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8일 토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마태 2,13-18)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빛이신 그분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 (1요한 1,5―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5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화답송 시편 124(123),2-3.4-5.7ㄷㄹ-8(◎ 7ㄱㄴ)
◎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
○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
○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
요셉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고, 자신의 안위가 불안한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근처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린다. (마태 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요한1서 1,5-2,2)
요한 1서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1,5-3,10)의 대주제는 빛이고, 둘째 부분(3,11-5,12)은 사랑인데, 두 부분의 첫 구절에 그리스어로 '메시지' 또는 '소식'을 뜻하는 '앙겔리아'(angelia)라는 말이 나온다.
요한 1서에서 앙겔리아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 안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요한 복음을 비롯하여 4복음서는 이 말의 동의어로 '기쁜 소식'을 뜻하는 '에우앙겔리온'(euangelion)을 사용한다.
첫째 부분(1,5-3,10)의 첫 머리에서 저자는 하느님을 빛으로 계시한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없다."(1,5)
여기서 저자는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눈 요한의 세계관을 반영한다.(요한3,19-21)
빛 속에서 거닐고 진리 안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게 되고 동료 인간들과도 친교를 나누게 된다.
빛 속에서 거닐기 위해서는 당신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을 받아 들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우리안의 주어진 그분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1,8-10)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모두 죄인으로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 축일'이다.
헤로데 대왕은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기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부인이 10명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온 자녀들이 권력 승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 탄생 무렵, 권력에 위협을 느껴 수많은 죄없는 아기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2,13-17참조)
초세기 교부들은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들을 순교로 이해하였다.
곧 희생된 아기들은 말 없이 피를 흘림으로써, 주님의 강생의 신비를 증언했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어 인류 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실지를 미리 보여준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진리가 아닌 거짓 속에, 사랑이 아닌 탐욕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오늘 예수님 때문에 죽은 아기들의 비참한 살해는 '끽' 소리도 못하고 죽은 아기들 뿐 아니라 그 아기들의 부모와 가족들의 통곡과 울부짖음, 절규와 원망이, 헤로데 대왕과 그 군대들 뿐 아니라 이집트로 피난가는 나자렛 성가정의 성모님과 요셉 양부를 향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 강생안에는 여러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 희생과 수난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님 때문에 죽고, 고통 받고 눈물 흘렸으며, 내세에서의 보상이라도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원죄의 사함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해되는 낙태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빛이 아닌 어둠, 죄악과 탐욕으로 가득차,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가 구속하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가진 태아들을 죽이는 우리들은 또 하나의 헤로데가 아닌가?
우리 안에 헤로데의 어둠과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죄 없이 순교하여 원죄의 사함을 받은 아기 순교자들이여!
이 시대 낙태되는 아기들을 위해 빌어 주소서!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예기치 않은 일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하지 못한 많은 일을 접하게 됩니다. 기쁜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분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 마음을 흔들어 괴로워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지나면 괜찮을까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속이 쓰리고 아픕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이스라엘의 두 살 이하의 아기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마태 2,16).
그것은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버리겠다고 한 행위입니다.
이런 일이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 (탈출1,22) 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파라오의 학살에서 구출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잔악한 행위에서 살아 남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십니다.
사람들은 파라오의 행동을 욕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악한 행동에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오늘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전쟁보다 더 큰 희생을 가져오는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보호막이 되어야 할 어머니의 뱃속에서 수많은 태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공식 집계한 임신 중절 수술만도 1년에 35만명에 가까운 태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어가고 있으니 이 보다 더 큰 전쟁의 살상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사형 제도를 찬성하거나 낙태 합법화를 찬성하면서 누구를 악하다고 욕하고 비난합니까?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어린이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 쿠옷볼트데우스는 헤로데 임금에 의해 살해된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을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가고 …그들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 하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하느님께서 주신 벌입니까?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야 합니까?
하느님께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소유와 지배욕, 시기와 질투, 불필요한 욕심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마태 2,13)고 했을 때 요셉은 일어나 그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가르침을 줍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바로 그때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합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인간을 낳습니다.”
무고한 아기들의 떼죽음, 그 비참한 학살의 소용돌이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혼돈 속에서 오셨습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태어나고, 끝남으로 시작을 이루며, 죽임 당함으로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2019.12.28. 축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마태 2,13-18)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죠? 그리고는 헤로데의 칼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을 하세요. 성경은 그 사건이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구약의 예언 성취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죠?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삶을 그대로 사실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로 자신들의 힘과 가치를 숭앙하는 이스라엘 자체를 힘의 세상인 이집트로 선언해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가셨는데 성경은 하느님의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고 그런단 말예요. 졸지에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걸 부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미만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도륙을 당하는 일이 발생해요.
