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6월 13일 목요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화해하여라 (마태5,20ㄴ-26)
제1독서<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렸다>(1열왕18,41-46)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42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
43 엘리야는 자기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아라.” 하고 일렀다. 시종이 올라가 살펴보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는 일곱 번을 그렇게 다녀오라고 일렀다.
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시종은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가 시종에게 일렀다. “아합에게 올라가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병거를 갖추어 내려가십시오.’ 하고 전하여라.”
45 그러는 동안 잠깐 사이에 하늘이 구름과 바람으로 캄캄해지더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병거를 타고 이즈르엘로 갔다.
46 한편 엘리야는 주님의 손이 자기에게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이즈르엘 어귀까지 뛰어갔다.
<화답송>시편65,10ㄱㄴㄷㄹ.10ㅁ-11.12-13(◎ 2ㄱㄴ) ◎ 하느님, 시온에서 당신을 찬양함이 마땅하옵니다.
○ 당신은 이 땅에 찾아오시어, 넘치는 물로 풍요롭게 하시나이다. 하느님의 강은 물로 가득하고, 당신은 곡식을 영글게 하시나이다. ◎
○ 정녕 당신이 장만해 주시나이다. 고랑에 물 대시고 이랑을 고르시며, 비를 내려 부드럽게 하시어, 새싹들에게 복을 내리시나이다. ◎
○ 한 해를 은혜로 풍요롭게 하시니, 당신이 가시는 길마다 기름진 땅이 되나이다. 사막의 풀밭에도 윤기가 흐르고, 언덕들도 기쁨의 띠를 두르나이다. ◎
복음<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0ㄴ-2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또는,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독서(이사 61,1-3ㄹ)와 복음(루카 10,1-9)을 봉독할 수 있다.>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제1독서(1열왕18,41~46)
그 무렵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41~42)
열왕기 상권 18장의 마지막 부분인 41절에서 46절까지는, 그 동안 방관자로만 있었던 아합 왕과 엘리야가 대화를 나누며,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북부 이스라엘의 가뭄 심판이 종결된 사실이 다루어진다. 본문의 '올라가셔서'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아합은 바알의 예언자들을 처형하는 키손 천에 까지 엘리야와 함께 내려왔었다. 그리고 이제 바알 예언자들에 대한 처형이 끝나자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카르멜산 어디 쯤인가 있는 왕의 장막으로 다시 이동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장막으로 돌아가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이 대결을 벌이는 동안 아무도 점심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 먹고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의 이 말은 단순히 먹고 마시며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있음이 분명하다.
'먹고 마시는'행위는 기쁨에 의해 초래된 '기아와 갈증'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본문에서는 북부 이스라엘에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가뭄의 재앙이 완전히 종결될 것임을 암시한다. 즉 이제는 모든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으니 안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엘리야가 아합을 만났을 때엘리야와 아합 사이의 긴장감은 아합의 바알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열왕16,31~33; 17,1). 그런데 이제 바알의 거짓됨이 만천하게 드러났고, 백성들도 하느님을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으며, 바알 예언자들도 몰살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긴장의 원인이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엘리야는 바알 숭배로 인해 생긴 가뭄 재앙이 곧 끝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아합의 괴로움도 곧 끝날 것이기 때문에, 아합에게 안심하고 음식을 즐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문은 엘리야가 아합이 지적한 대로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자' (17절)가 아니라 왕과 백성들을 위하는 자임을 드러낸다.
이것은 풍요와 농경의 신으로 알려졌던 바알이 비를 주관함으로써 양식을 공급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직 엘리야를 예언자로 세우신 주 하느님만이 그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아합이 이제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원문을 보면, 본문의 핵심 단어가 '비'가 아니라 '소리'이다. 엘리야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 구름 한 점 없는(43절) 맑은 날씨 속에서도 그가 '비가 쏟아지는 소리' 를 들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약속(1절; "가서 아합을 만나라. 내가 땅 위에 비를 내리겠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엘리야가 구름 한 점 없는 상황에서 아합에게 앞으로 쏟아질 비로 말미암아 미리 즐거워 하도록 명령하는 모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에 폭우 때문에 길이 막혀 통행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아합에게 어서 피하라고 지시한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44절).
이러한 사건 전개는 하느님을 섬기는 엘리야가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능력있는 존재인 반면에, 바알을 숭배했던 아합은 왕이었지만 엘리야의 지시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무능한 존재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42)
아합은 엘리야의 지시에 따라 먹고 마시기 위해 자신의 거처로 '올라간' 반면에, 엘리야는 기도하기 위해 카르멜 산 정상으로 '올라가' 땅에 꿇어 엎드렸다.
