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7월 08일 토요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 (마태9,14-17)
제1독서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창세27,1-5.15-29)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5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사우가 사냥하러 들로 나가자,
15 레베카는 자기가 집에 가지고 있던 큰아들 에사우의 옷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꺼내어,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 새끼 염소의 가죽을 그의 손과 매끈한 목둘레에 입힌 다음,
17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 주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가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묻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르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20 그래서 이사악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어떻게 이처럼 빨리 찾을 수가 있었더냐?” 하고 묻자, 그가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이사악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인지 아닌지 내가 만져 보아야겠다.”
22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에게 가까이 가자, 이사악이 그를 만져 보고 말하였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23 그는 야곱의 손에 그의 형 에사우의 손처럼 털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축복해 주기로 하였다.
24 이사악이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냐?” 하고 다져 묻자, 그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러자 이사악이 말하였다. “그것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너에게 축복해 주겠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그것을 가져다 드리니 그가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리니 그가 마셨다.
26 그런 다음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입 맞춰 다오.”
27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28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화답송 시편135(134),1ㄴㄷ-2.3-4.5-6(◎3ㄱ) ◎주님을 찬양 하여라, 좋으신 주님.
○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주님의 집에 서 있는 이들아. 우리 하느님의 집 뜰에 서 있는 이들아. ◎
○ 주님을 찬양하여라, 좋으신 주님. 찬미 노래 불러라, 정겨운 그 이름. 주님은 야곱을 뽑으시어, 이스라엘을 당신 소유로 삼으셨네. ◎
○ 정녕 나는 아노라, 위대하신 주님.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우리 주님.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바다에서나 심연에서나, 주님은 바라시는 것 모두 이루시네. ◎
복음<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창세27,1~5.15~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29)
'너를 섬기고'로 번역한 '야아브두카'(yaabduka)의 원형 '아바드'(abad)는 '일하다'(탈출20,9), '봉사하다', '섬기다'(1사무4,7)의 의미이다.
또한 '무릎을 꿇으리라'로 번역한 '웨이쉬타하우'(weishithahau)의 원형 '샤하'(shaha)는 '숙이다', '굽히다', '엎드리다'(이사51,23)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강조 재귀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경우 '샤하'는 '하느님께 기도로 영광돌리다',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며 절하다' (1열왕1,47)는 뜻도 있지만, '사람을 향해 존경과 경의를 표시하다'(시편45,12)는 뜻도 가진다.
따라서 이 구절은 장차 뭇 민족들이 야곱 후손들을 위해 노동과 수고로 봉사하며 또한 야곱 후손들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크게 존경과 영광을 받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이 예언대로 야곱의 후손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다윗과 솔로몬 때는 이웃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크게 융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혈육적인 야곱 후손인 이스라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영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즉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된 것처럼 (탈출19,5.6), 야곱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키시고, 우리를 임금의 사제단과 거룩한 민족,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삼으셨다(1베드2,9).
이런 차원에서 이 구절은 과거에 베풀어지고 끝난 축복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영적으로 야곱의 후손이 된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향한 축복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시편 104장 15절의 '행복하여라, 이렇게 되는 백성!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는 말씀대로, 주님을 하느님으로 알고 하느님만을 참된 신(神)으로 섬기는 백성은 이렇게 영육간에 크고 풍성한 축복을 약속받는 자들이 된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로 번역한 '오르레카'(orreka)에서 '저주하다'에 해당하는 '아라르'(arar)는 마음으로 증오하고 입으로 저주하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저주를 이루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훼방하는 모든 행위를 다 포함한다.
더군다나 여기서 '오르레카'(orreka)는 능동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현재 행위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야곱의 후손을 망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집요하게 저주하고, 끊임없이 행동을 훼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사악은 이렇게 계약의 자손들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대신하여 저주를 내리고 심판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의 발이 비틀거릴 때 복수와 보복은 내가 할 일, 멸망의 날이 가까웠고 그들의 재난이 재빨리 다가온다.'(신명32,35)
이러한 약속은 신약 시대의 계약의 계승자인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계속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저주를 받고'로 번역한 '아루르'(arur)는 수동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직역하면 '저주를 받았고'이다.
하느님의 백성을 저주하며 훼방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전능하신 능력과 절대적 권세로써 심판하시므로, 이런 자는 이미 하느님의 저주 아래 있으며, 저주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이미 저주 아래 놓인 자를 직접 대적해서 실수를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참 단식은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먹는 것이다.
(마태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 그때에~ 앞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로 이어지지요.
예수님은 인간의 열심, 희생제사가 아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하십니다.
