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일 금요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9-13)
제1독서<양식이 없어서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8,4-6.9-12)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9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10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람이 허리에 자루 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12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화답송시편 119(118),2.10.20.30.40.131(◎ 마태 4,4ㄷ)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
○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찾나이다. 당신 계명 떠나 헤매지 않게 하소서. ◎
○ 언제나 당신 법규를 열망하여, 제 영혼 목말라 지치나이다. ◎
○ 저는 진실의 길을 택하였고, 제 앞에 당신 법규를 세웠나이다. ◎
○ 보소서, 당신 규정을 애타게 그리오니, 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살려 주소서. ◎
○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 ◎
복음<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9,9-13)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모스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아모8,4-6,9-12)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앞선 아모스서 8장 4~6절에서는 타락한 선민의 대표로서의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지배층을 향하여 주 하느님 심판의 원인으로서의 저들의 악행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아모스서 8장 7~10절에서는 저들의 악행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 하느님께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애통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제 아모스서 8장 11절이하 13절에서는 심판날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때에는 말씀이 단절될 것을 경고한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문은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표현보다 '보라, 그날이 온다'라는 표현이 먼저 나온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기를 마지않던 자들이 멸망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아모스서 8장 11절부터 13절까지 단락의 첫 부분에서 '보라'라는 의미의 감탄사를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그날이 온다' 에 해당하는 '야밈 빠임'(yamim baim)에서 '빠임'(baim)은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뽀'(bo)의 분사형이다.
분사형은 문맥에 따라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지만, 본문에서처럼 '힌네'(hinne; 보라)와 같은 감탄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에는 모두 미래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단순한 미래에 대한 예상이 아닌, 예언자에 의해 선포되는, 반드시 성취될 미래에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본문은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아모스서 8장 11~13절의 맨 앞에 기술함으로써 그것을 확실히 선언하고 그것의 성취를 강조한 것이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심판으로 보내실 기근의 성격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본절 상반절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굶주림'(기근)이라는 표현이나 본문의 '양식'이라는 표현은 모두 '라아브'(laab)로 동일하다.
창세기 41장 54절 등에서 '흉년'이라는 의미로 번역된 '라아브'(laab)는 개인적 가난이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굶주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보다 자연적 재해나 인위적 전쟁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이 기근이나 주림은 개인적 노력으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재앙의 결과인 것이다.
또한 '양식'에 해당하는 '레헴'(lehem)은 장기적 생존을 위해 넉넉하게 쌓아 둔 양식이라는 의미보다 하루 정도의 식사를 의미하는 빵(떡)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창세18,5; 판관8,5),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기본적 식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영역본들은 '레헴'을 '빵'(bread) 혹은 '음식'(food)이라고 번역하였다.
즉 본문이 말하는 먹을 것의 부족은 쌓아 놓은 양식이 없어서 앞으로가 걱정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당장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긴박한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물이 없어 목마르다는 표현에서 '목마름'(갈증)에 해당하는 '차마'(tsama)라는 표현도 전쟁 등으로 인해 마실 물이 없어 당장 사람이 목말라 죽어가는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표현이다(애가4,4; 호세2,3).
그런데 본문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기근이 이러한 양식이나 물을 먹지 못한 기근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굶주림과 갈증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 심판의 근본적 원인이 육신을 위한 양식과 물을 먹지 못해서 생긴 기근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서 생긴 기근 때문임을 나타내며, 육식의 양식과 물보다 영적인 양식, 즉 주 하느님의 말씀의 중요성과 그것을 지금 당장이라도 취해야 한다는 긴박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이상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준다.
첫째, 인간 존재가 먹고 마시는 일과 관련한 육체적 필요만을 충족해서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인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것을 먹고 마셔야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신명8,3; 마태4,4).
둘째,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상징하므로 하느님의 말씀이 기근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떠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자비로이 여기심,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즉 하느님의 떠나심은 먹을 것이나 마실 물로 인한 기갈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만을 추구하였지만, 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대해서는 추구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어리석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핍박하며 심지어 그들의 말씀 선포를 가로막기까지 하였다(아모 7,13; 12,12).
