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제2주간금요일]먹보요 술꾼 (마태 11,16-19)

2019. 12. 13. 오전 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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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대림제2주간금요일]먹보요 술꾼 (마태 11,16-19)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계명을 지켜 얻을 수 있는 생명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신다. (이사 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화답송 시편 1,1-2.3.4와 6(◎ 요한 8,12 참조)
◎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말도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다. (마태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대림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이사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8)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은 주님을 떠나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토로된다.

하느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당신 백성이 번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명령과 규정을 주심으로서 옳은 길을 걷도록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였다.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루'(lu)는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했더라면'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경을 반영한다(민수20,3; 22,29; 여호7,7; 판관8,29).

새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로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들의 삶을 복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신명10,13)을 경청했더라면, 그들의 삶은 이러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고, 평화롭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축복이 아닌 스스로가 자초한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풍성한 평화를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 심령과 삶에 놓인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서(시편68,20)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너의 평화'에 해당하는 '셸로메카'(shellomeka)의 원형 '샬롬'(shallom)은 단순히 전쟁이나 불화,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well-being)를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인생 최대의 축복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평화를 강물에 비유한다.

이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풍성한 소출을 맺게하는 물이 풍성한 강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넘치는 삶, 풍족하고 풍성한 삶을 살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축복'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의로움'은 앞에 제시된 '평화'와 더불어 주님의 통치의 성격과 관련된다(이사32,17). 사실 의로움은 평화를 초래하는 원천이다.

여기서 '의로움'(정의)에 해당하는 '체다카'(tsedakah)하느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올바른 삶의 태도, 의롭고 정직한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법적으로 의로움을 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로움을 누릴 수 없는 약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푸는 삶으로까지 확대된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다 물결 같다는 표현은 그러한 삶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이다.

바다 물결은 그 흐름이 끊이지 않고, 한 파장이 다른 파장으로 연결되면서 계속된다.

하느님의 백성이 그의 명령을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산다면, 그들의 삶에서는 마치 바다 물결같이 의로운 행위, 자비로운 행위가 끊임없이 계속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그와 그가 속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힘입게 하며, 그야말로 '샬롬'(shallom), 즉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형통한 삶,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리로 이끌어 세울 것이다.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19)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이란 표현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삶은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9절 있는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축복을 성취하는 첩경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는 이와 정반대의 결과 즉 저주스러운 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북부 이스라엘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흩어졌으며, 남부 유다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하면서도 동일한 결과가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 왕가는 무너졌으며, 왕의 자손들 역시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민족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의 수효는 급감하고 말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축복으로 여겨졌었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된 번성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쇠퇴와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본문은 완료 시제가 아닌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 상반절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이미 끊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하느님의 명칭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의 존재와 성품, 사명과 활동 등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느님 대전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시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사제들의 나라(탈출19,5.6)로 삼으시고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거룩한 직책을 박탈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이같은 영예로운 이름, 그 안에 함축된 복된 직책과 임무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업신여김으로써 그 모든 축복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바빌론에 의해 패망을 당하여 결국 그들이 지닌 거룩한 이름과 정체성까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11,16-19)

 

진정 하느님의 수행자는 선인善입니다. 진인眞人입니다. 현인賢人입니다. 착하고 참되고 슬기로운 하느님의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유일한 삶의 목표입니다. 수행자의 본연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단지 귀로 듣는 것뿐 아니라 수용受容하고 이해理解하여 실행實行함으로 말씀과 동화同化되어야 비로소 진짜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전 말씀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1,15).

 

들어야 소통입니다. 부단히 들어야 자신을 압니다. 듣지 않아 듣지 못해 불통입니다. 소통은 생명이요 불통은 죽음입니다. 붙통에서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분도규칙도 아들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어야 순종이요 겸손입니다

진정 '마음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이가 진인이요 선인이요 현인입니다. 막연한 수행자가 아니라 말씀의 수행자가 진정한 수행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예수님이말로 참 수행자의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

듣지 못하는, 반응할 모르고 공감할 줄 모르는 회개를 요하는 불통의 세대를 뜻합니다. 무감각, 무의욕, 무의미의 삶의 늪에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볼 줄도 생각할 줄도 모르는, 참으로 무뎌지고 굳어진 생각이 없는 사람, 관념이 없는 사람, 주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단정하고, 예수님이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의 친구다.’ 하며 일방적으로 매도합니다들을 수 있는 귀는 물론 볼 수 있는 눈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물론 무수한 성인들의 삶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 수행자의 삶이 바로 지혜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그 안타까움을 토로하시며 진정 당신의 계명을 듣고 실행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꼭 오늘의 우리 세대에 주는 엄중한 예언 말씀 같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을 잊었기에 불의不義와 불화不和가 만연된 정의正義와 평화平和가 없는 세상입니다. 혼인율, 출산율의 저하와 이혼율 증가로 후손들이 끊어질 것 같은 예감도 듭니다

어제 어느 노 자매의 오늘날 성당에는 젊은이도 아이들도 없고 온통 노인들뿐이라는 탄식어린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정말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들의 이름도, 하느님의 이름과 말씀도 끊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수행의 삶을 축복하시어 우리의 평화가 강물처럼, 우리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1,20).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는 백성에게,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고 하면서 주님을 쉽게 멀리하는 세상 안에 주님의 현존을 상기시킵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삶은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슬프고 폭력적인 삶으로 변합니다.
우리 시선을 들어 올려 우리를 위하시는 주님과 그분 사랑을 깨닫는 것이 절박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활 방식과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주님과 그분 사랑을 잊고,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식 없이 살아갈 때 의미 없는 암울한 삶으로 끌려가기 쉽습니다.
주님만이 평화의 길로 우리의 발걸음을 올바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백성이 계속해서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하십니다.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오시든 주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시는 주님을 만나고 맞이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현존을 통하여 우리를 자신 밖으로 나가게 하시어 당신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어쩌면 혼인 잔치에서 ‘기쁘지 않다.’라고 말하고, 장례식에서도 ‘슬프지 않다.’라고 말하는 장터에 앉아 있는 변덕스러운 아이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과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모든 것을 거부하려는 비판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고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좋은 것만을 바라보게 하는 열려 있는 태도와 인자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강물처럼,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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