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7월 18일 월요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요나 예언자의 표징 (마태12,38-42)
제1독서<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미카6,1-4.6-8)
1 너희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너희는 일어나 산들 앞에서 고소 내용을 밝히고 언덕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여라.”
2 산들아, 땅의 견고한 기초들아, 주님의 고소 내용을 들어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고소하시고 이스라엘을 고발하신다.
3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내가 무엇으로 너희를 성가시게 하였느냐? 대답해 보아라.
4 정녕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왔고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구해 내었으며 너희 앞으로 모세를, 아론과 미르얌을 보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7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8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화답송시편 50(49),5-6.8-9.16ㄴㄷ-17.21과 23(◎ 23ㄴ) ◎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내 앞에 모여라, 나에게 충실한 자들아, 제사로 나와 계약을 맺은 자들아!” 하늘이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네. 하느님, 그분이 심판자이시네. ◎
○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나는 네 집의 수소도, 네 우리의 숫염소도 받지 않는다. ◎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복음<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마태12,38-42)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미카6,1-4.6-8)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 (7ㄴ-8)
맏아들(장자)를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은 사실 출애굽 당시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을 멸하시는 중,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처음 난 것을 구별하여 보전하시면서 그들에 대해 당신 소유로 선언하신 것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탈출34,19).
물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가운데 레위인들을 구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는 일에 매진하게 하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맏아들 대신에 취하셨다 (민수8,16).
그리고 이방의 몰록신을 섬기는 자들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맏아들을 실제로 바치려는 일을 자행할까 우려하여 율법은 이를 금하였고, 예언자들도 이를 단호하게 금하였다.(이사57,5 ; 레위18,21 ;20,2 ; 예레7,31 ;19,5 ; 에제16,20-21 ;20,16) 그러나 이스라엘은 개국 이래 누누히 이러한 일을 최상의 헌신의 증표로 여기고 이를 임의로 자행하였다 (2열왕16,3 ;21,6).
진실로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결과, 불필요한 제물을 쓸데없이 허비하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중하게 여기시는 바, 자기 자신보다도 소중한 자기 자녀,그것도 맏아들(장자)을 죽여 번제로 바치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어리석고도 추악한 일,가증스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8)
앞선 6,7절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을 통해, 주님을 향하여 선민들이 가진 잘못된 자세의 실례를 제시하는 내용이다. 반면에 8절은 예언자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를 통해 밝히는 내용이다.
본문의 말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착한 일' 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반절의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 과 병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본절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착한 일이지, 결코 6,7절에서 제시되는 인신제사와 같은 반인륜적 제물이나 부정 부패나 불의한 방법을 통해 얻은 사치스러운 제물이 아님을 밝힌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착한 일은 불의한 제물과 상반되는 정의로운 삶이고, 물질적으로 대단해 보이는 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갖는 사랑이며, 형식적이고 종교적 율법 준수가 아닌 삶에서 드러내는 인격적 변화가 따르는 행동임을 제시하고 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8)
본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첫번째 부정사구인 '아소트 미쉬파트'(asoth mishiphat) 즉 '공정을 실천하는 일' 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공정(정의)이 무엇인지를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공정'(정의)에 해당하는 '미쉬파트'(mishiphat)는 하느님의 속성인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성품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재판관이 바른 판결을 내리는 것을 나타내거나(신명25,1 ; 여호20,6),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사용된다.(욥기22,4 ; 시편143,2)
이것은 아울러 일상적인 삶의 행동에서(시편106,3), 또는 말에서(시편37,30), 또는 그 생각이나 사상에서(잠언12,5) 보이고 간직해야 할 정의로움 내지 정직함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충분한 정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실천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예레22,3).
한편, '신의'에 해당하는 '헤쎄드'(hesed)는 하느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사랑(자비와 인자)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것은 자상함, 친근함, 애정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진 근본적인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계약적 사랑' 으로 규정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오직 계약에 입각해서 무조건적으로 그 백성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셨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과 관련해 사용하면, 하느님의 계약적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충성', '온유함', '인자함', '자비로움' 등 인격적인 덕목을 구비하는 것이며, 그것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구현하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8)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세번째 요구사항은 겸손히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여기서 '겸손하게' 에 해당하는 '하츠네아으'(hatsneah)는 '걷는 것' 에 해당하는 '레케트'(leketh)처럼 부정사형이다.