북부 이스라엘에 닥칠 심판은 단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바닥나서 발생한 기근이 아니고,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추구하기는커녕 거부하고 배척한 북부 이스라엘의 교만이 자초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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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일 금요일
[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구원 사명’이 마태오 복음사가의 성소 이야기 안에서 소개됩니다.
먼저, 마태오는 중풍 병자가 치유된 사건(9,1-8 참조)에 이어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평상에 누워 있던 중풍 병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해방된 이야기가,
자신이 한평생을 묶여 살았던 세관에서 해방된 체험과 닮았다고 본 듯합니다.
또 마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자신을 먼저 “보시고” 시작되었음을 전하면서
이 부르심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셨고,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마태오는 자신의 성소 이야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실인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유’를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가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을까요?
마태오도 우리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을 듯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회개하였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하였다는 점입니다.
부르심이 회개에 앞섭니다.
교회는 회개한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의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의 속마음을 건드립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罪人임을 깨달아 義人이신 예수님으로 義人이 되는 것이 信仰.
(마태9,9-13)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 세관(稅關)에 앉아있는 것은, 자신의 안위, 안식을 위해 속국(屬國)인 로마(세상)에게 세금을 바치기 위해,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는 그 잘못된 자리, 죽음의 자리에 앉아있다. 죽어있다는 뜻이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하신 말씀에 곧바로 일어나 따른다. 자신이 앉아있던 그 삶의 자리가 잘못인 죽음의 자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 예수님의 식탁(제단)에는 유명한 사람, 착한 의인들 보다 세리, 죄인들이 많다. 그들이 늘 함께 한다. 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히브2,11-17)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13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14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뱀의 선악의 법)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죄)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 대사제는 모든 이들의 죄를 대속하려 정결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짐승의 피로는 죄를 씻을 수 없어, 죄를 씻어 거룩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 당신의 깨끗한 피로 씻으시기 위해 대속하신 것이다.(히브10,1~)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 스스로 의롭다하는 이들은 절대 예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죄인들과 함께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義, 명예에 가치를 두는 이들은 성경을 하느님의 지혜, 진리로 전하면 ‘이상한 소리한다.’고 듣기 싫어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1코린1,23-25)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반드시 의사를 찾는다. 그렇듯,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自覺)하는 이는 마태오처럼 두 말 않고 용서(容恕)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른다. 성경 또한 인간의 지혜로는 어리석어 보이는 그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일 줄 안다.
(1코린1,21)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의인이 되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죄인임을 먼저 깨닫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의인이신 예수님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배워야 하나? 사람에 지혜에서 나온 말로 배우면 안 된다. 보호자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곧 사람의 뜻, 계명으로 듣지 말고 하느님의 뜻, 계명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그래서 자신의 의(義), 명예(名譽)를 위한 제사가 아닌, 곧 자신의 뜻을 이루려 예수님을 열심히 섬기는 그 종교 행위가 아닌, 그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다 이루신(완성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血)로 의롭게 되는 그 하느님의 새 계명, 새 계약의 말씀, 그 자비를 전하라는 말씀이다.
예전에 나는 말씀을 모르고 사람의 가르침만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아주 착하고 의로웠던 사람들이었다. (인간의 관점으로 봤을 때) 그런데 하느님은 그 사람들의 의로움으로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한 몸이 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 당신의 의로움, 하늘의 의로움인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왜? 인간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완전할 수 없는 땅(어둠)의 것이기 때문이다.(이사64,5참조) 그러니 모든 것을 깨끗하게, 거룩하게, 완전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 새 계명, 새 계약인 십자가의 복음을 성령께 배워, 진리로 찾아 믿고(입고) 오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음을 믿고, 그 예수님의 자비(慈悲)에 의탁하는 것이 용서, 생명, 구원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義, 명예를 위한 길이 아닌, 하늘의 의로움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찾아 의지하는 것이다.
