 궁녀 앤 불린을 왕비로 삼으려 하였을 때), 이 불의의 조치를 거절하면 곧 온 영국이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될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가톨릭 교회는 혼인의 신성성을 침범하는 그 국왕을 단연코 파문하였다. 또 근대에 와서는 독일의 될링거(Dr. Dollinger)가 교황의 무류성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 교회는 그를 처벌하면 그를 따라 교회를 떠날 자가 많게 될 사태를 예상하면서도 그를 파문하였다. 최근 한국 전라도 나주에서도 윤율리아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나주성모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성모신심행위가 매우 그릇되다고 판단한 광주교구장(주교)이 해당 신심행위를 중단할 것을 명하였지만 이에 불복하고 나주성모신심행위를 지속하여 윤율리아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파문한 바 있다. 이토록 일부 지체가 영적으로 부패하여 전체 몸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 교회는 단호히 이를 잘라버림으로써 전체 교회가 영적으로 병이 번지는 것을 결단코 허용하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가 전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즉 서울, 동경, 베를린, 마닐라, 더블린, 파리, 런던, 워싱턴, 그 어느 곳에 가든지 천주교회 성당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는 동일한 교리를 듣고 동일한 성체에 참여하고 동일한 성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위안되는 사실인가!
그뿐 아니라 천주교회의 신조는 고금을 통하여 완전히 동일하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의 진리와 성 베드로가 안티오키아와 로마에서, 성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성 아우구스티노가 히포에서, 성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에서, 성 레미지오가 프랑스에서, 성 보니파시오가 독일에서, 성 아타나시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아우구스티노가 영국에서, 성 펠라지오가 스코틀랜드에서 전한 교리가 다 동일한 것이다. 천주교는 주 예수께서 세우신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와 지역을 통하여 조금도 서로 어긋나는 신조를 전한 일이 절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히브 13,8).
천주교회 내에는 이와같이 경탄할 만한 '신앙의 일치'가 있는 동시에, 정연한 통치 기관의 통일성이 있다. 전세계 12억 신도가 한몸이 되어 한 사람의 가견적 지도자에게 연결된 것이, 마치 우리 몸의 각 지체가 그 머리에 연결된 것과 같다. 각 신자는 그 지방 신부의 지도를 받고, 각지에 있는 신부들은 그 교구 주교의 관할을 받고, 전세계의 모든 주교는 로마의 주교, 즉 성 베드로 사도의 계승자이며 가톨릭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에게 순종한다. 로마 교황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代理者)이다.(--> 이에 관하여는 추후 성경을 근거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교회에서는 가끔 어떤 교리에 대하여 정의(定義)를 내려 새로 신조를 선포하는데, 이는 교리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정의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알지도 못하던 교리, 즉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계시된 교리 외에 어떤 교리를 새로 조작하여 선포한 일은 절대로 없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언약하신 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부 받았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신조를 그대로 가르칠 뿐이다. 교리라는 것은 도무지 개변하거나 폐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어떤 교리를 믿을 교리로 공포한다면, 이는 이미 사도들에게 계시되어 성경이나 성전(聖傳) 중에 함축된 진리를 더 자세히 밝혀 놓기 위한 공포일 뿐, 결코 없던 교리를 새로 만들어 선포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여러 시대 공의회 결의문이나 각 신조 정의의 역사를 보면 분명히 알 것이다.
계시된 진리는 대개 광범위한 것이므로 모든 양상의 유설을 제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계시를 받은 이가 그 계시에 포함된 모든 의의를 명백히 알아야 한다거나 그 의의를 완전히 통달해야 할 필요는 없다. 진리 자체는 물론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것이나, 그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시대의 변천을 따라 더 명료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다만 함축적으로 계시되었던 교리가, 훗날 각종 이단 유설의 대두로 말미암아 거기에 대한 의혹과 오해가 생길 염려가 있으면, 교회는 그 교리에 대한 모든 의혹을 없애고 신자가 걸을 길을 똑똑히 가르쳐 줄 목적으로, 그 교리를 의무적 신조로 명확히 판정하여 공포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 354 ~ 430)는 "신앙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진 이단자의 주장은 도리어 가톨릭 신자에게 교리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얻을 기회를 준다. 이단자들이 교활하게 가톨릭교회의 어떤 교리를 공박할 때 교회는 그 교리를 옹호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므로, 그를 한층 더 면밀히 연구하고 그 의의를 더욱 명료하게 이해하고 더욱 열심으로 가르치게 된다"([神都論], 제6편 2장).
다시 말하면, 처음에 사도들이 전한 계시 내용이나 교리 중에 어떤 진리는 다만 간접적으로 내포되어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면 "모든 (초자연적) 선행을 하는 데는 반드시 은총이 필요하다"라는 교리에는, "모든 영혼의 구원에 유익한 선행을 시작하는 데는 반드시 은총이 필요하다"라는 뜻이 간접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반(反)펠라지오파는 이를 부인하였으므로 교회는 이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이 점을 명백히 정의하여 강조하였다. 이 밖에 다른 교리 문제에 대하여도 무슨 논쟁이나 이설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지금까지 간접적이던 그것을 아주 명확히 선언하여 신자들이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지시하곤한다.
가톨릭교회는 시대의 변천과 필요에 따라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던 교리를 더 명백히 설명하고 이를 공적으로 선언한다. 이 점은 성경이나 교부들에 의거하여서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자신들의 행위로도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은 열성을 기울여 성경을 연구한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삼으며 성경 주석서도 적잖이 발간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처럼 성경을 연찬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더 많은 광명을 얻고 더 명확하게 계시의 참뜻을 깨닫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필요와 경우에 따라 계시의 참뜻을 명백히 깨달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오직 교회가 그 의의를 천명하고 결정할 권한을 가졌느냐 갖지 않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즉 가톨릭 신자와 비가톨릭 신자의 논점은 언제나 결국 교회의 권위 문제에 도달한다.
결론으로, 성 빈첸시오 레린(St. Vincintius Lerin, +450)의 말을 인용하겠다. "우리 영혼에 관한 종교의 사정이 물질적인 육체의 사정과 비슷한 점에 주의한다. 마치 육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자라고 나이가 많아져도 그 개체는 항상 차음과 같은 모양으로 존재하듯,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물의 시초와 종말은 반드시 그 자연적 성향에 의하여 서로 적합한 일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을 진리를 수호할 때, 초대 교회 때 예수께서 뿌리신 진리의 씨앗과 지금 수확하는 결실과의 사이에도 무슨 실질적 차이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자신의 직무상 엄숙한 책임을 지고 언제든지 그 교리를 지성(至誠)으로 보호하며, 교회내에 함축된 신성한 교리는 교회가 이를 바꿀 수도 없고 보태거나 빼지도 못한다."
2. 거룩한 교회
거룩함, 즉 선성성은 참된 교회의 한 표징이다. 이는 우리가 사도신경의 한 구절에서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믿으며..."라고 고백하는 까닭이다.
가톨릭교회는 주 예수께서 신도들을 성화(聖化)시키기 위하여 세우신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성 베드로는 당시 신도들에게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I베드 2, 9)라고 하였다.
우리 교회를 창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하신 윤리 교훈과 그분이 세우신 성사(聖事)는 우리를 성화하고 향상시킨다. 교회에서 주님의 공의와 인자와 신성과 진실을 말함은 다만 주님의 완덕을 찬송하고 찬미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의 모범을 본답아 공의롭고 인자하고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언제나 구세주의 강생과 그 행적과 돌아가신 일 등을 들어 신도들의 성화를 도모한다. 열심한 신도들에게 마구간에서 태어나 나자렛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보다 강력한 감화의 동력이 또 어디있겠는가. 주께서 사도들을 전세계에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심과 주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온 나라에 성전(聖殿)을 세움과 신부가 지구의 끝까지 파견되는 것이 모두가 신도들을 성화하기 위함이다.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에페 4, 11 - 13)라고 하였다.
가톨릭교회가 신도들에게 선포하는 도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고지선한 완전한 도덕이다. 교회의 여러 성인들의 행적은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떠다니는 우리를 영원의 피안으로 인도하는 별과 같은 구실을 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배반하고 타락한 사람들의 전기는 마치 위험을 예보하는 횃불처럼 우리를 깨우쳐 저 무서운 바다 밑의 암초를 피하게 한다.
가톨릭교회는 신도들이 성화해야 할 이유만을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화의 방법을 강구해 준다. 즉 기도와 성사가 그것이다. 교회는 우리가 시시각각 기도와 묵상으로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권장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 최대의 원천은 교회의 칠성사이다. 즉, 세례, 견진, 성체, 고해, 신품, 혼인, 병자 성사이다.
우리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써 다시 태어나는 은총을 받아 이로부터 그리스도 신비체의 한 세포가 된다.
성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 3, 27). 마치 성령이 그리스도와 서로 떠나지 못하심과 같이, 우리 육체는 성령의 궁전이 되었고 우리 영혼은 주님의 성소(聖所)가 된 것이다.
견진성사로써 하느님의 새 은총을 얻어 일생 동안 모든 유혹을 물리칠 만한 사람이 된다.
성체성사에 의하여 우리는 하늘에서 온 '살아 있는 빵'으로 양육된다.
고해성사로는 세례 후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린다.
신품성사로는 성사의 권한을 받으며 성직을 충실히 해 나갈 수 있게 한다.
혼인성사로는 아내와 남편에게 은총을 베풀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녀를 낳고 기르게 한다.
병자성사로써 임종 때 하느님의 은총을 얻고 세상을 영원히 이별하기 전에 용감하고 정결하게 한다.
한마디로 가톨릭교회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이를 때까지 늘 지켜주고 감싸주며 생명과 불멸의 영약을 준다.