저자는 '올라가다' 란 의미를 지니는 '알라'(alah) 란 동일한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했지만 그 목적지를 다르게 밝힘으로써, 아합의 삶의 방향 내지는 신앙이 엘리야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몸을 수그리고'에 해당하는 '와이그하르'(waighar)의 원형 '가하르'(gahar)는 기도하기 위해 드리는 자세를 표현하는 동사로서 성경 전체에서 오직 열왕기에만 등장하며, 그것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건에서만 등장한다(2열왕4,34.35).
엘리야는 기도하기 위해 이와같은 자세를 취했고, 엘리사는 수넴 여자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는 점만 다를 뿐, 이 동사는 양자 모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언자적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기도에 몰두 했음을 나타낸다.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리는 것(be cast himself down)에서 그치지 않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엘리야의 이러한 기도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열망하며 취하는 겸손한 기도 자세의 극치이며, 기도에 완전히 몰두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 율법에 대한 충실을 뜻하며,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뜻에 대한 충실을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의로움’은 매우 중요한 낱말로, 예수님께서는 특히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시고, 하늘나라에 들어가 데 필요한 조건으로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5장 21절에서 48절까지 이어지는 구절은 ‘여섯 가지 대당 명제’라고 하는 구절의 첫 번째 단락으로서 “너희는 ……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면서,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을 심화하시며 형제에게 성내고 욕하는 것까지도 엄격하게 경고하십니다.
또한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껄끄러운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마치 훤히 다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주님의 이 같은 요구에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의로움은 결국 ‘사랑’이라는 한 낱말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사랑이신 예수님과 일치할 때,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들과 화해하며 형제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하늘에 묶이면 자유롭습니다.
(마태 5,20ㄴ-26)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 십계명의 제 오계명입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을 철저히 지킨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 계명을 지킨 의로움이 아닌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차원의 의로움을 찾아라. 말씀하십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 자기 형제 누구?
(요한20,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신 우리의 형제께 그분의 십자가의 길이 바보가 하는 멍청이 짓이라 화를 내며 말하면 당연히 지옥 갑니다. 예수님을 모욕 해서 가 아닙니다.(마태12,31~참조)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지 못하니 구원의 의로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주는 의로움, 그것이 계명 지킴의 자기 의로움을 능가하는 하늘의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의로움을 참이라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또 다른 살인입니다.
(로마3.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 형제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받아 죄 의식이 떠오르면~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우리 모든 죄의 죗값을 예수님(형제)의 죽음으로 다 갚으셨기에 더 이상 죄의식을 위한 예물은 없는 것입니다.(히브10,8)
그 깨달음, 그 화해로~ 죗값을 위한 제사 예물이 아닌 죗값을 위한 제사 예물이 아닌 축제의 감사제(미사-에우까리스티아) 그 ‘기쁨의 예물로 바쳐라’ 하심입니다.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 형제 예수님께서 고소하십니다. 우리의 창조 목적은 구원의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것입니다.(이사43,7)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사랑하는 당신 외 아드님을 속죄 제물로 내주시어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로 다 용서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과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구원입니다.
그런데 자기 의로움으로 십자가와 상관없다고 그 예수님의 죽음과 상관없다. 말한다면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고집 부리지 말고 타협하라 하십니다. 사람의 계명에 의한 의로움이 아닌 하느님의 계명, 곧 하늘의 의로움인 십자가의 의로움으로 깨달아라~ 그래서 재판에서 감옥에서 나와라 하심입니다.
(마태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마지막 한닢, "에스카톨로지, 코드란테스“ 사각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한변‘ 이라는 뜻, 4분의 1 그 ’4의 마지막1‘ 입니다. 숫자3은 하늘- 숫자4는 땅이라 했습니다.(삼각과 사각의 그림으로~)
하늘- 3이 땅으로 내려와 땅의 4각의 완성을 이루는데~ 3의 찢어짐(죽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삼각의 꼭지점이 찢어져~ 벌어지면 마지막 한변이 남게 되지요? 그 비어있는 한변이 채워져 4각의 완성, 곧 땅의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삼각의 찢어짐이 대속(하늘)의 죽음, 그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되면 그래서 그 사랑을 자신(땅)의 완성을 위한 진리로 받아들이면 그 사랑이 마지막 한변으로 채워져 땅(4각)의 완성 곧 구원이 이루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죽음, 그 사랑이 마지막 한닢(한변)입니다. 그 사랑 하나를 깨달아 그 사랑으로 모든 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십계명의 각 계명마다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5,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인간의 사랑이 아닌 하늘의 대속 죽음, 그 사랑 그 마지막 한닢, 그 사랑을 주는 것,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없습니다.(이사64,5 로마10,3참조) 그래서 나 자신의 의로움(말)에 묶입니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아멘
-얼굴의 가면을, 마음의 너울을 벗자-
참으로 행복하고 싶습니까? 자유롭고 싶습니까? 누구나 소망하는 바일 것입니다. 얼굴의 가면을, 마음의 너울을 벗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이래야 비로소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이 명하시는바 근본적 마음의 순수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수도생활의 직접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율법에 대한 충실성이, 사랑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사랑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자유로움입니다.