즉 본문은 하느님과의 동행만큼 동일한 비중으로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의 반대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교만' 이다. 성경 곳곳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심판의 지름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언11,2 ;16,18 ;17,19 ;18,12 ;29,23 ; 이사2,11)
그러므로 본문에 제시된 그 반대의 삶의 자세인 '겸손'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승리와 구원의 자리에 든든히 자기를 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겸손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됨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자만이 참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자는 창조주 하느님께 자신이 어떤 제물을 드린다해도,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요, 결코 그 제물만으로는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절감하게 마련이다.
즉 그는 하느님 앞에 일 년 된 송아지든, 수천 마리 숫양이든, 만 개의 강물같은 기름이든, 심지어 그 태에서 난 맏아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 하느님 대전에 내세우거나 그것만을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절감해야 한다.
그가 하느님 대전에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오직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겸손 외에 없다. 또한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동행)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것 역시 겸손과 일맥상통한다.
2022년 07월 18일 월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요나의 설교를 듣고 곧바로 회개하였던 니네베 사람들과는 달리,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신 예수님을 마주한 이들은 메시아의 신원을 증명하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백성들이 메시아를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닐 뿐더러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모습 또한 무례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이 오그라든 사람(마태 12,9-14 참조)과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 못하는 이들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모습(12,22-32 참조)이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소개된 것을 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보고 싶어 한 것은 표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설적이게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주하였을 때 요구와 질문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구와 질문은 순수한 바람이나 궁금증이 아니라, ‘난 네가 싫어.’ 또는 ‘하기 싫어.’라는 메시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도 “회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거부의 표현입니다.
성경을 읽고 싶지 않은 만큼, 기도하고 싶지 않은 만큼, 자신의 잘못을 보고 싶지 않은 만큼 교회와 사제, 동료들을 향한 요구는 많아집니다.
그런 그들을 변화시킬 만한 동기는 누구도 줄 수 없습니다. 돌 같이 굳어 버린 자신의 마음에서 그 변화가 시작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마태12,38-42)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 무슨 표징? 무엇을 위한 표징을 원하는 것일까?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 예수님은 죄인들의 먹이, 양식으로 오셨음이 표징이다.
(루가2,11-12)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구유에 누우신 아기, 곧 짐승 먹이통에 누우신 예수께서 구원의 표징이다. 어제 묵상 했듯, 우리의 죽음을 받아 드시고 대신 죽으셔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심이 구원의 표징인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우리 죄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죽으시고 흘리신 피, 곧 하느님의 새 계약인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겨 깨끗한, 의로운 자가 되게 하신, 그리고 죽으시고 저승에서 사흗날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 구원의 표징이신 예수님이시다.
그 표징의 실체이신 분, 구원자 앞에서 다른 표징을 원한다는 것이 악, 죄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내일, 곧 영혼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당장 눈에 보이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줄 메시아,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그들의 속셈에서 나온 죄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스올-저승)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요나가 저승 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고 살아나서 죽어야 할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그들이 회개했기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덕과 윤리를 거스른 죄의 반성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뜻, 진리의 길을 거스른 그 세상 힘의 원리의 길에 자신들을 회개했다는 것이다. 그때 대속, 진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진리는 창조 이전에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음을 기억하자(에페1,4- 히브4,3참조) 하느님의 나라가 진리다. 그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오셨음이 곧 진리의 선포이다.
(요한1,11-12) 11 그분(말씀-예수)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진리)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 구약의 아브라함, 다윗 외 모든 이들이 하늘의 대속, 그 진리로 받은 구원이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하늘의 진리(예수 그리스도)이다. 도덕과 윤리, 그 지혜가 아닌 선이 악을 대속하고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늘의 지혜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신을 가르켜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하신 것이다.