이렇게 교회는 신자들의 성화의 필요를 역설하는 동시에 그 방법도 제공하므로 교회 안에는 신성한 결실로 무수한 성인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달력은 12사도의 이름 뿐 아니라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한"(히브 11, 37) 모든 순교자의 이름과, 수많은 거룩한 증거자와 은수자와 깨끗한 동정 성녀의 이름으로 장식되어 모든 날을 다 성인 기념일로 정하였다. 그들의 전기, 예를 들면 성 베네딕토, 성 프란치스코, 성 돈 보스꼬, 성녀 데레사, 성녀 루치아 등의 행적을 읽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성인 성녀를 무시하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성인 성녀를 공경하는 러시아/그리스 정교나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에서 분리되기 전의 성인 성녀는 공경하지만, 분리 후에는 자기 교회에서는 성인다운 사람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
가톨릭교회는 예전 뿐 아니라 현대에도 성인 성녀가 계속 나오고 있다. 19세기만 하여도 31명이 복자로, 78명이 성인으로 선언되었으며, 그들의 성덕은 그 지방의 비가톨릭신자조차 칭송하여 마지않는 바다. 우리가 20세기의 사도를 보고 싶다면 유럽에서 공산당 폭동이 일어났을 때 스페인, 멕시코와 러시아와 그 위성 국가에 있는 주교 중에서 찾아볼 수있을 것이다. 바로 오늘날에도 공산국가에서 가톨릭교회는 공공연한 박해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옥중에서, 혹은 유배 중에, 베드로와 바오로에 비길 만한 숭고한 용기를 보이는 여러 신부, 수사, 수녀들과 신도들이 함께 순교를 감행하고 있다. 잔혹한 형벌에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위하여 의연히 순교하는 사실이 세기마다 얼마든지 있다. (1989년 [로메로]란 이름으로 영화화되어 잘 알려진, 엘셀바도르 군정의 폭압에 저항하다 순교하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곧 시성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세기의 한국 순교사를 보라! 배교하겠다는 한마디로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는데도 그대로 온갖 형벌을 받아 분골쇄신하여 생명을 버린 순교자가 약 1만여명이나 되지 않았던가. 한국전쟁 때에는 홀몸으로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음에도 끝까지 수난당하는 양떼와 생사를 같이 하여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참살당했거나 납북되어 온갖 모진 형을 받다가 죽은 교황 사절 방주교를 비롯한 여러 주교, 신부, 수도자들의 영웅적 순교사실은 우리가 몸소 목격한 것이 아닌가!
(얼마전 아프리카 수단에서 모든 것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린다. 가톨릭교회에는 수많은 성직자들이 전세계에 퍼져 이태석 신부와 같이 헌신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이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교회가 거룩하다하여 그 신도 모두가 '성인'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물론 신도들 중에도 가톨릭 신도라는 이름만 가졌지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도 많이 있다. 이런 탕자를 자모이신 교회가 영영 내쫒지 않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합치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I디모 1, 15).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하느님의 벗이 되게 하기 위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우리를 맺으셨고 그들은 감복하여 주님을 따랐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아무리 타락한 대죄인이라도 교회에서 영영 내쫒지는 않는다. 이는 교회가 그 죄악을 허락하여서가 아니라 그 죄인의 회개를 기다리는 애덕행위에서이다. 교회는 결코 죄인에게 실망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가끔 발견되는 악한 존재가 결코 교회의 신성성을 손상하지는 못한다. 소수의 불량 신자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교회를 '거룩한 신도들의 모임'이라고 불렀다. 시대의 변천과 환경의 악화로, 부패와 해이의 분위기에 싸인 16세기의 일부 교회가 자못 일대 혁신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점만을 들어 어떤 이는 "교회를 세운 주장자는 거룩하고 그 목적은 거룩하다 할지라도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중간에 교회가 교주(예수)의 창립 본의를 떠나서 부패 타락하였으니 그 일은 어쩐단 말인가"(韓聖果 著 [성서를 통하여 본 천주교의 오류] 제2장)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타락한 교역자나 수도자보다 정결한 교역자나 수도자가 절대적으로 많았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만 해도 가톨릭 신부가 5만명은 족히 넘는다. 만일 그 천분의 일인 50명의 신부가 타락했다면 그 누명은 5만명의 신부가 함께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듯이, 16세기의 교회도 소수의 타락한 신부들의 죄과에 딱하게도 연좌되었던 것이다. 교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톨릭교회를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오직 문제의 대여섯 교황을 들어 비도덕가라고 비난한다. 가령 이를 사실이라 치더라도 266명의 교황 대 오륙 명의 교황은, 12사도 대 유다 한 사람보다 작은 비율이다. 유다 한 사람의 존재로 사도단의 신성성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일시적이고 국소적인 현상으로 가톨릭교회의 신성성을 부인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잎에서 말했듯이 가톨릭교회의 모든 신성한 결실이라든가(이런 결실이 과연 개신교회에 있는지 형제들은 살펴보시길), 그리스도교 전파에 끼친 교황의 공적, 인류 문명 선도에 역점이 되는 교황의 공헌 등은 모두 덮어버리고, 다만 일시적이고 국소적인 약점만을 번번이 들춰내는 것은 너무나 공정성을 잃은 논법이라 아니할 수 없고 또 바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부도덕한 교황 몇 사람을 들어 266명의 교황이 모두 그러하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논리적 정신의 정상 상태와 바른 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266명의 교황 중 79명은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세속 권세의 압력 없이 교회가 자유 자재로 교황을 선출하려 할 때는 70여명의 추기경 중 언제나 학식과 덕망이 가장 높은 인물이 당선되어 왔고 또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음이 교회의 현실이다. 이를 부정한다면 다른 무엇으로 표준을 삼을 수 있을까.
교회의 혁신이 필요할 때가 있다면 그 방법 문제도 또한 중대한 것이다. 그 혁신은 교회를 이탈해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죄악을 정복할 수 있는 강한 무기는 빛나는 덕행과 열렬한 기도와 특히 성사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는 이런 무기를 얻을 수 없다. 옛부터 진정한 개혁은 모두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는 언제든지 왕성한 생명력의 원천과 혁신의 요소와 성화의 방법을 자체내에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는 당시의 대혁신자로서 그 하부 성직자와 신도들의 도덕을 향상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브라가(Braga) 대주교 바르톨로메오는 사회 계급의 상하 빈부를 가리지 않고 그 죄악을 없애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성 이냐시오(St. Ignatius)와 성 알퐁소(St. Alphonsus)는 동료와 함께 유럽 전역의 도덕 혁신과 호교의 명성으로 대성공의 영광을 얻었다. 가톨릭교회 내의 이 저명한 개혁자들은 말로만이 아니라 놀라운 성덕으로 각기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루터(Luther)나 칼빈(Calvin), 츠빙글리(Zwingli), 녹스(Knox), 헨리8세 등의 사생활과 그들이 한 일의 결과를 지금 열거한 진정한 개혁자들의 그것에 비해 보라. 그 차이가 어떠한가. 루터파 개혁자들의 사생활은 잔악과 약탈과 음험으로 넘쳤고(특히 루터의 불미스런 언행은 대역사가 그리자르(Grizar) 씨의 루터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또 1541년 루터가 지은 [Hans Wurt]가 그 대표적 부정한 언행을 증명한다), 그들의 반역은 결국 피비린내나는 내란과 종교전쟁, 수백을 너는 교파의 분열을 일으켰을 뿐이다. 당시의 부패를 일소하기 위한 혁신 대업을 성취하려면 으레 교회의 책임자와 협력하여 정의로써 일에 착수함이 당연한 순서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하느님 제단 아래 엎드려 순명/가난/정결 서원을 공공연히 발표한 그들이 오만과 음욕에 빠져 그 맹서를 깨뜨리고 교회를 이탈하였다. 루터, 츠빙글리, 녹스 등은 일찍이 가톨릭교회의 신부로서, 자신들이 미사성제를 봉헌하던 제단을 무엄하게도 파괴해 버리는 패악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하느님께 대한 그럴 수 없는 모욕이다. 만일 그들이 반기를 들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억제하고 가톨릭의 개혁자와 일치 협력하여 진정한 개혁에 몸바쳤더라면 그들은 십자가의 사도로서 하느님과 만민앞에 알마나 고귀한 불멸의 영예를 읻었겠는가. 그날엔 그들은 교황과 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로부터 존경의 환호를 받았을 것이며, 성 가롤로 보로메오와 성 이냐시오와 아울러 성전의 제단 위에서 존경을 받을 것이며, 분열없는 주님의 몸인 한 교회를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
[울지마 톤즈 -- 이태석 신부 이야기]
3. 지극히 공번된 교회
공편성이 참교회의 표지라는 것은 사도신경의 한 구절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믿으며..."에 밝혀져 있다. 이는 참교회는 지역적인 것이 아니며, 유다교와 같이 민족적 제한도 없으며, 오로지 전세계적 보편적인 교회여서 인종과 언어의 다름을 묻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시공초월의 교회다.
이 영광스러운 참교회에 대하여는 일찍이 다윗 왕이 예언한 바 있다. "땅이란 땅 끝마다 돌이켜 야훼께 돌아오고, 만백성 온갖 족속이 당신 앞에 절하로리다"(시편 22, 27-28).
주께서 사도들에게 전교의 명령을 내리실 때, 전세계를 무대로 삼고 전세계의 인류로 하여금 주님의 복음을 듣게 하셨다. 유다교와 같이 민족적인 것도, 이슬람교, 불교와 같이 지역적인 것도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전세계적으로 일체를 이루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쳐라"(마태 28, 19).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 8). 주님의 이 말씀은 실현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교회의 한 표지로서 그 공번됨을 으레 들게 된다.
주께서 이 예언을 하실 때에는 온 세상이 우상숭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고 극소수의 신자들만이 세상 한쪽에서 숨어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각지로 떠날 때 성 바오로는 "그들의 소리가 땅에 울려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로마 10, 19)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30년 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1, 8)라고 하였다.
2세기 말 성 이레네오(St. Irenaeus, 130 ~ 202)는 "전 지구상에 널리 퍼져있는 신앙과 교리와 성전(聖傳)은 전세계의 교회가 마치 한가족과 같이, 또 한영혼과 한마음과 한입을 가진 듯이 일치하게 신봉한다. 비록 각국 용어는 서로 다르나 그 교리는 전혀 동일하여, 게르만 교회든지 켈트민족 교회든지 동(東)이집트 교회든지 어느 나라 교회든지 일치되어, 마치 태양이 전세계에 동일한 빛을 비추듯이 신앙도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자에게 동일한 빛을 준다"라고 하였다.
3세기의 오리게네스(Origenes)도 "그리스와 그 밖의 각 국민이 자기 나라의 법률과 관습을 버리고 모세의 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신봉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간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고 생명은 칼 아래 이슬이 되었으나, 교회는 의연히 융성하여 각계 각층에 크게 퍼지고 있다. 이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느님께서 커다란 능력으로 하시는 일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런 보편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가톨릭교회에만 실현되어 온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약 300여개 파 이상으로 분열되었으며 교파마다 그 내용이 서로 다르고 각파는 지방과 시대를 따라 또 그 색조를 달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들은 사도신경의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믿으며..."를 외기는 하면서 공교회(公敎會), 즉 가톨릭(Catholic ; 보편된, 공번된)이라는 명칭은 배척한다.
