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05일 월요일
[연중 제9주간 월요일] 포도밭 주인 (마르12,1-12)

제1독서<토빗은 진리의 길을 걸어왔다.>(토빗1,3;2,1ㄴ-8)
1,3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2,1 우리의 축제인 오순절 곧 주간절에 나를 위하여 잔치가 벌어져, 나는 음식을 먹으려고 자리에 앉았다.
2 내 앞에 상이 놓이고 요리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그때에 내가 아들 토비야에게 말하였다.
“얘야, 가서 니네베로 끌려온 우리 동포들 가운데에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잊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보는 대로 데려오너라. 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 그런다. 얘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마.”
3 그래서 토비야가 우리 동포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을 찾으러 나갔다. 그가 돌아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내가 “얘야, 나 여기 있다.” 하고 대답하자 그가 계속 말하였다. “아버지, 누가 우리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을 살해하여 장터에 던져 버렸습니다. 목 졸려 죽은 채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4 나는 잔치 음식을 맛보지도 않고 그대로 둔 채 벌떡 일어나 그 주검을 광장에서 날라다가, 해가 진 다음에 묻으려고 어떤 방에 놓아두었다.
5 그런 다음 집에 돌아와서 몸을 씻고 슬픔에 싸인 채 음식을 먹었다.
6 그때에 아모스 예언자가 베텔을 두고 한 말씀이 생각났다. “너희의 축제들은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는 애가로 바뀌리라.”
7 나는 울었다. 그리고 해가 진 다음에 나가서 땅을 파고 그를 묻어 주었다.
8 이웃들은 나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이제는 두렵지가 않은 모양이지? 전에도 저런 일 때문에 사형감으로 수배되어 달아난 적이 있는데, 또 저렇게 죽은 이들을 묻는구먼.”
화답송시편 112(111),1ㄴㄷ-2.3-4.5-6(◎1ㄴ)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
○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
○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
복음<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르12,1-12)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1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연중9주간 월요일 제1독서(토빗1, 3; 2,1ㄴ~8)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1,3)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규칙', '규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 '카논'(kanon)은 권위있는 거룩한 책들 그리고 신앙과 삶의 규칙 또는 규정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어 성서의 책들을 정경(canon)으로 인정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후원으로 발행된 성서들에는 구약 성서에 일곱 권의 책들, 곧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시라(집회서), 마카베오 상.하권, 바룩은 물론 다니엘서와 에스델서의 첨가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일곱 권의 책들과 첨가문들은 그리스어 성서(칠십인역 LXX성서)와 라틴어 성서(Vulgata)의 수사본 전통에 속한다.
가톨릭 교회의 성서에는 이 책들이 히브리어 성서의 책들 사이 여기 저기에 산재해 있지만, 많은 개신교 성서들에는 구약 성서의 부록으로 나온다. 이렇게 첨가된 책들은 때로 제2경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2경전이란 말은 정경(canon) 성서에서 이 책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거론하게 하며, '원정경'(protocanonical) 또는 명백히 히브리어 성서에 들어 있는 책들과 대립하게 한다.
이 책들은 또한 '외경'(Apocrypha)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 단어는 백성 가운데 현인들에게 주어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은밀한', '가장 나중에 쓰여진' 많은 책들과 맥을 같이 한다.
서방 라틴 교회에서 성서의 정경에서 구약 성서 외경의 위치는 교부 테르툴리아노 (A.D.2세기 말과 3세기 초)때부터 고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 예로니모는 구약 성서 정경을 히브리어 성서에 나오는 책들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책들을 처음으로 '외경'이라 불렀다.
아우구스티노는 5세기 초 일곱 권의 외경을 포함한, 더 폭넓은 정경을 옹호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때까지 보존된 기본 상황이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서만'(sola scriptura)이라는 원칙을 주장하면서 성서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도 제기했다.
마르틴 루터는 특정한 교의를 위해 마카베오 2권 12장 45~46절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 본문은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성서의 증언으로 사용되었고, 대사(大赦)에 관한 논쟁에 포함되었다.