(1코린1,21.24)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인 남방 여왕이 심판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듯,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聖徒)는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지혜로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지혜인 진리를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죽음(지옥)에서 구원 받는 길이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온갖 열정, 지혜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 에서 구해 내실 때, 마음이 변한 파라오가 말이며 병거, 그의 모든 기병이며 보병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쫓아오자~
(탈출14,11-14)
11 그들(이스라엘)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12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자신들의 구원에 시련이 오자 남의 탓, 하느님까지 원망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13 그러자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14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
= 사람의 지혜, 그 생각을, 행동을 하지 말고 잠자코 있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그 지혜로 하늘을 향해 똑바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어릴 적 엄마를 도와 드린다고 하다가 일을 저지르자 엄마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성인이 되고 보니 가만히 있는 것,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나의 구원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멈출 수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행함이 그릇되고 헛된 것임을 인정하는 그 자기부인(自己否認)은 된다.
그러면 이곳저곳 찾아 헤메지 않고 하느님의 길, 지혜, 진리의 말씀 안으로 곧 예수님 안으로, 그분의 십자가 복음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게 된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우리 안에 모든 죄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돼야 모든 것에서 자유 평화를 살 수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2,38~42)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38~40)
여기에서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온'(semeion; a sign)은 어떤 인격이나 사물을 다른 것으로부터 두드러지게 구별해 주는 표시와 같은 것들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기적'이나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 주는 '징조'와 같은 것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유대 랍비들은 장차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면,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은 표징을 보여줄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메시야가 아닐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에게 표징을 구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능력있는 가르침이나 지금까지 일으키신 많은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앞서 마귀들린 자를 고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오히려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한 것이라고 공격하였으며(마태12,22~24), 이제는 또다시 표징을 요구하는 변덕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구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해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절개없는'으로 번역된 '모이칼리스'(moichalis; aduterous)는 '간음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모이큐오'(moicheuo)에서 유래한 형용사로서 '간음하는', '혼외(婚外)정사를 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과 그 백성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느님께 신실하지 못한','신앙을 버린'이라는 의미로 쓰인다(야고4,4; 에제16,15).
전에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말씀에 만족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찾게 된다.
지금 예수님께로부터 책망받고 있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인들 역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리울 만큼 악했으며(마태12,34), 눈에 보이는 기적으로 자신들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야 할 정도로 하느님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한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큰 물고기에서 삼키워져 죽은 줄 알았던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만에 온전하게 살아나옴으로써 하느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세우셨음을 보여 주었던 표징을 가리킨다.
'요나에 관한 표징'이 예수님의 표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요나가 바로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표징은 B.C.8세기경 북부 이스라엘의 예언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간 갇혀 있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 당신도 죽어 땅 속에 사흘간 묻혀 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땅 속에'로 번역된 '엔 테 카르디아 테스 게스'(en te kardia tes ges; in the heart of the earth)에서 '카르디아'(kardia)는 '마음', '심장'(heart) 으로 번역되는데, '땅 속에'라는 말은 '땅의 심장 안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는 땅의 가장 중심부를 가리키지만, 비유적으로는 '죽음의 영역인 저승(스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스올의 뱃속'에 있었다고 표현하였으며(요나2,2), 이것은 그가 죽은 자의 영역에 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생명 자체이시고(요한14,6)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지만(요한1,4), 죄인들을 대신해 죽음에 이르렀으며(히브2,9) 완전한 죽음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었다(로마6,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므로(히브4,15)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매어 있을 수 없으셨고(사도2,24), 결국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1ㄷ)
여기서 '더 큰 이'로 번역된 '플레이온'(pleion; a greater)은 '폴뤼스'(polys)의 비교급으로서, 양에 있어서 더 크거나 질에 있어서 더 우수하고 나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플레이온'(pleion)이 중성 단수로 쓰였다. 예수님께서 굳이 비교급 중성을 사용하신 것은 '요나'라는 사람과 예수님 당신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비교하시는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로부터 받은 심판의 메시지'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의 메시지와 은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예언자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 하나만을 듣고도 회개했는데,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아들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심판 때에 그들은 더욱 철저하게 단죄받게 될 것을 보여준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2ㄷ)
에디오피아 지역 스바에서 온 여왕은 단순히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만 듣기 위함이 아니라 그에게 있는 모든 지혜를 보고 듣고 알고 배우기 위해서 그에게 왔던 것이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유대 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완전한 지혜를 소유한 분이 그들의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혜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보여줄 수 밖에 없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유대인 자신들의 눈앞에서 가장 많은 지혜의 말씀과 기적을 베풀어도 믿지않는 그들의 불신앙과 완고하고 사악한 고집 때문에, 그들의 죄를 뒤집어 쓰고 무죄하신 당신이 십자가에 처형될 수 밖에 없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2022년 07월 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표징(標徵)은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는 표식이다
복음(마태12,38-42)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 표징(標徵)은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는 표식이다. 곧 표징 안에 구원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악(惡)한 생각이다. 그리고 성경(聖經)의 모든 표징은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킨다.