다만 가톨릭교회에만 Catholic, 즉 '공교(公敎)'라는 명칭이 적합하다. 이는 역사와 현실이 증명하는 바다. 가톨릭교회만이 고대로부터 '공교회'라는 명칭을 공식으로 지녀왔고, 어떠한 핍박과 능욕의 시대에도 의연히 공교적 가치를 더욱 높이 들었었다.
가톨릭교회만이 예부터 '공교회'의 명칭을 지녀왔음은 교회 역사상 뚜럿한 사실이다. 이에 관하여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교자들이 자기들끼리 또는 미신도들과 얘기할 때 가톨릭교회를 항상 가톨릭, 즉 '공교회'라 지칭하였다. 이는 전세계를 통하여 이 명칭으로 공인되었고 이외에 다른 명칭으로는 상호간을 구별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De Vera Relig., c. 7. n. 12)라고 하였다.
가톨릭교회는 명칭으로도 그렇거니와 실제로도 세계 보편의 공교회이다. 이제 그 실증을 들려 한다.
1869년 교황 비오9세 당시 로마 바티칸에서 개최된 대공의회에 가톨릭의 지방 사목자 1천여 주교 중 8백여 주교가 모였었다. 2백 명은 일이 있어 불참하였다. 그들은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벨기에, 덴마크, 기타 유럽 각국에서, 또 캐나다, 미국, 멕시코, 기타 남미 각국에서, 아프리카와 호주에서, 문화의 발상지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서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인 요르단 강변에서, 다마스커스와 레바논 산과 기타 아시아 각국에서 참석하였었다. 공화정 혹은 군주정권 아래의 모든 인종을 대표한 사목자들이 한곳에 모여 한 교황의 사회로 교회 내의 여러 중대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각국 주교들은 묵시록의 말씀대로 "주여,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 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묵시 5, 9)라고 하였을 것이다.
반면, 개신교는 300년 간의 발전상을 만족히 여기는 듯 하나 이를 한번 해부해 볼 필요가 있다. 즉 프로테스탄트 각파의 총수를 300 교파로 나눠보라. 만일 가톨릭교회에 대박해만 없었고 교통의 편의만 허용되었다면, 300년간의 전교 성과가 어찌 그에 비길 것인가! 교회 창립 이후 로마제국의 대박해가 있었지만 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벌써 제국 내의 방방곡곡에 침투되었었다. 그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는 3백년 동안 약 3백교파 이상이 생겼으니 해마다 한 파씩 분열된 셈이다. 여기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분립 교파의 수에 정비례하여 새로 분열되는 파의 수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20교파가 새로 생겨났다. 분열 분열 또 분열... 과연 이것이 참교회의 모습일까!
실로 가톨릭교회는 시공을 초월하여 인종, 민족, 남녀, 노소, 부귀, 빈천의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다 같은 신도의 일원으로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를 균등하게 베풀어 준다. 그러므로 어느모로 보든지 가톨릭교회만이 '공교회'라는 칭호에 적합하다. 그러나 이 논술은 결코 가톨릭을 과장하려 함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의 많고 적음으로 의/불의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내적 가치에 따라 판단하신다. 우리가 진실한 신망애덕의 생활로 교회의 정신을 체득하지 못하면 오히려 가톨릭 신도의 영예를 더럽히게 될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은총을 잃지 않는 자만이 참된 가톨릭 신도이다.
하느님의 완덕과 선과 아름다움을 성심껏 따르는 의인 한 사람의 영혼이 사욕 편정(邪慾偏情)에 빠져 주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수만 명의 인간보다 주님의 눈에는 더 귀중한 것이다.
부폐한 소돔의 전 주민은 멸망당했지만 성조 아브라함 한 사람은 하느님의 애호를 받았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식탁에서 함께 먹던 바알의 예언자 400명 보다도 하느님 앞에 훨씬 존귀한 존재였다.
예수 승천 후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도들과 그 제자들의 작은 무리는 암흑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던 대로마제국 전체보다도 하느님께 더 귀중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진한 보고를 가진 그 교회의 일원이 된 은혜를 늘 감사히 여겨야 하며 더욱 기쁘게 생활해야 한다.
4. 사도 전래의 교회
진정 교회는 반드시 사도로부터 전해 내려온 교회라야 한다. 325년 니체아(Nicaea)에서 개최된 최초의 대공의회가 공포한 신조의 한 구절에는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으며..."라고 하였다(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중).
이는 참교회는 반드시 사도들이 가르친 영원 불변의 교리를 가르치며, 그 성직자의 직권은 반드시 사도로부터 중단없이 계승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리와 상반되는 무엇을 가르치거나, 또는 그 성직자의 직권이 사도 계승의 것이 아니라면 그를 진정한 교회라 할 수는 없다. 마치 한 나라의 외국 주재 대사가 본국 정부로부터 그 직권을 받지 않고는 그 권한을 외국에서 행사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 바오로 사도는 교회는 사도의 기초 위에 건설되었다(에페 2, 20)고 하였다.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반드시 사도의 교리로써 기초를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 신도들에게 "누구든지 여러분이 이미 받은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 8)라고 하였다. 또 제자 디모테오에게도 "그대는 많은 증인들이 있는 데서 내가 들려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하시오"(2디모 2,2)라고 하였다. 이는 디모테오는 바오로 사도로부터 들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교직자들은 전하는 교리가 사도의 교리와 일치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은 반드시 직접 사도 자신으로부터든지, 또는 사도의 정당한 계승자로부터의 서품식을 거쳐 성직에 서임된 이라야 한다.
성 바오로는 하느님께로부터 부름받음이 대사제 아론의 그것과 같지 않고는 아무도 이 존귀한 사제의 직위를 얻지 못한다고 역설하여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이다"(히브 5, 4)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가장 명백하게 모든 자칭 성직자와 개혁자들을 단죄한 것이다. 로마서에도 "전도자로서 파견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 15)라고 하였다. 이는 정당한 교회 주권자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즉 임명을 받았았다는 뜻이요, 제 마음대로 전교하거나 다스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성경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가 "각 교회에서 신도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뽑아 세우구..."(사도 14, 23), 또 바오로는 디도에게 "내가 그대를 그레데 섬에 홀로 남겨 두고 온 것은 내가 거기에서 다하지 못한 일을 그대가 완성하고 내가 일러준 도시마다 교회의 원로들을 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디도 1, 5)하였다. 성 바오로 자신은 비록 영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교훈을 받았지만 역시 안수의 예를 받아 사제의 성직에 오른 다음 비로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사도 13, 2-3 참조). 이는 성직 서임에 대하여 후배에게 보인 거룩한 모범이다.
어떤 나라에서든지 사람들이 제 뜻대로 관직에 취임할 수는 없다. 반드시 위로부터의 임명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에 질서가 서지 못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교회를 친히 창립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점에 무관심하셨을 리가 없다. 질서의 하느님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주께서 특정 인물을 사도로 선정하시고 임명하신 것이다(루가 6, 13 ; 마르 3, 13-14 ; 15, 16; 요한 17, 18 참조).
사도직이란 이렇게 엄숙한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 진리의 사도가 되어 보려는 열정에 몰려 제 뜻대로 되지는 못한다. 이미 말한 바도 있거니와 사도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후계자가 될 목자들을 친히 선정하고 임명했다. 그러므로 사도 또는 그 계승자의 임명 없이는 절대로 교역자가 될 수 없다. 또 신자들은 절대로 그 목자를 마음대로 선정하지 못한다. 전세계를 상대로 세상 끝날까지 온갖 어려움을 이기며 엄숙한 책임을 완수해나갈 교회에 있어서야말로 가장 중대한 요의(要義)이다. 따라서 이 교계제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의 엄숙성에 대하여 경외의 마음이 유달리 새로워짐을 느낀다. 감히 묻는다. 오늘날 저 300여 교파로 분열된 소위 '예수교'의 교역자들은 대체 어떤 전통을 따라 누구에게서 '선정'받고 '임명'받았는가... 주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을 팔아서 예언하는 자들"(예레 14, 15 ; 23, 21)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교회인지 아닌지를 엄정히 판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교회가 사도의 교리를 그대로 가르치는가 않는가를, 또 그 교직 직권의 전승 계통이 역사적으로 사도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가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우리 가톨릭신도들은 기탄없이 공언한다. 오직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의 교리를 그대로 보전하며 가르친다고. 다음 내용을 보자. 사도의 교리로부터 이탈된 프로테스탄트와 사도의 교리를 사수하여 온 가톨릭교회와의 엄청난 차이를 불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시대의 교회]
1. 주께서 베드로사도에게 수위권을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 19). "네가 ...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루가 22, 32).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 15).
--> [가톨릭 교회]
사도의 교회를 그대로 이어온 가톨릭교회는 베드로 사도와 그 계승자에게 존경을 드리고 그의 교회 통치권을 인정하며 순종한다.
-->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어떤 파든지간에 모두 베드로의 수위권을 부인한다.
[사도시대의 교회]
2. 사도의 교회는 교리의 무류성을 선언하고 사도들은 사실상 오류가 없는 교권으로 선교하였으며, 신자들도 이를 단순히 개인의 사견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로 알아 기꺼이 따랐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1데살 2, 13).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사도 15, 28).
--> [가톨릭 교회]
세계의 수백의 그리스도교회 중 가톨릭 교회만이 교리의 무류성과 교회의 무류성을 선언하고, 그 성직자들은 강론할 때 항상 교권으로써 하고 신도들은 전폭적인 신뢰로 이를 듣고 따른다.
--> [프로테스탄트(개신교)]
프로테스탄트 각파는 감히 무류성을 선언하는 자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를 논박하며, 목사들은 아무 권위 있는 교리를 말하지 못하고 다만 성경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제시할 뿐, 신도들에게도 그 개인의 의견을 믿고 따를 의무는 없고 성경도 각자의 의견대로 해석한다(성경자유해석).
[사도시대의 교회]
3. 주께서는 친히 금식을 하시고 또 명령하셨다.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17-18).
사도들은 모든 성스러운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금식하였다. "그들이 단식하며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사도 13, 2). "각 교회에서 신도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뽑아 세우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사도 14, 23).