(마태복음 2:15~18)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6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18 '라마 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 구나!'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세요? 하느님이 분명 요셉에게 그 자리를 피하라고 말씀 하셨죠? 그러면 그때에 다른 어미들에게도 전갈을 보내서 그 자리를 피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요? 왜 다른 얘들은 다 죽게 놔두세요? 예수님만 살짝 들어서 이집트로 보내신단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하느님은 성경의 독자들에게 뭔가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하늘에 뜬 별이 동방박사들을 일부러 헤로데에게 데리고 간 거예요. 죽이라고요. 아니 그 별이 미쳤지, 바로 그냥 예수님 태어나신 구유로 갔으면 될걸,, 왜 헤로데에게로 동방박사들을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게 하냐구요? 죽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인용된 곳에 ‘라헬의 통곡’ 이라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을 주의하여 보셔야 해요.
지금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그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그 이집트로 규정을 해 버리시고 그래서 예수님을 거기서 빼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첫 번째 엑소더스를 하고 그 뒤를 따라 하느님의 백성들이 엑소더스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정작 뭐였냐면, 이스라엘의 유대주의, 율법주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 와서 죽으시는 거예요. 이집트는 바로 교회 안에 그러한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모형으로 등장했던 거지, 이집트가 쳐 죽일 놈들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 ‘옛 자아’ 그 모습이란 말예요.
그렇게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집트로 규정해 버리고 그곳에서 사는 모든 자들은 모두 다 죽어야 할 자들임을 어린아이들의 죽음으로 주지시키는 거예요. 다 죽어야 되는 거라는 거예요. 이집트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은 어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자의에 의해서 내어 놓기도 전에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거예요. 이걸 원죄라고 해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다 죽어야 할 존재예요. 나면서부터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자들이 자라면서는 오죽하겠어요?
그러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건......
거기에 사는 모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선언이란 말입니다.
마태오는 그걸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통곡하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요. 이 예레미야의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대의 멸망과 관계있는 예언이죠? 라마라는 곳은 남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집결된 곳이에요.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죠? 여호수아 18장에 보면 나오죠.
그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샐사 부근이에요. 예라미야 예언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남 유대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자기 자식들이 끌려가는 걸 보고 통곡하는 것으로 묘사를 한 거예요.
라헬의 두 아들이 누구죠? 요셉과 베냐민, 요셉의 큰 아들은 에브라임,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에브라임이죠? 망했잖아요? 남유다는 베냐민. 라마가 또 베냐민의 땅이고, 요셉과 베냐민, 두 아들을 다 잃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라헬을 이스라엘의 어미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이스라엘 전체가 다 멸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의 백성으로 택해진 그자들도 원래 다 죽어야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렇게 다 죽어야 되는데, 그래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는데,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죠? 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죽은 자식이 돌아오는 것 이외에 다른 건 절대 위로가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예수가 바로 그 죽은 아들을 살리러 왔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란 말입니다. 한 아기가 와서 죽음에 던져져야 할 하느님의 아이들을 선택하여 살려 내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렇게 예수는 죽어야 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이 죄악의 세상에서 그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그런 복을 주어서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1: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자기 백성, 모든 백성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만. 어디에서? 죄에서. 그게 메시아란 말예요. 그렇게 구약적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폭로한 성경은 역사적 이집트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 내시죠? 예수님께서 출애굽 이스라엘의 여정을 그대로 밟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집트에서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게 지금 마태복음의 흐름이에요.
세례라는 건, 애굽의 이스라엘이 죽고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의식을 행하는 거죠. 그것도 하느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해 성취될 새 창조의 모형이에요.
첫 창조 때 무대 배경이 어땠죠? 수면 위에 하느님의 영이 운행을 하시고 빛이 있으라 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창조가 시작됐잖아요? 예수님의 세례 현장은요? 저주 받을 구약이 빠져 죽을 물이 있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계시고 직접 하늘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또 떨어져요. 그리고 그 위에 하느님의 영,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한단 말입니다. 이게 새 창조라는 거예요. 새 창조,
첫 창조에서 모형 되었던, 그리고는 광야로 나가셔서 40일 시험을 받으세요. 그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이제 12제자를 모으시죠. 그건 교회입니다.12제자, 하느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12제자를 모아서 그들을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도를 전하는 어떤 산으로 끌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게 산상수훈의 산이란 말입니다.
이건 정확하게 출애굽 이스라엘의 삶을 회복시키고 완성시키며 가는 모습이에요.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 살아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죠? 그걸 사도 바오로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그래요.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서, 그 홍해에서 이집트군대가 다 빠져 죽죠?
그 이집트 군대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건져내면서 이스라엘을 자주 군대라고 부르시죠? 이집트 군대가 빠져 죽었다라는 건, 애굽화된 이스라엘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