루터는 마카베오 2권과 에스델서에는 '너무 많은 유다이즘과 이민족의 목소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진리'를 주장한 예로니모의 원칙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히브리어 진리'란 히브리어 정경에 들어 있는 책들만이 구약 성서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1534년의 독일어 성서 번역에서 '외경'을 부록에 첨가하였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에 대한 응답으로 '히브리어 진리'와 '외경'을 분리시킨 루터의 구분을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라틴어 불가타 성서의 전통을 따르고, 논쟁 중이던 일곱 권의 책들을 포함하는, 더 폭넓은 정경을 수용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구약 성서 책들의 최종 명단을 작성하였고, 가톨릭 교회의 성서는 오늘날까지 이 공의회의 교령을 따르게 된 것이다.
이제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쓰여진 구약의 일곱권의 책들인 제2경전 (외경)에 대한 입문을 마치고, 거기에 속하는 한 권의 책인 토빗기의 오늘 독서의 말씀으로 들어가 본다.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토빗1,3)
토빗기 1장 1~15절은 토비트에 대한 묘사를 하며, 그를 통해 이야기 줄거리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제공한다.
토비트의 머리글(토빗1,1~2)에서 우리는 토비트가 어떤 사람이고(납달리 지파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 어느 시대 사람이며(기원전 8세기 말 아시리아인들의 임금 살마네셀 5세 시대), 어디에 살았는가(처음에는 갈릴래아에서, 다음에는 아시리아에서 유배와서)하는 점을 알게 된다.
토빗기 1장 3절부터 3장 6절까지에서 토비트는 자기 자신('나 토비트')에 관해 말한다. 그는 먼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으며, 니네베로 유배 온 동족들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고 말한다(토빗1,3).
그런 다음 토빗기 1장 4~9절에서 토비트는 이스라엘 땅에 살았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회고한다. 그는 자기 조상 납달리 온 지파가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에도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충실히 머물며, 규정에 쓰인 대로 희생 제물을 바치고, 맏물과 맏배와 가축의 십분의 일을 바치고, 모세의 법에 쓰인 규정에 따라 살았다.
그는 개인적인 정보도 제공하며, 아버지는 죽었고, 할머니 드보라에게서 율법을 배웠으며, 일가에서 아내를 맞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토비아라 하였다고 말한다.
모든 이야기에서 토비트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경건한 삶의 본보기로 나온다. 곧 그는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선행에 힘쓰고 율법을 준수하며 살았다. 그는 신명기의 가르침을 그대로 사는 의인이며, 신명기의 종교적 가치를 소생시키는 사람이다.
토비트는 유배지에서도 '이민족들의 음식'을 거부하면서 율법을 준수하는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 토비트를 축복하시어 토비트는 살마네셀 임금에게 필요한 모든 물품을 사들이는 직책까지 맡게 되었다.
토비트는 사업차 메대 땅을 다니던 중에 가바엘에게 큰 액수의 돈을 맡겨 두었다 (토빗1,14). 살마네셀이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이 뒤를 이어 임금이 되자 정치 상황이 악화되어 토비트는 더 이상 메대로 갈 수 없었고, 맡겨 둔 돈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토빗1,15).
한편, 토빗기 1장 16절에서 2장 10절은 토비트가 행한 선행 가운데 하나이고 토비트서의 주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인 '죽은 이를 묻어 주는 것'을 다룬다. 그러나 이같은 선행으로 인해 토비트가 큰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 풍자적이다.
토비트 이야기는 세 임금, 곧 살마네셀(토빗1,16~17), 산헤립(1,18~20), 그리고 에살-하똔(토빗1,21~22)의 통치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토비트는 살마네셀 임금의 호의를 받았기 때문에 유배지에 사는 이스라엘 동족들에게 자유롭게 선행을 실천할 수 있었고, 특히 동족들의 주검(시신)을 땅에 묻는 선행을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예루살렘을 점령하려다가 자기 군대가 막대한 손해를 입은데 대해(2열왕 19장과 이사야서 39장 참조) 분노를 터뜨리며 니네베에 있는 이스라엘인들을 죽이기 시작하였고, 증오의 표시로 주검(시신)을 묻지 않고 방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비트는 계속해서 그들의 주검을 묻어 주었는데, 결국 니네베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알리고 말았다. 그래서 토비트는 자신의 선행때문에 니네베를 빠져나와야 했고, 모든 재산을 잃었다.