-->[가톨릭교회]
사도의 교회를 그대로 이어온 가톨릭교회에서는 매년 교회력에 따라 특히 주님의 수난을 묵항하는 사순절에 단식하며, 사제는 미사를 드리기 전에 단식하며, 주교가 사제를 서품할 때에는 주교와 사제 후보자가 모두 단식한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일정한 단식 행위가 없고 다만 개인적으로 실행하는 자가 간혹 있을 뿐이요, 심지어 주님의 공로를 감손시키는 것이라고 비웃는 자조차 있고 목사 임명 때도 아무 단식도 하지 않는다.
[사도시대의 교회]
4. 성 베드로와 성 요한 사도는 사마리아에서 새로 영세한 교우들에게 견진성사를 베풀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사도 8, 12).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에서는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들이 영세한 신도들에게 견진성사를 베풀 때 안수로 성령을 받게 한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영국 감독 교회 외에는 안수례를 행하는 파가 없고 감독교회도 이를 성사로 인정하지는 않는다(이는 미국에서).
[사도시대의 교회]
5.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성체성사에 당신의 몸과 피가 실재함을 가르치셨다.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마태 26, 26-28 ; 요한 6장 참조). 성체성사에 관해서는 특히 요한복음 6장 "생명의 빵"에서 예수님께서 자세히 가르쳐주셨다.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행하셨다.>
성 바오로는 "우리는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고린 10, 16)라고 하였다.
-->[가톨릭교회]
사도의 교회를 그대로 이어온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축성한 밀떡과 포도주 속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참된 피가 계심을 믿고 가르친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는 몇몇 의식파(儀式派)를 제외하고는 성체성사에 예수께서 실재하심을 믿지 않고 성찬은 다만 그리스도를 기념함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도시대의 교회]
6. 사도들은 예수께로부터 사죄권을 받았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 23).
"하느님께서는...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2고린 5, 18)라고 성 바오로는 말하였다.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의 주교와 신부는 사도들의 사죄권을 계승한 이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권을 행사한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사죄권을 주신일이 없다고 한다.
[사도시대의 교회]
7. 야고보 사도는 병자들에게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어야합니다"(야고 5, 14)라고 하였다.
-->[가톨릭교회]
가톨릭 신부의 직무 중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병자성사가 있다. 그러므로 교우가 병이 심하면 신부를 부른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여러파에서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
이 이외에도 혼인성사에 관하여도, 또 바오로사도의 성직자의 동정성 권유에 대한 문제도, 그리고 또 이 이외의 여러 가르침들에 대하여 가톨릭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반면 프로테스탄트인 개신교에서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사실에 비추어 어떤 교회가 사도의 교리를 완전히 보존하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또 가톨릭교회만이 사도 전승의 교회임은 2천년의 계보에 명시되어있다. 이것이 또한 그 유일하고 참된 교회임을 증명한다. 그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바로 사도 시대에까지 소급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교파는 그 기원이 사도시대에 있지 않고 모두 근대에 있다.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의 주요 교파는 루터교회 감독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다. 이외의 교파는 대개 이 주요 교파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마르틴 루터는 작센의 수도신부로서 파문을 당한 뒤 루터교회를 창립한 이다. 루터는 1483년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1546년 죽었다.
영국 감독교회(성공회)를 세운 이는 영국왕 헨리8세(1534년)이다. 헨리8세는 일찍이 왕후 캐더린을 버리고 시녀 앤 불린과 재혼하려고 그 허락을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청하였으나, 교황은 이를 준엄히 거절했다. 헨리8세는 이에 원한을 품고 모든 일을 욕심껏 처리하여 우선 정숙한 왕비와 이혼을 하고, 또 폭력으로 즉시 온 영국의 교회를 가톨릭으로부터 이탈시켰다. 이것이 바로 영국 감독교회 성립의 직접적 동기다.
감리교회는 1739년 존 웨슬리가 창립했다. 존과 찰스 웨즐리느느 영국 옥스퍼드 대학 재학 때 몇몇 청년 동지와 함께 성경연구와 기도에 노력하였다. 규칙생활을 숭상하는 그들이 세운 교회를 Methodist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도 남북파가 있다.
장로교회는 존 칼빈으로부터 기원되어 존 녹스가 이를 전파하고, 1560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총회를 거쳐 비로소 또 한 파의 교회를 형성하였다. 이 교회는 정파 신파 협동파 개혁파 북파 등 여러 파로 갈라졌다.
그 밖의 수백 교파의 내력을 하나 하나 열거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교파는 모두 1500년 이후에 창립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전래의 교회가 되려면 천 6백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 16세기 이전에는 장로교회도 없었고, 감리교회도 없었고, 안식교회도 성결교회도 구세군도 없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비록 가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불가견적으로는 각 시대를 통하여 존재하였다"고 한다. 이는 문자 그대로 공허한 억지이다. 이들은 아무 말이나 늘어놓기만 하면 '역사'로 인정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뿐 아니라 주께서 예언하시기를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마을처럼 항상 모든 이가 다 함께 볼 것이며, 그 성직자들은 구원의 진리를 밝은 데에서 설교하여 모든 이가 다 함께 들으리라고 하셨다(마태 5, 14-15 ; 10, 27 참조).
가톨릭교회는 사도로부터 직접 전래한 교회이므로 가톨릭교회의 어떤 주교나 신부든 그 서품된 계보를 사도에게까지 쉽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 나라의 모든 신부는 다 그 직권을 소관 주교로부터 받았고, 그 주교는 그 교권을 로마교황에게 받았고, 지금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베네딕토16세의 계승자요, 베네딕토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계승자이다. 이렇게 각 세기를 통하여 정연한 계보를 밟아 올라가면 최후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최초의 교황인 베드로 사도에게 도달한다. 베드로 사도는 통치권을 직접 예수께로부터 받았다. 여기에 대하여는 후에 자세히 논할 것이다.
4,5세기에 벌써 이단이 생겼으므로 그때의 교부들은 다만 그의 '사도 전래 여부'로 그 진가를 규정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때까지 계승한 로마 주교의 연대순을 만들어 가톨릭교회의 정통을 표시하였다. 테르툴리아노는 이단파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들로 하여금 교회의 기원을 밝히게 하라. 또 저들로 하여금 주교의 교권을 받은 내력을 명백히 하여 주교들이 과연 사도들에게서나 혹은 그 계승자들에게서 서품 임명된 사실이 있는가를 증명하게 하라"라고 하였다(Lib. de Praescrip., c. 23).
5세기 교부들은 그때까지 계승된 50여 위 교황 역대표로 갈라져 나간 교파에 대한 유력한 논박의 무기로 삼았다. 하물며 오늘날 그 다섯 배 이상의 수에 이르는 일련의 교황 전승을 보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놀라운 사실이 그 얼마나 유력한 무기가 되겠는가.
우리는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모든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에게 성 아우구스티노(354 ~ 430)가 일찍이 '도나티스트' 이단에게 한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이번 글을 마치려 한다.
"형제들아, 원 줄기에 붙기를 원하거든 우리에게로 오라. 우리 형제들이 원줄기에서 잘려 나간 것을 보기가 안타깝다. 교부들이 편성한 이 계보에서 성 베드로(제1대교황)로부터 계승된 교황의 수를 세어 보고 또 어떻게 그들이 계승되었는가를 상세히 고찰하라. 이것이 곧 오만 횡포한 지옥문도 쳐이기지 못하는 반석이다"(Psal. contra part Donati).
5. 교회의 영속성
교회는 이 세상의 존속과 함께 영속한다. 이것 또한 진정한 교회의 한 표지가 된다. 교회의 영속성이란 하느님께서 처음에 부여하신 표지를 교회가 영구히 손상치 않고 변질됨도 없이 계속 보전함을 의미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께서 처음에 주신 교회의 본원적 특성인 그 지일성(至一性)과 신성성을 상실하였다면 이를 영속하는 교회라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회의 영속성에 대하여는 성경 여러 부분에 예언되어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알리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 32-33)라고 하였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라고 하셨다. 주께서는 이와같이 교회가 영구히 존속되고 절대로 패망되지 않으리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는 이와 같은 예언이 힘있게 반복되었고 교회의 영속성이 충분히 드러나 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9-30).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는 창립하는 그날부터 하루도 그침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항상 존재할 것이며, 세상 마칠 때까지 영속해야 할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프로테스탄트교파들은 모두 그 기원이 16세기 이후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면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말씀을 과연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부터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교회는 과연 어디이겠는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2천년 역사의 가톨릭교회 말고 어느 교회 어느 교파가 이에 해당하겠는가!
가톨릭교회는 늘 외우 내환에 시달려왔다. 성령 강림일날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시우스를 쳐이길 때까지 약280년간 가톨릭교회는 열 차례나 되는 참혹한 박해를 당했다. 그 잔악상이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Christianos ad leones = 그리스도 신자는 사자에게 보내라"가 바로 당시 유행하던 함성이었다.
신자의 몸에 야수의 가죽을 씌워 맹견에게 물리게도 하고, 그 몸에 송진을 발라 로마 거리에서 불에 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박해자들은 이런 폭행을 변명하기 위하여 결백한 희생자들에게 흉악한 죄명을 씌웠다.
약 3세기 동안 신자들은 로마 시외의 지하 묘지(카타콤바)에 숨어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이 카타콤바는 오늘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순교 성인들의 용기와 당시 신자들의 신앙 실태와 참혹한 고초의 모습을 방문객들에게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천하를 지배하던 대로마제국의 위력으로도 어리고 약한 초대 교회를 근절시킬 수는 없었다. 얼마 후엔 극도의 영화를 누리던 그 대제국도 어느덧 붕괴되고, 로마 황제가 박해의 칙령을 내리던 바로 그 도시는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총본영이 되었다. (그리스도 교회를 가장 처참히 박해한 그 나라 그 자리에 그리스도교회의 총본영이 드러서게 됐다는 것... 과연 이것이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일일까!)
5, 6세기경 북방으로부터 코트족, 반달족, 흉노족, 비시고트족, 롬바르드족 등 야만족들의 벼락같은 남침으로 로마의 찬란한 문물은 하루 아침에 까마귀 손에 돌아가버렸다. 그들은 시내를 약탈하고 성당을 불살랐다. 남아 있는 건 페허의 처참뿐이었다.
그러나 보라! 대제국을 정복한 야만족들은 얼마 되지 않아 진리의 복음에 정복당하게 되었다. 신자가 아닌 기본(Gibbon)도 말하기를 "그리스도교의 발전은 두 가지 커다란 영광의 승리르 얻었다. 그 하나는 현학적이요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로마 신민을 이긴 것이요, 또 하나는 로마 제국을 정복한 시티아(Scythia)와 게르만(Germany)의 야만족을 로마인의 진정한 종교에 귀의시킨 것이다"(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ch. 37. p. 450)라고 하였다.
