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7월 02일 토요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마태9,14-17)
제1독서 <나는 내 백성의 운명을 되돌려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라.>(아모9,11-15)
11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12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 이 일을 하실 주님의 말씀이다. -
1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14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그들은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곳에 살면서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고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니 그들은 내가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으리라.” - 주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화답송시편 85(84),9.11-12.13-14(◎ 9ㄴㄷ 참조)
◎ 주님은 당신 백성에게 평화를 말씀하신다.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들은 다시는 어리석게 살지 않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복음<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9,14-17)
14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아모9,11~15)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11~12)
아모스서 전체는 크게 4부로 구성되어있다. 그 가운데 본문의 9장 11절 이하 15절까지는 마지막 제4부이다. 앞선 제1~3부의 내용들이 모두 심판과 관련된 진술이었던 것과 달리 이 부분에서는 선민의 구원과 회복을 예언하고 있다.
비록 다섯 절의 짧은 내용이지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아모스서 전체에서 제시된 심판 경고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돌이킴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선민의 역사가 비록 굴곡을 겪지만 마침내 영원한 구원과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서의 제4부는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11)
첫째 부분인 본절(11절)은 다윗 왕가의 왕권 복원이 약속된다. 여기서 사용된 '그날에'라는 표현은 지금까지는 심판의 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아모2,16; 5,18; 8,3.9).
그러나 본문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로 바뀌어 묘사되는 것이다. 즉 본문에서 '그날'은 다윗의 무너진 초막(장막)을 일으키는 날이라고 묘사된 것이다.
그런데 '초막'(장막)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해석상 이견이 있다.
구약 성경에서 주로 '만남의 천막'으로 번역되는 '오헬'(ohel)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기간 동안에 하느님께서 거하실 장소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성막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초막'(장막)으로 번역된 '쑥카트'(sukkath)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기간 동안에 지내던 숙소인 텐트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도 광야에서 '쑥카'(sukka)에 지내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일정 기간동안 초막(장막)에서 생활하는 절기를 지켰는데, 그 절기의 이름이 '초막절'(장막절) 즉 '하그 핫쑥코트'(hag hassukot)이다(레위23,42.43).
즉 이 '쑥카'(sukka)라는 단어는 출애굽 당시의 하느님의 동행과 보호하심을 상기케 하는 표현이다.
물론 다윗의 무너진 초막을 일으킨다는 표현은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고,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부흥기였던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게 된다는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쑥카'(sukka)라는 표현은 그러한 회복이 하느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묵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혹자는 본문의 '쑥카트'의 모음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고, 일반 명사가 아닌 고유 명사 '쑥코트'(sukkot) 즉 '수꼿'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본문의 '쑥카트'는 다윗 임금이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통치하는 데에 중요한 군사 기지로 사용한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된다.
아모스 당시에는 사실 아람 임금 하자엘의 공격으로 인해 침략을 당해 수꼿의 영토는 빼앗긴 상태였다 (2열왕10,32.33).
이같은 역사적 정황과 연결시켜 '쑥카트'를 '쑥코트'(수꼿)으로 보면, 심판의 날에 하느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초막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표현은 다윗 당시에 정복하였지만 지금은 다른 나라에 빼앗긴 수꼿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한다면, 본문 이후 제시되는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저 그것을 옛날처럼 세우리라.'고 한 표현은 수꼿의 성읍을 회복한 뒤에 다시 정비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을 수꼿의 재정복에 대한 예언으로 보든, 다윗의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예언으로 보든, 모두 다윗 시대에 가나안 지역의 많은 곳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도 다윗이 통치하는 당시 이스라엘을 함부로 넘보지 못함으로써 평화를 구가하였던 당시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다윗 시대의 평화와 번영의 기초가 되었던 하느님을 바로 믿고 섬겼던 온전한 신앙의 회복이란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본문은 그날 즉 주님의 날이 되면,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근거한 다윗 시대의 영광과 번영을 완전히 회복할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에서는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 들이는 문제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렸을 때, 이 회의를 주도하는 인물 중 야고보가 본문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방인들을 하느님의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함을 밝히는 내용이 제시된다.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사도15,16~19; 아모9,11~12)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의 초막(장막)을 다시 세우고 온전하게 회복시킬 것이라는 본문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민족들의 모든 백성들로 구성된, 온전한 하느님 나라의 회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의 다윗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본문은 다윗의 초막을 다시 세울 것이라는 상반절의 표현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초막을 보수할 것인지를 예언하는 내용이다.