(루가2,10-12) 10 천사가 그들(목동)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짐승의 먹이통)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그리스도의 표징은 죄인(짐승)들의 생명, 구원의 양식으로 먹히러 오심이다.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먹히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39ㄱ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 구원의 표징 자체이신 분 앞에서, 곧 자신들의 죄를 품고 죽으실 구원자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악(惡)하고 절개(節槪)없는 죄(罪)인가.
마귀(魔鬼)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이’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베엘제불’이라했던 이들이다.(앞24절) 곧 율법(제사와 윤리) 신앙의 그들이 구원의 진리를 몰라보는 ‘눈멀고, 말 못하는’ 주님께 고침을 받아야할 ‘마귀 들린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어진 오늘의 말씀이다.
39ㄴ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 사흘 밤낮을 땅속에, 왜 사흘이며 또 굳이 밤낮이라는 표현을 덧 붙혔을까? 먼저 땅속은 어둠을 뜻한다. 그 어둠 속으로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어둠, 그 밤을 흡수하시고 낮(빛)으로 만들어 사흘(3-하늘)로 구원하신다는 구원의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속에 묻히시지 않으셨다.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묻히셨다.(마태27,60) 곧 땅속에 묻히셨다는 것은 흙, 어둠의 존재들인 우리 죄인(罪人)들을 뜻한다.
그러니까 ‘사흘 밤낮을 땅속에 계신다.’는 표징은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인 죄인들 안으로 들어오셔서 빛(하늘-3)으로 살려 내신다는 것이다.
다른 표징의 그림이~
(루가1,78-79)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빛)이 우리(어둠)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1,9)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어둠)에 왔다.
= 주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고, 받아들임과 받아들이지 않음, 곧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의 문제일 뿐이다.
41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믿었기 때문이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믿었기 때문이다. 요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곧 ‘내 안에 계신다.’ 구원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다.’
어제 공부했듯이 내 밖에 예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그 믿음을 위한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곧 제사와 윤리로 쌓은 자기열심, 의(義)를 부인(否認)하는 신앙생활로, ‘구원(救援)의 진리(眞理), 의로움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로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처럼 제사(祭祀)와 윤리(倫理)를 열심히 지키며 착하게 ‘자기(自己) 의(義)’를 위한 신앙을 산다는 것은 온 세상의 죄(罪)로 죽으신, 곧 사흘 밤낮을 땅속에 계시며 거저 주시는 하늘의 의(義), 빛을 믿지 못해 없는 것이다. 악한 거짓말, 가르침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앞절에서 착하게, 의롭게 산 그 바리사이들에게~
34절에서 “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 제사(祭祀) 열심히 드리며 선악(善惡)을 분별하여 착하게, 의(義)롭게 산 것이, 사람의 뜻, 욕망(慾望)을 위해 뱀의 유혹(誘惑)을 먹은 교만(驕慢), 악(惡)이라는 말씀이다.
(2코린11,14) 14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래서 다름 43절이하~ 예수님께서 사흘 밤낮을 땅속에 계시며(죽으시고) 주신 하늘의 의(義), 빛이 말끔히 치워진 그 빈 집(마음)에 악령(惡靈)이 되돌아오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버림, 비워냄 뒤에 빛(진리의 말씀, 성령)의 채워짐이 있어야 한다.
(2코린4,6-7)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지혜)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골로2,3-4) 3 그리스도(사흘 밤낮을 땅속에 계심)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4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무도 여러분을 그럴듯한 말(인간의 뜻을 위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원한 보호자, 지혜의 성령님!
우리 안에 하늘의 보물인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이 계심을 늘 기억하여 그 빛 안에 빛으로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