7세기에 이슬람교가 아라비아에서 일어나 급진적으로 아시아에 전파되었다. 거짓 예언자 마호메트의 교도들은 15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그 여세로 전유럽을 석권하려 위협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황의 헌신적 주선으로 스페인과 베니스의 연합군이 악전 고투한 결과 1571년 레판토(Lepanto)격전에서 드디어 이슬람군을 섬멸했다. 이로써 유럽의 문명과 참교회는 야만족의 침략을 면하고 보전되었다.
이 모든 어려움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교회는 맛보게 되었다. 곧 4,5세기경 아리우스의 주창에 네스토리우스, 에우티케스의 부응으로 이루어진 대이교(大離敎) 문제가 그것이다.
아리안 이교는 급속도로 유럽, 북아프리카, 동아시아에까지 번져 나갔다. 한동안은 여러 대에 이르는 황제의 원조를 받아 그 세력이 퍽 강대하였었다. 가톨릭교회의 주교들은 교좌에서 추방되고 아리안 침략자들이 그 자리를 점령하였다. 오랫동안 이교도의 칼 아래서 고민하던 교회는 또다시 아리안교의 독침에 걸려 번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번성하던 아리안파는 얼마 되지 않아 내부 분쟁이 돌발하여 분열되어 드디어 절멸되어 버렸다.
독자 여러분은 이미 16세기의 소위 '종교 개혁'의 전말을 잘 알 것이다. 이 난폭한 먹구름은 북유럽에서 일어나 태풍처럼 번져 베드로의 배(교회)를 뒤집어 놓으려 하였다. 독일의 대부분은 루터의 소위 '신복음'에 귀의하고, 스위스는 츠빙글리의 새로운 설에 따르고, 스웨덴은 그 왕 구스타브 바사의 위세에 눌려 참된 신앙을 잃고 덴마크는 크리스찬 2세의 음모로 역시 새로운 설에 넘어가고, 노르웨이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가톨릭교회는 거의 박멸되었었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의 칼빈주의와 18ㅅ기의 볼테르주의가 각각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 빛난 가톨릭 민족은 두 번이나 공포 속에서 혈투하게 되었었다. 북유럽 여러 민족 중 가톨릭 신앙을 사수한 충실한 민족은 아일랜드 민족 하나뿐이었다.
가톨릭교회 2천년의 역사는 피의 역사이다. 그렇지만 신자수는 나날이 늘어 12억에 이르렀다. 16세기의 소위 '종교개혁'은 5세기의 아리안 이교와 대체로 같은 것이다. 이 둘을 비교해보자.
1. 둘 다 복음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이상한 일을 좋아하고, 허영을 탐하는 신부에게서 시작되었다(아리우스와 루터는 모두 신부였다).
2. 둘 다 당시 집권자의 보호를 받아 그 힘으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3. 둘 다 한때는 대단한 기세로 전파되었다가, 그 세력이 쇠약해지자 여러 교파로 분열되었다.
아리안파는 이미 절멸되었다.
프랑스의 드 메트르(De Maistre)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프로테스탄트(반항자라는 뜻)가 그 명칭을 언제까지나 보존하고 있다면(그 신앙은 변천하면서도) 이는 언제나 단순히 부정적이요 가톨릭교회에 반항한다는 것밖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즉 적게 믿을 수록 더욱 많이 반항할 것이요, 따라서 더욱 충실한 프로테스탄트, 즉 반항자가 될 것이다. 이 명칭이 이렇게 계속적으로 사실화한다면 마치 우리 몸에 암이 생겨 온몸을 먹어 들어가다가 마침내 사람이 죽어 버리면 암도 저절로 없어지듯이, 프로테스탄트도 그 해독을 끼치는 동안은 존속되다가 종국에는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동일한 원인은 동일한 결과를 낳는 법이다. 이 두 파의 혁명 운동은 모두 반역의 산물이요, 시작과 진행과정, 이산(離散)의 모습이 완전히 같다. 이는 결코 억측이 아니다. 다 알다시피 프로테스탄트의 속화(俗化)와 분열의 경향이 더욱 심해지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5세기의 대 성인 아우구스티노는 교회의 영속성을 진정한 교회의 한 표징으로 삼았다. 하물며 난관을 극복한 2천년! 오히려 번영과 전진의 위세를 보이는 가톨릭교회의 영속성! 이 얼마나 큰 참교회의 표징이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존립은 기적에 의한 것이지, 결코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교황의 세계 정책도 성직자들의 박식과 예지도 아니요, 다만 하느님의 섭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영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바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교회를 적대시하는 자와 그 멸망을 꾀하는 자들에게 묻는다. 이 교회를 누가 감히 전복시킬 수 있겠는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겠는가.
1. 강력한 탄압과 폭력으로 하려는가.
로마의 체사르, 네로로부터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온갖 흉계로 핍박하였으나 모두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200여년 전 한국천주교회의 박해도 마찬가지겠죠).
2. 그러면 대립된 여러 교파들의 막대한 재력과 단결력이 가톨릭교회를 멸망시킬 수 있을까.
세상에 둘도 없던 로마 제국의 세력과 그 완전한 조직으로도 가톨릭교회를 이기지 못하였고 아리안 이단과 네스토리안의 이탈도 결코 가톨릭의 발전을 막지 못하였다. 하물며 근대 교파의 조직이 무슨 힘으로 원기 왕성한 가톨릭교회의 발전을 막을 수 있겠는가.
3. 어떤 이는 "로마 교황의 세속적 정권을 빼앗으면 가톨릭교회는 자멸할 것이다. 교황 영토는 교회 권력의 원천이다. 만일 그것을 빼앗으면 삼손이 머릿카락을 잘리운 듯 하루 아침에 힘이 빠져 영원히 침몰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억측일 뿐, 교황의 속권은 교회 창립 7세기 후에 비로소 생긴 것이다. 만일 속권이 없던 7세기 이전의 600여 년 동안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1870년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1세가 교황의 영토를 점령해 버렸지만 교회는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고 나날이 새로운 기세로 전진하고 있지 않는가.
4. 교회가 21세기의 찬연한 과학을 감당할 수 있을까 염려하지만, 교회는 조금도 과학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과학을 주님의 사자로 환영하여 복음 전파에 이용한다.
5. 자유주의가 교회를 전복시킬 수있을까.
교회는 언제든지 진정한 자유를 존중하는 지역에서는 번영하였고 가혹한 폭정 아래서는 으레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가톨릭 신도들은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교회와 함께 계시므로 멸망할 리가 없음을 확신하는 까닭이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하신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라고 하신다.
6. 교회의 무류성
하느님께서는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사람을 가르칠 권한을 교회에 주셨다. 교회가 그 교권을 행사하여 가르칠 때, 교회는 성령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으므로 절대 오류에 빠질 수 없다.
교회의 무류성(無謬性)은 이미 말했듯이 진정한 종교의 성질에 따라 내려지는 결론이다. 오류가 있어서는 아무리 하여도 하나이고 거룩하며 공번되고 불변하는 교회일 수 없다.
사도 시대의 교회가 무류성의 교회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도들은 1세기에 실로 교회의 유일한 권위였다. 즉, "여러분은 나를 외면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천사와도 같이, 또 그리스도 예수와도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갈라 4, 14). "우리가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2데살 2, 13). 이 모든 말씀은 그들 설교가 무류함을 전제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그 무류성을 1세기의 지도자인 사도들에게만 주시고 그 이후의 지도자들에게는 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면 무류성도 종국을 고하리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를 초대교회 신자들 못지않게 사랑하시고, 저들에게 무류성이 필요하였듯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무류의 성서가 있으니 이것이 초대 교회 무류성의 대용이 될 수 있지 않으냐"라고 한다. 물론 성서 자체는 무류하다. 그러나 무류한 해석자가 없는 성서가 과연 우리에게 유익할 것인가.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역사가 너무나 명백히 증명한다.
교회가 신자들을 가르칠 때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은 결코 독단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명한다. 주께서 성 베드로를 택하실 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라고 하셨다<주) 여기서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며 어부였던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당신 교회 안에 오류가 감히 침입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교회가 오류에 빠졌다면 이는 지옥문이 교회를 정복한 것이 아니겠는가.
16세기의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가 오류에 빠져 지옥문이 교회를 침략하였다고 단언하였다. 영국 교회 내에서 사용하는 [성서 강의록]에도 "교회는 88여 년간 추악한 우상 숭배에 빠져있었다"라고 하였다. 예수의 말씀과 소위 개혁자들의 말이 여기서 전혀 상반된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말을 더 진실한 것으로 믿어야 할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자칭 개혁자들의 말인가.
만일 예수께서 예언하신 교회의 무류성이 헛소리라면 예수는 하느님이 아닐 것이다. 하느님은 헛소리를 하실 수 없다. 그렇다면 또 예수를 예언자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한 예언자는 그 예언이 적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황송한 말씀이지만 예수는 한 혹세 무민자일 것이다. 따라서 거짓 예언자에게 기초를 둔 소위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기 단체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소위 개혁자들의 단언이 과연 어떤 결론을 짓는가 보라!
만일 죽음의 힘이 교회를 정복하지 못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진정한 예언이라고 한다면, 누가 감히 이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가톨릭교회는 진리 배치의 사실도 없고 또 배치할 수도 없다. 세상에는 종교가 많으나, 무류성을 선언한 교회는 가톨릭교회밖에 없고, 또 가톨릭교회의 영속성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이다(5.교회의 영속성 참조).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하신 건축사이시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마태 7,24)라고 하셨다. 이러하신 예수께서 오류의 침투로 넘어져 버릴 집, 즉 교회를 어떻게 세우셨겠는가.
주께서는 사도들을 전세계에 파견하실 때 복음 전파의 전권을 주셨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 19-20).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그러나 사도들 자신이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인 즉, 이를 보더라도 이 큰 사명은 결코 사도들에게만 위탁된 것이 아니라 그 후계자들에게까지 위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의 전권을 위임핫는 동시에, 그 복음을 받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듣고 그대로 실행할 의무 수행을 엄명하셨다.
"어디서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심판날이 오면 소돔과 고모라 땅이 오히려 그 도시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14-15).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루가 10, 16).