본문의 '벌어진 곳'이라는 표현에서 여성 3인칭 복수형은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본서의 협의적 배경이 북부 이스라엘이기는 하지만, 아모스서 7장 15절, 8장 2절 등에 기록된 '내 백성 이스라엘'이란 표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본서의 청중이나 독자는 북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남부 유다를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이라는 두 개의 분단 국가로 나뉘어진 이스라엘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란 의미를 내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구약의 예언서에 제시된 선민 회복 예언 중에는 다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비롯한 본 단락은 멸망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의 정치적 회복을 의미할 수도 있고, 주 하느님 신앙의 회복에 의한 선민 위상의 복귀로 이해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재림으로 인하여 성취되는 신약 선민의 교회의 설립과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 교회 구성원에 의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처럼 예언서에 예언된 회복은 짧게는 외세에 의하여 멸망당한 선민 공동체의 재건으로부터 길게는 구세사의 정점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12)
앞선 아모스서 9장 11절에서는 장차 하느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다윗 왕가의 왕권과 다윗 때의 영광을 회복할 것을 예언하였다. 이어지는 아모서 9장 12절에서는 모든 민족을 기업(상속)으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회복될 때에는 아모스서 9장 1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다윗 임금시절의 영광을 모두 회복할 뿐 아니라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그들의 통치 아래에 들어오게 할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이 에돔을 비롯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모든 민족들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영토를 다시 획득하며, 더 나아가 다른 나라까지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로인해 하느님의 나라가 왕성하며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고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과거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세상 만국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인정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이며, 즉 궁극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22년 07월 02일 토요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단순히 ‘단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전통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묻는 모습에서 순수한 궁금증보다는 묘한 우월감과 비판 의식이 느껴집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요한의 제자들처럼 신앙생활을 정해진 규범과 전통을 따르는 정도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왜 요즘 여성 신자들은 미사보를 안 쓰나요?”
“왜 요즘 신자들은 묵주 기도를 무릎 꿇고 바치지 않나요?” 등과 같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신앙의 핵심을 마주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규칙과 전통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현존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다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새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따르는 규칙과 전통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는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규칙과 전통으로 이루어 놓은 개인과 공동체를 찢어지고 터지게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슬퍼할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닿는데도 어떤 찢어짐이나 터짐이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고요함’이야말로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참 단식은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먹는 것이다.
(마태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 그때에~ 앞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로 이어지지요.
예수님은 인간의 열심, 희생제사가 아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하십니다.
제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 아드님을 통해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그 제사의 의로움, 자비로 우리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열심, 희생. 그 자기 의로움으로 예수님을 따르려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몸값으로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간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마르10,45참조)
예수님은 아기로 오셔서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셨습니다. 곧 죄인들의 생명의 양식으로 오셨다는 것이지요(루가12,12)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당신(말씀)을 먹일 *죄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단식의 문제는 그 말씀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보다 인간들의 의로움을 더 중요시했던 그들의 단식, 그 자기 의로움의 율법을 단식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이 혼인잔치에 손님으로 있을 때에는 단식이 필요없지요. 그것이 율법의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의 손님이 아닌 신부로 있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목적지인 것입니다.(에제31,32참조)
그래서 신랑을 빼앗기면(죽으면), 곧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율법의 모든 죗값(로마3,20)을 치루시는 그 십자가의 제사를 완성하시면~ 제사와 윤리 그 율법을 끊고, 단식하고 신랑(예수)의 신부로 십자가의 복음, 그 구원의 진리 그 말씀을 먹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진리의 말씀을 먹고 많은 이들을 율법과 제사에서 자유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단식이라는 것이지요.
(이사58,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새옷(신약. 새 계약)과 헌옷(구약. 옛 계약)을 섞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섞지 말라는 것은 헌 것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헌 것을 통해서 새것을 알아야 하다는 것입니다. 헌 것을 통해서 새것으로 건너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갈라3,24-25)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 옛 계약, 율법을 통해 새 계약,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옛것, 율법을 통해 죄를 알아 새것,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꼭 필요한 겁니다.