그러다가 에살- 하똔 치세 때 토비트에게 행운이 돌아왔다. 토비트는 그의 조카 아키카르의 간청으로 니네베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주검을 묻는 토비트의 용기와 그로 인한 위험을 설정한다.
일반적인 이런 주제들이 오늘 독서의 말씀대로 오순절 축제 때 구체화된다 (토빗2,1~10).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을 되찾게 된 토비트는 잔치 음식을 준비한다. 토비트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경건한 삶의 본보기로서 아들 토비아에게 지시하여 가난한 이들을 데려와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토빗2,2).
아들 토비아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살해되어 장터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하자, 토비트는 잔치 음식을 맛보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시신을 광장에서 날라다가 해가 진 다음 묻으려고 어떤 방에 놓아둔다(2,3~4).
이처럼 주검을 발견한 슬픈 이야기는 유배를 사는 하느님 백성의 고통을 상키시킨다. '너희의 축제들은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는 애가로 바뀌리라'하고 애도하는 아모스서 8장 10절의 인용문이 슬픔에 싸인 분위기를 잘 묘사한다.
토비트는 해가 진 다음에 나가서 땅을 파고 죽은 이를 묻어준다.그의 이웃들은 죽은 이를 충실히 묻어 주는 그를 비웃는다(2,7~8).
2023년 06월 05일 월요일
[연중 제9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바로 앞 단락에서(지난 토요일 복음 참조) 예수님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한 유다 지도자들에게 당신께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시는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계시하시면서 그들이 문제 삼은 권한을 실제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주인은 그 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 멀리 떠납니다.
여기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그리고 포도밭의 관리를 맡은 소작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자기 포도밭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내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게서 끊임없이 파견된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종들은 소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매질이나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머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종들은 죽임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파견된 많은 예언자가 겪어야 하였던 수난의 역사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이전에 파견된 예언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이심을 드러냅니다.
주인이 파견하는 마지막 인물은 ‘종’이 아니라 ‘아들’로 표현됩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져 본 적이 없는 하나뿐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계신 분,
하느님과 유일하고도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는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는지를 더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면,
우리 또한 그토록 귀하신 분을 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하고 정성껏 모시며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하는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작인들이 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12,1-12)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0~11)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12장 10~11절에서 시편 118장 22~23절을 인용하셔서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켜 예언하신다.
원래 시편 118장 22~23절은 곤경 속에 있었던 다윗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노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이 버려진 돌과 같이 사람들의 멸시를 받지만, 하느님의 자애로 다시금 돌아와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에 해당하는 '케팔레 고니아스'(kephale gonias; the head of the corner; the capstone)은 줄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히브리 어법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마치시며, 당신 자신을 새로운 성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버린 돌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성전보다 더 크시고 높으시다(마태12,6).
사도행전 4장 10절과 11절의 '버림을 받음'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이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도 역시 시편 118장 22절에서 찾는다. 그리고 베드로1서 2장 7~8절은 시편 118장 22절을 이사야서 8장 14~15절과 관련시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머릿돌'이 아니라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리게 하는 바위'가 됨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돌에 걸려 넘어진다.
한편 '내버린'에 해당하는 '아페도키마산'(apedokimasan; rejected)의 원형 '아포도키마조'(apodokimazo)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와 '시험하다', '분별하다', '증명하다'라는 뜻을 지닌 '도키마조'(dokimazo)의 헙성어로서, '완전히 시험한 후에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집짓는 이들(건축자들; the builders)과 포도밭의 소작인들로 비유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은 나름대로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숙고하고 철저히 검증하며 시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포도밭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면, 더 이상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고 이권을 유지하며(마르11,15참조), 종교적 위선을 숨기고 무지한 백성들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포도밭 주인의 아들, 곧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이사야 예언서 5장 7절에 보면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며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좋은 열매가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소작인들에게 소출을 받아 오라고 예언자들을 보내신 비유를 통해 구약 성경의 전통이 계승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내 좋은 열매를 거두도록 하시는 장면에서 포도밭의 비유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포도밭을 빼앗아 다른 이들에게 주신다는 설명은 새로운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유다인들이 배척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구세사 안에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죄악과 배반,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완고함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에게 역설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역설은 시편 저자에게서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117〕,22-23).
그리스도께서는 버림받은 돌이 되셨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