이 모든 인용 구절을 고찰해 보면,
1. 사도들과 그 후계자는 예수께로부터 복음 전파의 전권을 받았고,
2. 복음을 듣는 이는 누구든지 들어두지만 말고 마음속으로 진실로 복음에 순종해야 할 절대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실한 신앙인은 하느님께 "주여, 당신은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하라고 명령하셨나이다. 만일 내가 교회에 순종함으로써 기만을 당하였다면 이 착오의 원인은 당신께 있나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미 당신 교회에 당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온 세계를 교화하라고 명령하신 이상, 반드시 하느님의 전지하신 섭리로써 교회를 보호하시어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영영 오류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지도하실 것임을 확신하는 바다. 하느님을 믿고 그의 교회에 순종하는 우리를 그릇되게 버려두실 리가 없다.
이 무류성은 특수한 은혜이므로 주께서 이를 부여하신 시기가 바로 더욱 그 말씀의 엄숙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즉, 주께서 수난하실 때가 가까왔음을 미리 아시고 사도들에게 언약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16).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
주께서는 우선 당신 권능과 사명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단언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고 하셨고, 또 그 권능으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교권을 위임하시어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쳐라..."라고 하셨다. '가르쳐라'는 것은 성경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배포하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입으로 설교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최후에 가장 신중한 태도로 중대한 성명을 발표하시기를 "내가 세상 긑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다. 이런 성명은 구약성경에도 종종 기록되어 있다(출애 3, 12; 예레 2,1-10; 15,20). 하느님께서 예언자나 성조들에게 특별히 와 계심과 감독 후원 보호를 나타낼 때 쓰시던 말씀이다. 주께서 말씀하신 이 몇 구절을 풀어 보면,
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나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특별히 보호하겠다 함이요,
2. 이는 다만 너희의 일생 동안이나 혹은 몇 세기 동안만이 아니라, 세계가 존속하는 동안 항상 너희의 후계자들과도 함께 있겠다고 하신 것이다.
오류를 가르칠 수 있다면 "성도들을 준비시켜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기 위한 것"(에페 4, 11-14 참조)이 될 수 없다. "이리 저리 밀려 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에페 4, 11-14 참조)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무류성에 대한 얼마나 자신 만만한 말씀인가!
교회의 무류성은 성경에 이와같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가톨릭교회의 이런 무류성 주장은 근거없는 설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만일 이를 부인한다면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1. 무류성이 없다면 교회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무류성의 특전을 가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오류에 빠질 수 있거나 둘 중 하나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적 성질의 교회는 있을 수 없다.
2. 만일 교회가 교리상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면 진리 대신 오류를 가르칠 가능성이 있다.
3. 오류를 가르칠 가능성이 있는 이상 교회의 가르침이 진리인지 오설(誤說)인지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불안정 또흔 의혹 상태에 있을 것은 명백하다.
4. 교리에 대하여 의혹을 가진 이상, 그 사람은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참된 신앙은 절대로 의혹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5. 만일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한다면 하느님께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자가 될 수 없다. 성경에도 "읻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히브 11, 6)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류성은 마치 새의 양 날개같이 교회와 서로 떠나지 못할 긴밀한 관계에 있다. 교회에 무류성이 없다면 듣는 자도 참된 신앙을 지닐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름지기 가르치는 신앙 교리나 도덕 사항에 관하여, 오류가 없는 권위와 의심할 수 없는 신임성을 자기 직책의 본질상 갖추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의 전체를 가르치고 또 진리만을 가르친다. 가톨릭 신도들은 이 무류한 교회의 지체가 되었음을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영원 불변의 진리와 평화와 사랑을 대대로 전하여 주며, 신앙에 있어서나 도덕에 있어서나 신자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 들지 않도록 올바로 인도하여 왔다. 성경 자유 연구를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 프로테스탄트교회 신도들이 시달리는 모든 내적 충돌과 의혹과 불안과 번민이란 우리는 모른다. 저 불행한 형제들은 "언제나 배우기는 하지만 결코 진리를 깨닫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합니다"(2디모 3, 7).
가톨릭교회의 눈은 독수리처럼 날카롭다. 경건의 가면을 쓴 사이비종교는 그 앞에서 정체가 폭로되고야 만다.
일부 다처를 용인하는 모르몬파나, 천년 왕국설 주장자나, 교회 여권론자들은 도저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동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헛소리가 비록 비할 데 없이 교묘할지라도 가톨릭교회의 경계망을 뚫고 들어와 해독을 끼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도무지 개혁의 여지가 없다. 이는 교회의 성직자들이 범죄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직자에게도 범죄 가능성이 있다. 교황에게든 신부에게는 은총지위로부터 타락상태를 바로잡기 위한 도덕적 개혁이 필요한 때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교리는 절대로 개혁하거나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듯이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 또한 그 교리와 도덕에 관하여 완전한 것이다. 완전한 것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으로서 감히 하느님의 완전하신 사업을 개혁하려 든다면 이야말로 참월의 극치이다. 루터 칼빈 녹스 헨리 기타 자칭 개혁자들이 하느님의 창업을 마치 인간의 제도처럼 여겨 거기에 감히 개혁의 손을 대었음은 실로 어불성설이다.
1869년 바티칸 공의회 개최 전의 일이다. 미국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자유주의 교육을 받은 한 신사가 제임스 기본스(James C. Gibbons) 추기경에게 "전에 로마 비밀 회의를 열고 성모의 원죄없으신 교리를 취소했는데, 이번 공의회에서는 다시 협의하여 이를 정식으로 폐기하게 된다는데, 즉 1854년의 그 교리 정의는 오류였으므로 이번 1869년 공의회에서 이를 개정한다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괴이한 질문을 받은 추기경은 즉시 "그런 문제는 결코 공의회에 제출될 리 없소. 공의회에서는 일단 결정 공포된 교리에 관하여는 절대로 재론하거나 수정할 수가 없고 한번 공포되면 영원히 변경하지 못하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만일 교회에서 한번 정식으로 결정 공포한 신조를 후에 개폐한 사실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그 예가 바로 곧 교회의 무류성에 치명상을 주고 말 것이다. 감히 단언한다! 2천년 교회 역사상 신조 개폐 사실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또 훗날에도 없을 것이다. 일단 공포된 교리를 후대의 교황이나 공의회가 개폐하지 못하는 사실! 이는 정말 대서특필할 사실이다. 과거가 그러했으니 미래도 의레 그러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목사였다가 가톨릭으로 귀의한 어떤 이는 말한다. "나는 20년간 내 전력을 다하여 가톨릭교회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단 가톨릭교회로 개종하고 보니 나의 모든 의혹은 얼음 녹듯 풀려버렸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자모이신 가톨릭교회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과연 교회는 우리의 자모이시다. 자녀된 우리는 자모에게 오직 사랑으로 순종할 따름이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먹을 때, 그 젖이 해롭지 않을까하는 염려는 조금도 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가르침에는 단순히 따를 뿐이요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한다. 또 어머니가 팔을 내밀 때에는 주저하지 않고 곧 달려든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 신자에게는 신앙의 본능이 있다. 그는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과 신뢰로 영적 자모이신 교회에 순종할 뿐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 3)라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갓난 아이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1베드 2,2)라고 하였다.
7. 교회와 성서
1) 프로테스탄트의 '성경자유해석'에 대한 비판
교회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가르칠 사명을 받은 유일한 교사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한 커다란 창고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께로부터 성서의 보관과 해석의 전권을 받았다. 만일 각개인이 성서의 의미를 자기 뜻대로 해석한다면 교회의 무류성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교회의 산 권위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다만 성경만으로 신앙의 준칙을 삼으려 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세상에는 유다인보다 더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그들의 일대 영예다. 평화시에는 그들은 성경으로 국가(國歌)를 삼았고 재난과 유배를 당할 때에는 성경을 묵상과 위안의 글로 삼았다. 그러나 종교적 논쟁이 일어날 때에는 그들은 아예 주의 말씀에 대한 사견으로 그를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민간에 종교적 논쟁이 일어난 경우에는 대제관과 중의소(衆議所 ; 72인으로 구성)에서 그를 결정한다. 이 대제관과 판관들의 판결에 불복하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 다루기 벅찬 소송 사건이 생길 경우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고르신 곳으로 그 소송건을 가지고 올라가서 레위인과 바로 그때 일보는 재판관에게 제출하면 그들이 조사해 보고 너희에게 판결을 내려 줄 것이다. ... 거기에서 야훼를 섬기는 당직 사제나 제판관의 말을 업신여기고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사형에 처하여라. 그리하여 이런 나쁜 일을 이스라엘에서 송두리째 뿌리 뽑아야 한다"(신명 17, 8-12).
보라! 하느님께서 유다 민족의 종교 쟁의를 처리할 때 법률의 조문에 따라 하지 않고 당신의 특정 기관인 종교 법정의 산 권위로써 하셨다. 사제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법을 백성에게 가르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므로 성경에 정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제들은 이 만군의 야훼가 보낸 특사라, 사람들은 그 입술만 쳐다보면서 인생을 바르게 사는 법을 배우려고 하였다"(말라 2, 7). 실상 이스라엘 민족 중에는 사제 외에 성경을 가진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여러 사람에게 성경의 말씀을 듣게 하셨는가. 성경을 대량 복사하여 나누어 주게 하셨던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만 사제들과 레위들에게 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 지파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에게 거룩한 법에 관한 지식을 직접 가르치게 하셨다.
주께서 이 오랜 관습을 변경하셨는가. 또 성경 연구에 있어서 각자의 견해를 표준으로 삼으라 하셨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도리어 지명된 교사의 가르침을 듣고 복종하라고 명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진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 23, 2-3).
언젠가 주께서는 "너희가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요한 5, 39)라고 하신 일이 있었다. 성경 자유해석자들은 언제든지 이 구절을 논쟁의 무기로 삼는다. 이는 이 구절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권위 있는 성서학자의 주석에 의거하면 여기서의 '성서'는 곧 구약 성서다. 그때에는 신약성서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또 주님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다만 율법의 스승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다. 율법의 스승이면서 예수를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다.
즉 "너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성서를 너희 손안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성서가 내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언하는데도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메시아인줄을 모른단 말이냐"라고 하신 말씀이다. 주께서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성서를 연구하라는 것이지 겨로 계시된 모든 진리가 성서에 담겨 있으니 그를 깊이 연구하라는 것은 아니다.
또 당신께서도 당신의 천주성을 증거하실 때 성서만을 그 유일한 증거로 삼지는 않으셨다. 성서 이외의 방법으로도 증거하셨다.
1. 세례자 요한의 증언(요한 5, 33; 1,34).