회개를 통한 마음의 뿌리로부터의 근본적 치유와 정화입니다. 살인의 뿌리와도 같은 형제에 대한 분노, 형제에 대한 바보라거나 멍청이라는 멸시어린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난다면 즉시 화해할 것이며, 법정으로 향하다가도 즉시 타협할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야 말로 참으로 사랑으로 자유로워진 순수한 마음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순수한 마음에서 지혜도 용기도 나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여기서 마음의 순수는 도덕적 완벽성이 아니라 인격의 올바름을, 단순함을 뜻합니다. 사랑이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죄가 없어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이 많아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책감에 아파하는 것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함이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얼굴은 마음입니다. 얼굴도 행동도 마음의 반영입니다. 사랑으로 마음이 깨끗하고 향기로워야 말도 글도 얼굴도 행동도 깨끗하고 향기롭습니다. 사랑에 의한 마음의 치유와 정화가, 뿌리로부터의 치유와 정화가 근본적 처방입니다. 얼굴의 가면도 마음의 너울도 저절로 벗겨 집니다.
아주 예전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인도를 여행하던 어느 구도자가 기차여행중 구루같이 보이는 분이 가까이 와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당신의 얼굴이 꼭 가면같이 보인다!”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구도자는 큰 충격과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다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천편일률적 가면 같기도 하고 인형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생화의 얼굴이기 보다는 조화같은 느낌의 얼굴도 많습니다. 얼굴의 가면이, 마음의 너울이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많은 영육의 병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근본적 해결은 마음의 순수로 자유로워지는 길뿐입니다. 사랑-순수-자유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이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답은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줍니다. 사랑으로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마음의 순수와 더불어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될 때 저절로 마음의 순수와 더불어 마음의 너울은 벗겨지고 얼굴의 가면 역시 저절로 벗겨 집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3,17-18).
성령이 답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선사되는 주님의 영이 우리를 순수하게 합니다. 더욱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닮아가게 합니다. 마음의 너울을, 얼굴의 가면을 벗고 제얼굴, 제마음으로 살게되니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얼굴의 가면을 벗고 제얼굴로 살아갑시다. 마음의 너울을 벗고 순수한 제마음으로 살아갑시다. 모두가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모두가 깨끗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영이, 성령이 우리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마음의 너울을, 얼굴의 가면을 벗고 제얼굴, 제마음으로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멘.
기 프란치스코신부님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5,20ㄴ-26)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2)
한글 새 성경에는 단순히 '형제'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는 인칭대명사와 정관사가 붙어 '토 아델포 아우토'(to adelpho autou; to his brother)에 해당하는 '(바로)그의 형제에게'가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형제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이나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다(루카10,29~37).
그러니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랑으로 감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pas; whosoever)라는 단어는 '전체'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그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의노)는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도 악한 자들에게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진다(마태3,17; 마르3,5; 사도10,16).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의 '성을 내는 자'에 해당하는 '오르기조메노스'(orgizomenos; who is angry with-without a course)가 일시적인 흥분을 나타내는 '튀모스'(thymos)와 달리, 주로 악한 뜻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킨다.
더욱이 표준 원문에 삽입된 '까닭없이'에 해당하는 '에이케'(eike)는 정당한 사유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리켜준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악한 뜻(악의)을 가지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을 살인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많은 경우의 살인이 바로 성을 내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실제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동인(動因)인 그 마음에까지 살인하는 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바보'에 해당하는 '라카'(Raca)는 히브리어 '레크'(req)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레크'(req)는 또한 '황폐하다', '비다'는 뜻을 지닌 '루크'(ruq)에서 유래하여 '빈말', '허사', '헛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머리가 텅 빈) 모자란 자'나 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잡류', '건달'(판관11,3), '무뢰한'(2역대13,7)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이다.