제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 아드님을 통해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그 제사의 의로움, 자비로 우리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열심, 희생. 그 자기 의로움으로 예수님을 따르려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몸값으로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간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마르10,45참조)
예수님은 아기로 오셔서 짐승의 먹이 통에 누우셨습니다. 곧 죄인들의 생명의 양식으로 오셨다는 것이지요(루가12,12)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당신(말씀)을 먹일 *죄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단식의 문제는 그 말씀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보다 인간들의 의로움을 더 중요시했던 그들의 단식, 그 자기 의로움의 율법을 단식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이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있을 때에는 단식이 필요 없지요. 그것이 율법의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의 손님이 아닌 신부로 있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목적지인 것입니다.(에제31,32참조)
그래서 신랑을 빼앗기면(죽으면), 곧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율법의 모든 죗값(로마3,20)을 치루시는 그 십자가의 제사를 완성하시면~ 제사와 윤리 그 율법을 끊고, 단식하고 신랑(예수)의 신부로 십자가의 복음, 그 구원의 진리 그 말씀을 먹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진리의 말씀을 먹고 많은 이들을 율법과 제사에서 자유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단식이라는 것이지요.
(이사58,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새옷(신약. 새 계약)과 헌옷(구약. 옛 계약)을 섞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섞지 말라는 것은 헌 것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헌 것을 통해서 새것을 알아야 하다는 것입니다. 헌 것을 통해서 새것으로 건너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갈라3,24-25)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 옛 계약, 율법을 통해 새 계약,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옛 것, 율법을 통해 죄를 알아 새것,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꼭 필요한 겁니다.
(로마7,12-13) 12 그러나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율법의 실체를 모르고 그 법의 행위에 머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음식을 굶는 것이 단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13 그렇다면 그 선한 것이 나에게는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그 선한 것을 통하여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게, 죄가 계명을 통하여 철저히 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죄가 드러나야 용서로 죄가 씻겨 하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에페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피로 맺는 새 계약, 그 새 계약의 새 포도주를 담으면(먹으면) 새 부대가 되는 겁니다.
(2코린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아멘.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9,14-17)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16~17)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빼앗길'에 해당하는 '아파르테'(aparthe; will be taken)는 '~로 부터' (from)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치사 '아포'(apo)와 '들어올리다', '가져가다'는 뜻이 있는'아이로'(airo)의 합성어인 '아파이로'(apairo)의 가정법 부정(不定) 과거이다.
여기서 부정(不定)과거(Aorist)가 쓰인 것은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을 읽는 초대 교회 유다계 크리스찬들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으므로, 이 단어의 상징적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A.D.1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2사도의 가르침'인 '디다케'(didache)를 보면, 바리사이들이 단식하던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새로운 전통을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초대 교회 시대에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가르침대로 단식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님을 잃은 인간적인 슬픔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인간의 죄악을 슬퍼하며 그 죄를 보속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단식을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식은 아직도 메시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유다 공동체들의 단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으로 치우친 단식에 대해 현실의 삶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식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강조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단식인데, 복음의 윤리적인 면이 동반되는 단식이었다(이사58,6).
한편, 마태오 복음 9장 16절에서 '헌 옷'에 해당하는 '히마티오 팔라이오'(himatio palaio; an old garment)는 형식적이며 경직된 이전의 모든 구질서와 낡은 가르침을 의미하며, '새 천 조각'에 해당하는 '에피블레마 라쿠스 아그나푸'(epiblema rakous agnaphou; a patch of unshrunk cloth; a piece of new cloth)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 질서와 새 가르침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아직 줄어들지 아니한 새 옷감을 헌 옷감에 대어 기워놓으면, 당장에는 쓸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옷을 물로 세탁할 경우에 새 옷감이 줄어 들면서 헌 옷감을 잡아당겨 옷에 주름이 지거나 찢어져서 옷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므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새 것과 헌 것이, 즉 예수님의 복음과 유다인들의 율법주의적 사고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가르침을 폐지하거나 반대로 과거의 가르침에 단순하게 덧붙인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과거의 가르침의 근본 정신을 밝히며, 이것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게 함으로써 온전하게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9장 17절에서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에 해당하는 '오이논 네온'(oinon neon; new wine)을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차츰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더 큰 부피로 팽창하게 된다.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wineskins)는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헌 가죽 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로, 유다교의 고루한 가르침을 헌 가죽 부대로 비유하시면서 유다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즉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과거의 가르침에 얽매여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비판만 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변화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9장 16~17절은 율법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으므로(요한1,45; 마태5,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약과 약속의 말씀을 따라야만 과거의 율법을 바로 준수하는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2023년 07월 08일 토요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오늘의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늘 복음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에 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들과 벌어진 논쟁이나 갈등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들과 선의의 경쟁 관계에 있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안드레아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1,35 참조).
또한 루카 복음서는 주님의 기도를 전하면서
제자들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11,1)라고 청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사람들에게 더 유명한 인물이었고,
제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예수님께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단식과 혼인 잔치는 상반된 이미지입니다.
단식이 절제와 보속의 의미라면 혼인 잔치는 기쁨입니다.
유다인들은 단식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실천하고,
율법을 더욱 열심히 지키고자 규정보다 자주 단식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에도 혼인 잔치는 큰 축제였고,
친척과 지인들이 여러 날을 함께 머물며 신랑 신부를 축하하여 주는 기쁨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때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단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짧은 비유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시간이 끝남을 암시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3주간 금.토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복음(마태9,9-17)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 육신의 생존, 안식을 위해 앉았던 세관(稅官), 곧 세금을 부당하게 걷었던 그 세리(稅吏)의 삶이 죄악임을 인정하는 자기 버림, 부인(否認)으로 그 자리를 떠나 참 안식, 참 생명의 주님을 따른 것이다.