2. 당신이 행하신 여러 기적의 증거(요한 5, 36).
3. 성부의 증언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 17).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루가 9, 35).
4. 구약성서의 증언(특히 구세주에 관한 예언 ; 이사야서 등).
이 여러 말씀으로 주께서는 성서의 참뜻을 증명하셨다. "성서를 깊이 파고들어"라는 구절을 가지고 성서 자유 해석 태도를 변명하려는 것은 심한 성구 모독이다.
예수께서는 요한 사도에게 묵시록을 기록하라고 명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에게 성서를 쓰라고 명하신 적이 없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ㅔ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다"(루가 10, 16).
주님의 12사도와 72제자와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 여덟 사람만이 성서를 기록하였다. 네 복음서와 서간 등은 모두 어느 개인이나 어떤 교회에 보낸 것이다. 즉 그것들은 교회 내의 어떤 긴급한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한 집필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내의 어떤 폐습을 바로잡을 목적 또는 신자들의 행동규범을 세워 줄 목적으로 하는 주교의 교서와 같은 것이다.
사도들이 성서를 전파하였다는 사실은 없다. 다만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이 복음을 전하였다(입으로).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마르 16, 20)라고 하였을 뿐이다. 구약시대에든 신약시대에든 신자들은 모름지기 교회의 산 권위의 지도를 받도록 마련되었고, 결코 성서의 자유 해석으로 행동하지는 못하도록 되어 있다.
국민에 대한 국법은 그리스도 신자들에 대한 성경과 동일시할 수 있다. 국민이 국법 해석자의 판결에 복종하여야 하듯이 신자도 성직자의 성경 해석에 복종해야 한다. "성서가 유일한 지도자다"라는 유행어를 우리는 가끔 듣는다. 과연 그렇다면 큰돈을 써서 굉장한 예배당과 주일학교를 세울 필요는 대체 어디 있으며, 성경만이면 그만이라면 목사의 설교를 들을 필요나 어린이들에게 교회 교육이 왜 필요한가. 또 주일에 예배당에 갈 필요는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제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에게 성경이 결코 만능이 아닌 이유를 밝혀 보려 한다.
만약 한 목사가 성서 한 권을 주며 말하기를 "이 책을 받으시오. 당신 구원을 위하여는 이 책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책을 펴면 큰 의혹이 먼저 생길 것이다. 즉, 이 성서에 기록된 사실이 과연 계시의 말씀인지 아닌지르르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성서가 주님이 말씀 전부인지 아닌지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성서는 본래 이런 아름다운 단행본으로 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여러 세기 동안 여러 단편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며, 또 그동안 위경이 성서 행세를 하기도 했으므로 신자들은 그 진위를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즉 당시 유행하던 성 베드로 복음, 성 야고보 복음, 성 마티아 복음 등은 모두 가짜 성서였다. 드디어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도권을 발동하기에 이르렀다. 397년 카르타고 제3, 제4 공의회에서 똑똑히 정경과 위경을 판정하여 세상에 공포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R. Barclaius같은 이는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는 Canon, 즉 정경은 몇 권의 책으로 된 것으로서 그보다 더 많지도 않고 더 적지도 않다는 것은 성서 자체로는 증명되지 않으므로, 여기에 대하여는 성령의 사적 감도(私的感導)나 그렇지 않으면 로마 가톨릭을 신임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톨릭교회를 신임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트 종파 중에서는 성서 중 어느 부분이 순정한 주님의 말씀인지에 대하여 서로 논쟁한다. 유럽의 어떤 교파는 성 마르코와 성 루가는 사도가 아니므로 그 복음서는 진짜가 아니라 하며, 루터는 성 야고보의 편지를 '허수아비의 편지'라고 볼러 모욕하기도 하였다.
정경/위경 판정의 난공사는 이제 끝나 주님의 말씀만을 실은 성서가 세상에 나타났다 하자.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번역인지 그릇된 번역인지를 또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성서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 정통한 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성서 원어 정통자가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러므로 성서를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거든 유일한 성서 보존자인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는 길밖에는 없을 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올바로 번역된 성서를 가졌다 하자. 그렇다 해도 그 성서만이 영혼 구원의 지도자 구실을 하지는 못한다. 그 해석은 반드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신약 성서란 것은 보지도 못하였다. 교회 창립 후 오랫동안 성서는 없었다. 교회는 33년에 창립되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보다 8년 후, 루가 복음서는 20년 후, 요한 복음서는 1세기 말에야 겨우 나타났다. 이 복음서와 서간이 기록된 후에도 이 문서를 받은 특수 지방 이외의 지역에서는 이 문서의 존재조차 몰랐었다. 오늘날과 같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성서는 4세기에 가톨릭 교회에서 정경/위경을 판정하여 공포한 후의 것이다. 만일 성서가 구원을 위한 유일한 지도서라면 성서가 없던 시대의 신자들은 어떻게 구원되었겠는가.
1440년에 인쇄술이 비로소 발명되었다. 마르티네는 말하기를 "프로테스탄트의 교제에 의하면, 사도들에게 있어서 인쇄술은 성령의 은혜인 말 잘하는 재능보다 더 나은 것이었을 것이다. 루터가 쿠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발명된 지 백년 뒤에 태어나기가 다행이지, 만일 그보다 백년 전에 태어나 당시 5천만이나 되는 신자들에게 이 성서 독습으르 주장하였더라면 큰 조소를 받아 강당에서 정신병원으로 실려갔을 것이다"(Martinet, Religion in Society, Vol. II. c. 10)라고 하였다.
또한 성서에서 말하기를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2베드 1, 20)라고 하였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디케의 내시가 마차에 앉아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을 때, 함께 탔던 필립보가 그 예언의 뜻을 알겠느냐고 묻자 그는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사도 8, 31)라고 하였다. 이는 성경을 개인적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학문 조예가 깊은 4,5세기의 교부들 - 이를테면, 아우구스티노, 아타나시오,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등 -은 성경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면서도 모두 성서의 난해함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얕은 성서 지식을 가지고 방자하게도 창세기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말씀을 완전 통달한 양 득의 양양하는 일들이 많은데, 이는 실로 "천사들도 밟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어리석은 자들이 뛰어든다"라는 시구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소위 종교개혁가들이 성서의 임의 해석 행위로 그 어리석음을 여지없이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들이 교회 무류의 판단을 무시하고 성서 자유 해석으로 최고 지침을 삼은 그때부터 그들은 성서의 가장 중요한 점에 있어 서로 논쟁으르 일삼게 되었다. 그들 손의 '바이블(성서)'은 '베이블(바벨탑)'이 되었으니, 노아의 자손들이 무엄하게도 높은 탑을 쌓아 하늘에 이르려다가 언어의 혼란으로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듯이 종교 개혁가들도 교만하게도 성서자유해석으로 사람을 하늘 나라에 '인도'하려다가 마침내 혼란을 일으키고 종교 분열을 빚어 내고 말았다.
보라, 어떤 교파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일위밖에 없다고 성서를 인용하여 증명하는가 하면, 다른 교파에서는 똑같은 그 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은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고, 어떤 교파에서는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고 다만 한 인간이라고 역시 성서를 인용하여 증명하는가 하면 다른 교파에서는 똑같은 그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천주성을 증거하려한다. 또 어떤 이는 지옥의 영벌을 성구를 인용하여 가르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그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어떤 교회 목사들은 강단에서 대담하게도 몇 년 몇 월 며칠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세계가 멸망한다고 예언한다. 그날이 되어도 아무 이상이 없으면 뻔뻔하게도 하는 말이, 그 날짜가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성령의 빛을 받아 진리를 가르친다는 목사들의 성서 해석 태도가 이렇게도 천차 만별이며 심한 경우에는 논쟁의 대립이 정도를 지나쳐 같은 예배당 안에서 서로 격투까지 벌어지는 실례를 우리는 가끔 보고 듣는 바다! 대체 이래서야 양떼는 누구를 믿고 따라가야 옳단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신자도 역시 자기 의견과 비슷한 어느 하나를 골라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위험 천만한 짓이다. 장님이 문에 바로 들어가기를 어찌 꼭 기대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직접 세우시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성체성사의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 27)라는 말씀에 대해 종교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자유해석의 초점으로 논쟁화하면서 처음에는 80여 종의 해석을 덧붙이더니, 나중에는 100여 종의 자기들 멋대로의 해석이 나타나기에 이르렀으며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는 분파에 분파를 거듭하여 마침내 일인 일교파 상태에까지 이르고야 말 기세로 이런 교회 분열은 성서 자유해석주의를 주창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참으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요한 8, 32). 그러나 그 자유는 성서를 마음대로 해석하라는 자유가 아니다. 주님이 진리이신 까닭은 살아 계신 '말씀'인 그분이야말로 모든 '신적 계시의 원천이요 봉인'이시기 때문이다.
구원 문제는 인생의 최상 최후 최대의 문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영혼을 구하기를 원한다면 모름지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라고 하신 주님의 엄숙한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길과 진리를 그대로 가르치는, 주님이 직접 창립하신 가톨릭 교회의 인도를 겸손히 받아야 한다.
성경을 제 마음대로 해석함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치명상이다. 우리의 지력과 자유를 그리스도께 순종시키는 성서지만, 한번 그것이 자유해석의 포로가 되는 날엔 무제한의 자유와 자유, 의견과 의견이 다투어 일어나 드디어 아전 인수의 해석을 제멋대로 붙이게 된다. 이러고서는 성경의 권위가 설 수가 없다.
자유 해석은 성서의 규범성을 파괴해 버렸다.
성서는 인간의 신앙과 행동을 다스리는 한 규범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고정성이 없을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기는 학자들의 고심 노력으로 지구 사상한(四象限)의 찬만분의 일을 기초로 하여, 미터 원기에 새겨 놓은 일정한 길이를 규범으로 한 것이다. 만일 누구나 다 마음대로 늘이고 줄일 수 있도록 고무줄로 만든 미터기가 있다면 벌써 이것은 공공연한 도량기는 될 수 없고, 오직 교활한 장사꾼의 손에나 있을 수있는 부정한 기구일 것이다.
그러면 신앙과 도덕의 규범인 성서가 시중에서 통용되는 미터기만한 가치도 없고 중요성도 없어야만 되는가. 아무 고정성도 없이 누구나 다 자기 멋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여, 고무줄로 된 부정확한 기구같이 줄이고 늘이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대서야 될 말인가.