그리고 '멍청이'로 번역된 '모레'(More; You fool)는 '모로스'(moros)의 호격이다. '모로스'(moros)는 '입을 다물다'는 뜻이 있는 '뮈오'(myo)에서 유래하여 '말하지 않는 자', '우매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집회서 22장 11절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단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단죄이며, 멸망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라카'(Raca)보다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욕설을 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심판권을 남용한 죄를 범한 것이며, 영혼의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새로운 기준이요 동인인 내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러한 자가 받게 될 형벌이 재판 받음, 최고 의회에 넘겨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짐으로 묘사하신다. 이것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삼중 점층법적 묘사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난'(geennan; hell)의 원형 '게엔나'(geenna)는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이'(gai)와 예루살렘의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힌놈'(hinnom)이 결합되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까이힌놈'(gaihinnom)의 음역(소리나는 데로의 번역)이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는 예루살렘 남쪽과 남서쪽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데, 역사적으로 이곳에서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하여졌으므로(2열왕23,10) '살육의 골짜기'로도 불리워졌다(예레19,6).
이처럼 이곳은 사람을 불태워 우상에게 제사지냈던 끔찍한 범죄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쓰레기들이 태워져서 늘 연기가 나며 불이 타오르는 더럽고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범죄한 자가 죽은 후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힌놈 골짜기'에 비유하였다. '힌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게엔나'(geenna)가 '지옥'으로 번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4년 06월 13일 목요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어제 복음에서 율법이 완성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율법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구체적인 본보기로 가르치십니다(5,21-48 참조).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간음하지 마라.’는 율법을 ‘음욕을 품고 바라보지 마라.’고 이르신 것처럼,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에 자리 잡은 죄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뽑아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것처럼 율법에서 제시하는 범위를 더 넓게 확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이라는 행위를 금지하는 율법을 넘어서, 살인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인 화를 금지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를 더 깊은 수준의 내면생활로 초대하시며 율법의 진정한 목적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고해성사 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성찰합니다. 이때 우리가 저지른 죄의 행위만 생각하고는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죄를 어떻게 저질렀고, 그 죄를 몇 번 지었는지 세어 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를 더 깊고 성숙한 성찰로 초대합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뿌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던 이 죄의 뿌리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움직이고, 그 생각이 어떻게 습성과 태도를 형성하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죄가 몇 번의 실수만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습성이며, 내 삶과 온 존재의 총체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잡초를 없애려면 땅 위로 보이는 줄기만이 아니라 뿌리까지 베고 캐내야 합니다.
죄의 뿌리를 봄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회개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독서(1열왕18,40-41) 40 그때에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사로잡으시오.” 백성이 그들을 사로잡아 오자, 엘리야는 그들을 키손천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죽였다.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 새겨듣자. 하느님을 내 뜻, 내 소원을 들어주는 바알로 섬기는 절뚝거리는 양다리 신앙,(앞21절) 그 두 마음을 죽이면(버리면, 부인하면) 하늘의 물(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진리의 말씀)으로 내리는, 곧 들리기 시작하여 내 영(靈)을 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아모8,11)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보충 이사55,10-11 참조)
복음(마태5,20-26)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 십계명(탈출20,13)의 살인(殺人)은 히브리어 ‘라짜흐’로 ‘죽이다. 도륙하다.’ 본문은 헬라어‘포뉴오’로 제사(祭祀) 용어다. 사람이나 짐승을 습관적, 반복적으로 ‘살해(殺害) 하지 말라’는 뜻이다. 곧 ‘희생 제사를 지내지 마라’는 것이다. 그것이 ‘살인해서는 안 된다.’ 의 진의(眞意)다.
죄인(罪人)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十字架)에서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제사를 완성하시고 죽으신, 그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내 뜻, 내 의로움을 위한 제사, 예물로 반복적으로 드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히브7,27) 27 그분(예수)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 율법, 그 옛 계약에서 제사를 지키게 하심은 새 계약인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을 알라’고 주신 것이다. (히브10,1-18참조)
예수님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 사랑은 모르고, 자신의 소원(所願)과 죄(罪)와 의(義)를 위해 계속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하신 일, 곧 그분의 의로우신 죽음과 그분의 십자가(十字架)를 부정하는 것이고, 모독(冒瀆)하는 것이며, 그것이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살인이다.