(루가18,11-14)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사람들이 칭찬하는 자기의, 명예, 그 높은 길이 아닌 하느님께서 칭찬하시는, 곧 인간의 의, 명예가 하늘의 생명을 데 무력함을 깨닫는 그 자기부인의 낮은 자리에서, 참 의로우신 높으신 분을 갈망하며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의 높으신 분께서 찾아와 품어 주시어, 그 높으신 분과 한 몸이 되어 그분으로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창녀가 왕자와 결혼하면 신분이 높아지듯)
인간은 스스로 의롭게 높아질 수 없는 존재다. 곧 흙인 그 없음의 존재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의롭다고 우겨봐야 흙, 그 없음의 의로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의로움을 개짐(더러운 걸레, 똥 걸레)일 뿐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 그 복음을 주지 못하는 인간의 의로움은 하늘의 용서, 생명, 하늘의 구원을 주지 못하는 개짐일 뿐인 것이다.
☨ 영원한 보호자 성령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의탁하는 신앙이 아닌 인간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 그 오류의 어둠속을 헤매지 않게 하소서. 언제나 하늘의 대속인 십자가, 그 의로움, 그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아멘!!!
♣ 단죄와 배척이 아닌 서로를 품는 자비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까닭과 제자의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습니다.”(9,10) 그분께서는 죄인의 구원하시려고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이들보다 죄인 취급을 받는 의지할 데 없는 ‘공적인’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 상종하지도 않던 바리사이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종교생활에서 배제하고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이런 부류와 함께 식사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바빌론 탈뭇 브라콧 43b).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데 반발한 바리사이들을 탓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자 아모스는 사업상의 거래에서 속임수를 쓰고 가난한 사람을 등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단죄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모스의 단죄는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경고였을 뿐이었는데 그들은 결정적으로 단죄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가까이 대하시고 사랑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보이시면서 회개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품으시려고 애쓰셨지만 특히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9,13)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죄로 기우는 경향 때문에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죄인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마음이 굳어져 후회할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들은 어떤 잘못에도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자기 허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않고 스스로 의롭다고 믿으며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인인 우리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회개에로의 부르심에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주님의 자비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영혼의 치유자이신 그분의 자비에 맡길 줄 알아야겠지요.
오늘 복음에 비추어 신앙공동체의 삶과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기 보다는 남의 죄에 민감하고, 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조차 참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탈을 쓰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죄인과 의인을 가르고, 은연중에 죄인을 공동체의 삶에서 배제시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어떤 때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오히려 더 냉정하고 가혹한 ‘낙인찍기’를 하고 있음을 보기도 합니다. 한 번 실수하면 헤어나지 못하고, 틈만 나면 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들춰내고 어떤 책임이나 봉사에서도 배제시키는 경우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지요.
무릇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오히려 신앙공동체에서나 사회생활 중에 죄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 공동체의 넘치는 사랑으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겠지요. 회개는 가혹한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손길 안에서 더 깊이 그리고 더 빨리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영혼의 어둠 속을 헤매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서로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나누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배척하고 단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9,9-1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12)
이 구절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메시야이신 당신의 사명이 바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이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건강한'에 해당하는 '휘기아이논테스'(hygiainontes; healthy; whole)는 '건전하다', '바르다', '참되다'는 뜻을 지닌 '휘기아이노'(hygiaino)의 현재 분사로서,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르다'는 뉘앙스를 더 강하게 띄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건강한 이들'이란, 종교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들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부하면서, 인간의 영적 악함을 깨끗하게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필요하다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바로 당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지칭하며, 그 외에도 예수님을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병든'에 해당하는 '카코스'(kakos; sick)도 육체적으로 병들고 허약한 것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병든 이들'이라는 표현에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종교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 대전에 진실로 구원자를 필요로 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을 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physician; a doctor)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며, 마태오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되어 온 모든 죄인들도 그 중에 포함될 것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예수님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을 수 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율법주의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제외될 것이다.
'회개시키러'로 번역된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을 고치다'라는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을 바꿈'이라는 뜻이다.
루카 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막연히 죄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님을, 루카 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들을 선택한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게 여겨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죄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눔을 밝히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