성령이 각개인을 비추시어 성서를 잘 알아듣게 하신다 함은 결국 성서 자유 해석을 구실로 한 수많은 오류와 이단 발생 책임을 성령께 돌리려는 독성적 망설이다. "진리의 하느님"(요한 14, 6)이시요, "거짓말하는 것을 역겨워하시는"(잠언 8, 13) 성령께 이보다 더 큰 모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성경자유해석주의의 폐해가 과연 이러한 것이다. 한 나라의 법률도 그 개인적인 해석을 금한다. 그 해석은 사법 당국에 위임되어 있다. 하물며 성경의 해석과 교회의 통리를 어찌 개인의 의견에 맡겨 버리겠는가.
2)가톨릭 교회의 성경해석
실상 성경에는 신조 전부가 들어 있지도 않고 또 거기에서 신자가 준수해야 할 세부 조목 전부를 찾아낼 수도 없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의무의 예를 보자. 이는 물론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의 하나지만 성경에서는 그에 대한 명백한 구절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성서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지 일요일은 아니다. 또 우리는 성령께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성령께 기도하라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서 기록 이외에도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신앙 생활상 주요 의무가 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주님의 가르침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것을 '성전(聖傳)'이라 부른다. 성전 존재에 관하여는 성서 여러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요한 21, 25)는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전한 말이나 써 보낸 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전통(교리)을 굳게 지키십시오"(2데살 2, 15).
"나에게 들은 건전한 말씀을 생활 원칙으로 삼으시오"(2디모 1, 13). 이러한 모든 말씀은 곧 성서에 기록되지 못한 가르침이 또 있을 것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뿐 아니라 바오로의 편지 중 아주 분실된 것도 있다. 고린토 전서 5장 9절에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토서에는 이른바 전에 쓴 편지는 없으므로, 그때 반드시 또 하나의 고린토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골로사이서 4장 16절에는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고 나서는 라오디게이아 교회도 꼭 읽게 해주시고, 또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거쳐서 가는 내 편지도 꼭 읽어 주시시오"라고 하였는데, 라오디게이아서라는 편지는 볼 수 없으므로 그것이 분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서에 기록되지 못한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음이 명백하다. 이를 우리는 '성전'이라 부른다.
성전으로 우리는 성서에 기록되지 못한 진리를 전해 받으며, 성서에 희미하게 기록된 사실을 해석하며, 성서에 산재한 모호한 문구의 참뜻을 알아낸다. 현재 모든 교파가 사용하는 성서는 결국 가톨릭 교회의 손에서 가져간 것이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정경/위경이 뒤섞인 가운데서(초세기에 사방에 흩어진 위경의 종류는 30가지가 넘었다) 참성서를 식별해 낸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그만큼 인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적 전설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전을 철저히 구별하여 가르치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 또한 승인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교리의 진위를 규명하려 할 때, 거기에 대하여 성서에 명백한 구절이 없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성경만이 완전한 구원의 지도자 구실을 할 수 없고, 또 성서만이 완전한 신앙 준칙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 성서는 각 시대의 구도(求道者) 전부가 쉽게 얻을 수 없다.
- 성서는 그 기사 내용이 명료하지 못하여 해득하기 어려운 곳이 많으며 따라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 성서는 계시 진리 전부를 싣지 못하였다.
이제 가톨릭 교회에서 표준으로 삼는 전통적 해석에 대하여 논하겠다. 어느 서적이든지 그 의미 해석에 대한 쟁론은 서적 자체가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 점에 대하여 플라톤은 "그 서적에게 백 번 물어보라. 백 번 같은 대답을 하리라. 무식한 자에게나 궤변자에게나 다 같이 찢길 터이니... 그 저자가 나와서 명백히 그 뜻을 해석하기 전에는 그 서적은 모욕만 받을 것이다"(Plato Phoed., 60)라고 하였다.
성서는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이 성서도 생명 없는 문자로 표시되어 있는 만큼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서가 세상에 나온 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오직 침묵을 지키는 그 문구에만 얽매여 각자 자기 주장만을 일삼는 것은 다만 분열과 쟁론의 빌미인 주관적 해석의 난립 상태를 빚어낼 뿐이다.
그 방도는 하나밖에 없다. 즉 성서에 기재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전'과, 또는 성서가 저술되던 시대 또는 그와 가까운 후대에 살고 있던 초대 신자, 특히 교부들은 대체로 이를 어떻게 이해했었는가를 연구하는 그것이다. 우리는 물론 어느 교부 한 사람의 의견만을 절대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성서와 교리에 대한 초대 교부들의 공통적 해석을 매우 존중한다. 기적조차 행하여 가면서 진리를 전하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그 진리를 공공연한 진리로 후계자들에게 이해시키지 못하였을 리 없고, 또 진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희생한 당시 신자들과 교부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서 그것을 함부로 남에게 가르쳤을 리도 만무하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뛰어난 박학자요 또 순교까지 한 가장 경건한 교부들이 신앙하고 인정하는 '성전'이야말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남긴 가르침임이 분명하다. 가톨릭 교회는 성전과 초대 교부들의 공공적 신앙에 준거하영 성경을 해석한다. 한 성경 해석이 있다 하자. 신앙상 도덕상 문제될 만한 사항이 아니면 그를 불문에 붙여 버릴 수 있겠지만, 만일 그것이 신앙상 도덕상 어떤 논쟁의 초점이 될 때에는 교회는 단호히 흑백을 가려낸다.
개신교와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단상
저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로 책을 통해서 카톨릭의 잘못들을 배워왔습니다. 가끔 목사님께서 카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하시는데 이런 경우는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여간 목사님께서 직접 카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하시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라 보시면 됩니다.
저는 한창 종교적 열심이 있던때 종교관련 서적들을 이것저것 참으로 많이 읽었습니다. 그중에 카톨릭의 문제점을 다룬것들도 포함되고요! 책 제목이 기억이 않나는데 아마도 사제였다가 카톨릭에서 돌아선분들의 수기를 모아둔 책이었던것 같은데 그책에서 카톨릭의 문제점을 요모저모 근거를 들어서 비판하더군요! 그 책을 읽은지 너무 오래되어 정확한 기억은 나질 않네요..
개신교적 입장에서 카톨릭을 비판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성상을 세워 그곳에 기도하는 우상숭배 문화와 성인들께 대한 기도, 성모 마리아 숭배, 미사라는 제사를 드리는것, 미사때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의 몸과 피로 전환되었다고 믿는것, 철저히 위계화된 계급체계로 교황의 절대성과 무오류성등등입니다. 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게 전부네요..
저도 한때 카톨릭이 심각한 이단세력으로서 절대 배격해야할 존재라고 생각했던때가 있었습니다. 카톨릭에대한 음모론적 시각에 많이 빠진 후유증이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시각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카톨릭에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 신자가 진짜로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한다면 그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린다고 믿기 때문입니다.다만, 카톨릭의 이런 저런 관습들이 방해를 하여 구원의 길을 찾기가 개신교보다 조금 더 힘들지 않겠나하는 생각은 있습니다.
개신교인으로서 구원은 진실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고 보는 저로서는 종교의 근본뼈대가 되는 핵심교리에서 어긋나지않는이상,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는 자들은 모두 구원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곁가지들은 구원에 큰 걸림돌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루터를 위시한 수많은 종교개혁가들이 들불처럼 일어난것은 그냥 우연이라고 보지 않습니다.카톨릭이 예수님이후로 천년이상 구원의 종교로 기능해왔지만 세상권력과 야합하여 타락함으로 영혼구원의 제 기능이 상실됨에따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물줄기를 루터를 통하여 기독교 역사에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황을 위시로한 거대한 위계체계는 예전에는 올바로 기능하여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하였지만 암흑시대로 들어서면서 타락함으로 기능을 상실한 것이죠..저는 진정한 영적 교회는 카톨릭보다 개신교보다 더 크다고 봅니다. 우리 눈으로 볼수없고 만질수없는 수많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변하지 않고 당당히 서있는 참교회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모든 이들을 포함하는 우주적 개념이라고 봅니다.
지금 개신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많은 지탄을 받고있습니다. 천주교에 없던 개신교만이 가지고 있던 자유와 관용이 오히려 방종과 타락으로 치우져 가고 있는것이죠..그래서 여러 개신교인들이 이런 자유를 버리고 안전해보이는 교황을 위시로한 철저한 위계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타고가던 보트를 버리고 엄청 튼튼해 보이고 안전해 보이는 타이타닉호를 타는 것이라고 할까요?
모든것이 다원화되고 파편화된 세상에서 교황의 무오류성을 기반으로한 엄격한 위계체계,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교리들, 세상과는 동떨어져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고있는듯한 관습들 등등 지금 현대세계에서는 지난날 카톨릭의 약점들이 오히려 장점들로 하나 둘 부각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시국사건에 앞장서서 정의를 외치는 사제분들을 정말 존경합니다. 강정마을에서, 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집회에서 여러모로 수고하시고 애쓰시는 모습을 볼때 정말 감동합니다. 이분들이 카톨릭에 끼치는 엄청난 좋은 이미지들은 그간 장로대통령들이 나라에 끼치는 해악들과 비교하여 정말 비교되더군요!
하지만 카톨릭의 어두운 그늘은 모르는 사람은 몰라 그렇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심각하게 남아 있습니다. 꽃동네 사건들도 그렇고 이런 저런 이권과 돈이 얽힌 곳에서 고위직에 있는 주교들이나 사제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특히 사학비리가 요즘 국제중학교등을 통하여 심각한 문제가 되고있는데 카톨릭이 운영하는 여러 사학재단들이 엄청난 비리와 각종 추잡한 이권들로 얽히고 섥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독재정권들과 야합한 주교들,사제들의 죄악들은 개신교의 오찬기도회만큼이나 더러운 냄새를 피우고 있었더군요! 이런 점에서는 개신교나 천주교나 그나물에 그밥입니다. 천주교 고위사제들로 올라갈수록 정권과 야합하는 경향이 엄청 뚜렷해집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우리가 천국에서 살고있지않는이상 각자가 품고있는 종교가 인간의 근본적 가치들을 담고있는 이상, 서로 존중하면서 공존해야 한다고 봅니다. 천주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개신교든간에 배격하지 말고 존중하면서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믿고있는 가치와 교리들을 실천하면서 살아갈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주 개인적인 의견을 담아 말씀드린다면, 천주교는 천국으로 향하는 타이타닉호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미국으로 향했던 타이타닉호가 빙하를 만나 난파되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미국땅에 도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믿고있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구원될 것입니다. 이게 개신교인의로서의 저의 천주교에 대한 단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