(히브2,11-12)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 추악한 죄악(罪惡)의 우리를 형제로 생각하시어 대신 저주(詛呪)의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면서 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참 사랑이시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 형제, 앞에서 확인했듯, 죄인인 나를 형제로,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쳐주신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죄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
(요한20,17)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 죄인(罪人)인 나를 위해 저주의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그 형제, 예수님께 ‘바보짓, 멍청이 짓’ 했다고 화(禍)를 낸다면, 그는 자신의 죄가 그대로 남아 지옥행이 된다. 세상은 절대 믿지 못하는, 갖지 못하는 ‘형제’시다.
(1코린2,14) 14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코린1,23)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 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자신이 드리는 예물(禮物)이 형제이신 예수님의 뜻(이름)과 다름이 생각나거든, 돌아가 예수님의 뜻과 화해하고, 곧 깨닫고 돌아와 올바른 예물을,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이다.
* 제자들이 많은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이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하신다.(요한16,24)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뜻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이름, 뜨, 소원을 위해 청(請)했기 때문이다. (야고4,3 보충)
그러면 올바른 예물이란? 내 뜻, 내 이름, 의(義)를 위해 살았던 ‘나’를 버리고(부인하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 죄의 속죄제물, 예물로 죽으신 예수님과, 그분을 내주신 하느님(야훼)께 감사, 찬미, 영광을 드리는 것, 그것이 ‘올바른 예물’이다.(요한 4,20-24 참조)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신앙의 최종 목적’임을 여러 번 확인했다.(이사43,7) 그 외에 다른 예물 드림은 없다.(히브10,18) 그래서 미사는 내 뜻, 소원을 위한 제사가 아니고, 하느님께 감사, 찬미, 영광을 드리는 기쁨의 잔치가 되어야 한다.
25ㄱ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 24절의 ‘화해하라’는 말씀과 같다.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간직해야 화해(和解)도 타협(妥協)도 할 수 있다.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신다.(2코린5,217-21 참조)
25ㄴ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 그러면 고소(告訴)는 누가 하나? 하느님이 고소하신다. (예레2,9 호세4,1 미카6,1)
하느님의 숨, 말씀으로 창조 되어 그분의 숨으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 영광이 아닌 자신들의 뜻, 영광을 위한 신앙을 살기 때문이다.(요한5,43-44)
하느님의 칭찬보다, 하느님 앞에 혐오스러운 사람들의 칭찬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루가16,15) 성서(구약)의 말씀이 고소하신다.(요한5,45-46) 인간들이 거스른 말씀이 감옥에 갇히게 하신 것이니,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도 풀려 나올 수가 없다.(예레2,22 13,23 참조) 하느님의 것이어야 한다.
26 (그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마지막 한 닢 까지 다 갚으면 나올 수 있다. 하느님의 것으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로 죽으시고 흘리신 피, 그 하늘의 대속, 그 의(義), 사랑으로 나올 수 있다. 다시~ 그리스도의 피, 그 ‘새 계약의 말씀으로’다.
(히브10,22)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말씀)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아멘)
마지막 한 닢, ‘에스카털로지 코란테스’를 직영하면 ‘ 마지막 한 변’이라 했다.
‘마지막 한 변’- 삼각형의 맨위 꼭지 점이 깨지고 찢어져 두 변이 양쪽으로 벌어지고 나면, 채워야 할(그어야 할) 한 변이 남는데 그것이 마지막 한 변이다. 곧 그 마지막 한 변을 그어야(채워야) 사각(땅)이 완성 되는데 그 마지막 한 변을 긋는 것, 채우는 것이 사각(땅)의 완성을 위한 삼각(하늘)의 찢어짐, 그 희생,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늘(삼위일체)은 삼각, 땅(동서남부)은 사각.
그러니까 하늘(3)이 찢어지는 그 죽음, 사랑으로 땅(4)의 완성, 곧 땅(흙)의 존재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듯,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 그 사랑으로만 죄인들이 모든 감옥(묶임)에서 풀려 자유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구원(救援) 받았다. (그것이 하늘의 정의(正義)다. 율법의 자기 의(義)에 만족하는 것이 불의(不義)다.(로마3,20)
어둠에 갇혀 영원을 살아가야 할 우리가 영원한 빛 속에서 영원을 살게 된 것이다. “마지막 한 변” 그리스도의 피(깨짐, 찢어짐), 그 사랑으로..........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감옥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는 저희가 율법, 그 옛 계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계약의 말씀, 사랑으로 빛의 나라, 하늘을 현실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모두의 마음에 성령이 불을 놓으시어 오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