(로마7,12-13) 12 그러나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율법의 실체를 모르고 그 법의 행위에 머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음식을 굶는 것이 단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13 그렇다면 그 선한 것이 나에게는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그 선한 것을 통하여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게, 죄가 계명을 통하여 철저히 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죄가 드러나야 용서로 죄가 씻겨 하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에페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피로 맺는 새 계약, 그 새 계약의 새 포도주를 담으면(먹으면) 새 부대가 되는 겁니다.
(2코린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아멘.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마태9,14~17)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16~17)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빼앗길'에 해당하는 '아파르테'(aparthe; will be taken)는 '~로 부터' (from)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치사 '아포'(apo)와 '들어올리다', '가져가다'는 뜻이 있는 '아이로'(airo)의 합성어인 '아파이로'(apairo)의 가정법 부정(不定) 과거이다.
여기서 부정(不定)과거(Aorist)가 쓰인 것은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을 읽는 초대 교회 유다계 크리스찬들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으므로, 이 단어의 상징적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A.D.1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2사도의 가르침'인 '디다케'(didache)를 보면, 바리사이들이 단식하던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새로운 전통을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초대 교회 시대에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가르침대로 단식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님을 잃은 인간적인 슬픔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인간의 죄악을 슬퍼하며 그 죄를 보속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단식을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식은 아직도 메시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유다 공동체들의 단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으로 치우친 단식에 대해 현실의 삶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식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강조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단식인데, 복음의 윤리적인 면이 동반되는 단식이었다(이사58,6).
한편, 마태오 복음 9장 16절에서 '헌 옷'에 해당하는 '히마티오 팔라이오'(himatio palaio; an old garment)는 형식적이며 경직된 이전의 모든 구질서와 낡은 가르침을 의미하며, '새 천 조각'에 해당하는 '에피블레마 라쿠스 아그나푸'(epiblema rakous agnaphou; a patch of unshrunk cloth; a piece of new cloth)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 질서와 새 가르침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아직 줄어들지 아니한 새 옷감을 헌 옷감에 대어 기워놓으면, 당장에는 쓸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옷을 물로 세탁할 경우에 새 옷감이 줄어들면서 헌 옷감을 잡아당겨 옷에 주름이 지거나 찢어져서 옷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므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새 것과 헌 것이, 즉 예수님의 복음과 유다인들의 율법주의적 사고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가르침을 폐지하거나 반대로 과거의 가르침에 단순하게 덧붙인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과거의 가르침의 근본정신을 밝히며, 이것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게 함으로써 온전하게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9장 17절에서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에 해당하는 '오이논 네온'(oinon neon; new wine)을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차츰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더 큰 부피로 팽창하게 된다.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wineskins)는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헌 가죽 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로, 유다교의 고루한 가르침을 헌 가죽 부대로 비유하시면서 유다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즉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과거의 가르침에 얽매여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비판만 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변화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9장 16~17절은 율법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으므로(요한1,45; 마태5,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약과 약속의 말씀을 따라야만 과거의 율법을 바로 준수하는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2022년 7월 1.2일 [연중 제13주간 금.토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복음(마태9,9-17)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 육의 생존, 안식을 위해 앉았던 세관(稅官), 곧 세금을 부당하게 걷었던 그 세리(稅吏)의 삶이 죄악임을 인정하는 자기 버림, 부인(否認)으로 그 자리를 떠나 참 안식, 참 생명의 주님을 따른 것이다.
10 예수님께서 집(성전)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자신의 뜻을 위해 스스로 준비한 제물을 드리는 제사(祭祀), 곧 제사와 윤리의 옛 계약, 그 인간의 행위로 얻는 의(義), 구원이 아니라 희생제물,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오셔서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속으로 죽으심으로 제사를 완성하셨고, 그래서 더 이상 제사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고(히브10,18), 죄인들을 거저 의롭게 하시는 그 하느님의 자비인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먼저 깨달아라.’ 하시는 것이다.