10 예수님께서 집(성전)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자신의 뜻을 위해 스스로 준비한 제물을 드리는 제사(祭祀), 곧 제사와 윤리의 옛 계약, 그 인간의 행위로 얻는 의(義), 구원이 아니라 희생 제물,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오셔서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속으로 죽으심으로 제사를 완성하셨고, 그래서 더 이상 제사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고(히브10,18), 죄인들을 거저 의롭게 하시는 그 하느님의 자비인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먼저 깨달아라.’ 하시는 것이다.
(히브10,9-10)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새 계약)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옛 계약)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로마3,20-21)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제사와 윤리, 옛 계약)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대속, 새 계약)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하느님께 영광 그리고 땅에서 평화”다(루가2,14) 곧 우리의 모든 죄악들,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이 씻어 구원하시기 위해 외아들 그리스도를 저주(詛呪)의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어 피를 흘리게 하신(히브10,22) 그 피의 새 계약 안에 하느님의 은혜, 자비, 사랑을 깨달아 믿게 되면, 하느님께 먼저 감사. 찬미,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땅에는 평화, 안식인 것이다.
(이사43,7-8)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8 눈이 있어도 눈먼 이 백성을, 귀가 있어도 귀먹은 이자들을 나오게 하여라.”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의 말씀에 눈 멀고, 귀 먹은 이들이 인간의 뜻, 자기 의(義), 안식을 위한 단식을 말하고 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대속의 죽음)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 할 것이다.
=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에 의해 죽으시면 당신의 신부들인 제자들, 곧 믿는 이들이 하느님 앞에 생명, 의로움이 되지 못하는 율법의 행위들을 단식(斷食)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옛 계약의 결박(結縛), 죄(罪)에서 풀려 자유하게 하는 올바른 참 단식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사58,6-7)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율법)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새 계약의 말씀)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성전, 교회)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이웃)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 이웃 사랑을 위해서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말씀을 담은 새 그릇, 믿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2코린4,7)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옛 계약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곧 미사를 사람의 뜻, 의(義), 소원을 위한 제사로 드리면서, 또한 전례(典禮 주일과 기념, 축일) 행위에 열심을 부리며 만족해 한다면(이사1,13-15)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이 주는 하늘의 용서, 의, 생명, 자유를 믿지 못해, 누릴 수 없게 되고, 땅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옛 계약, 옛 생활에서 나와야 한다. 옛 계약의 행위의 신앙인 그 옛 사람을 벗어야(부인해야)한다는 것이다.
(골로2,20-23) 20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 세상의 정령들에게서 벗어났으면서도,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규정에 얽매여, 21 “손대지 마라, 맛보지 마라, 만지지 마라.” 합니까? 22 그 모든 것은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규정으로, 인간의 법규와 가르침에 따른 것들일 뿐입니다. 23 그런 것들은 자발적인 신심과 겸손과 육신의 고행을 내세워 지혜로운 것처럼 들리지만, 육신의 욕망(자기 副因)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옛 계약, 나)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피의 새 계약)를 헌 가죽 부대(옛 계약, 나)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나)가 터져 포도주(새 계약의 말씀)는 쏟아지고 부대(나)도 버리게 된다.
= 옛 계약의 열심인 나와,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믿는 내가 섞여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양다리 신앙을 살면 영원한 멸망, 죽음이라는 것이다.
미사(Missa ‘보내다, 파견하다’)를 다른 민족들이 추구하는 인간의 뜻, 소원을 위한 제사로 드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마태6,7-8. 31-32참조)
미사(Missa - 에우까리스티아, 感謝祭 ‘보내다, 파견하다’)는 외아들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내어 주시어 옛 계약, 그 율법의 죄를 대속(代贖)하게 하심으로 거저 은총, 은혜로 하늘의 용서, 구원을 주시는 그 피의 새 계약을 이루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찬양의 예배(禮拜)인 것이다.(마태6,33 요한4,23참조)
17ㄴ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 새 포도주(葡萄酒)인 피의 새 계약은 옛 계약의 ‘나’를 벗는, 짓는, 그 자기 부인(否認)하는 새 마음(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도, 사람도, 보존이 된다. 곧 ‘하느님께 영광 땅의 평화’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完成)이다.
(루가17,20-21)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아멘)
(요한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성령)를 보게(호라우-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멘)
<사제(司祭)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이 만들었던 세상적인 우상(偶像)들에 쓰러지는 우리의 나약함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나약함 때문에 만사(萬事)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찾는 마음이 간절하면 할수록 세상에 숨겨진 하느님이 나와 동행(同行)하시는 하느님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필요할 때만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영원한 보호자(아빠, 엄마)로 함께 하시어 생명, 진리의 길로 이끄시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을 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저희 모두의 마음과 발길을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