(히브10,9-10)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새 계약)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옛 계약)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로마3,20-21)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제사와 윤리, 옛 계약)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대속, 새 계약)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하느님께 영광 그리고 땅에서 평화”다(루가2,14) 곧 우리의 모든 죄악들,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이 씻어 구원하시기 위해 외아들 그리스도를 저주(詛呪)의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어 피를 흘리게 하신(히브10,22) 그 피의 새 계약 안에 하느님의 은혜, 자비, 사랑을 깨달아 믿게 되면, 하느님께 먼저 감사. 찬미,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땅에는 평화, 안식인 것이다.
(이사43,7-8)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8 눈이 있어도 눈먼 이 백성을, 귀가 있어도 귀먹은 이자들을 나오게 하여라.”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의 말씀ㅇ레 눈 멀고, 귀 먹은 이들이 인간의 뜻, 자기 의(義), 안식을 위한 단식을 말하고 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대속의 죽음)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에 의해 죽으시면 당신의 신부들인 제자들, 곧 믿는 이들이 하느님 앞에 생명, 의로움이 되지 못하는 율법의 행위들을 단식(斷食)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옛 계약의 결박(結縛), 죄(罪)에서 풀려 자유하게 하는 올바른 참 단식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사58,6-7)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율법)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새 계약의 말씀)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성전, 교회)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이웃)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 이웃 사랑을 위해서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말씀을 담은 새 그릇, 믿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2코린4,7)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옛 계약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곧 미사를 사람의 뜻, 의(義), 소원을 위한 제사로 드리면서, 또한 전례(典禮 주일과 기념, 축일) 행위에 열심을 부리며 만족해한다면(이사1,13-15)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이 주는 하늘의 용서, 의, 생명, 자유를 믿지 못해, 누릴 수 없게 되고, 땅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옛 계약, 옛 생활에서 나와야한다. 옛 계약의 행위의 신앙인 그 옛 사람을 벗어야(부인해야)한다는 것이다.
(골로2,20-23) 20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 세상의 정령들에게서 벗어났으면서도,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규정에 얽매여, 21 “손대지 마라, 맛보지 마라, 만지지 마라.” 합니까? 22 그 모든 것은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규정으로, 인간의 법규와 가르침에 따른 것들일 뿐입니다. 23 그런 것들은 자발적인 신심과 겸손과 육신의 고행을 내세워 지혜로운 것처럼 들리지만, 육신의 욕망(자기 副因)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옛 계약, 나)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피의 새 계약)를 헌 가죽 부대(옛 계약, 나)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나)가 터져 포도주(새 계약의 말씀)는 쏟아지고 부대(나)도 버리게 된다.
= 옛 계약의 열심인 나와,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믿는 내가 섞여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양다리 신앙을 살면 영원한 멸망, 죽음이라는 것이다.
미사(Missa ‘보내다, 파견하다’)를 다른 민족들이 추구하는 인간의 뜻, 소원을 위한 제사로 드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마태6,7-8. 31-32참조)
미사(Missa - 에우까리스티아, 感謝祭 ‘보내다, 파견하다’)는 외아들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내어 주시어 옛 계약, 그 율법의 죄를 대속(代贖)하게 하심으로 거저 은총, 은혜로 하늘의 용서, 구원을 주시는 그 피의 새 계약을 이루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찬양의 예배(禮拜)인 것이다.(마태6,33 요한4,23참조)
17ㄴ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 새 포도주(葡萄酒)인 피의 새 계약은 옛 계약의 ‘나’를 벗는, 짓는, 그 자기 부인(否認)하는 새 마음(부대)에 담아야한다.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도, 사람도, 보존이 된다. 곧 ‘하느님께 영광 땅의 평화’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完成)이다.
(루가17,20-21)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아멘)
(요한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성령)를 보게(호라우-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멘)
<사제(司祭)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이 만들었던 세상적인 우상(偶像)들에 쓰러지는 우리의 나약함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나약함 때문에 만사(萬事)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찾는 마음이 간절하면 할수록 세상에 숨겨진 하느님이 나와 동행(同行)하시는 하느님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필요할 때만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영원한 보호자(아빠, 엄마)로 함께 하시어 생명, 진리의 길로 이끄시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을 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저희 모두의 마음과 발길을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