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간 금요일]제 십자가(마태16,24-28)
모세는 백성에게, 주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키면 그분께서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고 한다. (신명 4,32-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5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36 그분께서는 너희를 깨우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당신의 소리를 너희에게 들려주셨다. 또 땅 위에서는 당신의 큰 불을 너희에게 보여 주시고, 너희가 불 가운데에서 울려 나오는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셨다.
37 그분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그분께서는 몸소 당신의 큰 힘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38 그리하여 너희보다 크고 강한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내쫓으시고, 너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오늘 이처럼 이 땅을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신 것이다.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마태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1독서(신명4,32~40)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3)
원문에는 '듣다'라는 뜻을 가진 '샤마'(shama)동사가 두 번 나오며,
그에 따른 주어도 각각 표기되어 있다.
이 중에서 두번째 주어인 2인칭 대명사 '너'라는 뜻의 '앗타'(atta)는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 쓰인 표현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어떤 백성이 바로 너희가 들었던 것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음성을 듣고도 생존했다는 데에 있다.
어떤 민족도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하느님을 보고 살아 남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몹시 두려워했음에도(신명5,25; 18,16) 불구하고(창세16,13; 32,30; 탈출33,2; 판관6,22.23; 13,23)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 남은 것은 결국
하느님의 은총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할 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죄와 허물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받아 주심으로 인해
당신과 그들을 연결시켜 주셨으니, 이런 은혜를 경험한 민족이
어디에도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로 번역된 '하에쉬'(haeshi)는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영역이나 거룩함의 속성과 차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모세에게는 탈출기 3장의 '불타는 가시덤불' 사건을 연상시키는데,
광야의 만남의 천막안 지성소 계약의 궤위에서 하늘로 치솟는 불기둥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계약의 궤 위의 두 케루빔 천사 사이의 자리
"셰키나"(Shekina)에서 모세와 백성들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 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39~40)
본문에서 사용된 '하욤'(hayom) 즉 '오늘'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현재의 시점과 밀접하게 관계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역사가 과거에 묻혀진 고고학적인 유물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언제나 현재의 시점에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로 번역된 '하셰보타 엘 레바베카'
(hashebotha el lebabeka)에서 '하셰보타'는 '돌아가다'란 뜻의
'슈브'(shub)의 사역형으로 '다시 돌이키다', '다시 회복하다'란 뜻이며,
전치사 '엘'(el)은 돌이켜야 되는 방향을 말해주며 '레바베카'는 '너의 마음'이란 뜻이다.
따라서 '너의 마음을 다시 회복시키다'는 뜻으로
새 성경에서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로 잘 번역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결코 과거 한 순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부패하고 타락하기 쉽고
하느님을 멀리하기 쉽기 때문이다.
항상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간에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새롭게 마음에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의 땅 이집트에서 이방의 문화와 종교에
둘러싸인 채로 430년을 살아온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려고 하는 가나안 땅 역시
거짓된 이방의 신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현재라는 시점에서 마음에 항상 하느님께서
유일하신 분이란 사실을 새롭게 다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오늘날 종교 다원 주의의 물결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신명4,35)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 되고'
본문에서 관계 대명사 '아셰르'(asher)는
'그래야(그래서) ~ 하도록' 으로 번역할 수 있다.
즉 '아셰르'는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키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말해주기 위해 쓰인 관계 대명사이다.
한편, '잘되고'로 번역된 '이타브'(itab)의 원형은 '아타브'(yatab)로서
'좋은'이란 뜻의 '토브'(tob)와 어근이 같은 말이며, 거기에 전치사 '레'(le)와
함께 쓰여서 '~에게 잘 되어가다', '~에게 기쁨이 되다'란 뜻이다.
그리고 이 단어의 주어는 바로 앞에서 다룬 내용 전체
즉 '모세가 명하는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키는 행동'이다.
이런 의미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너희와 너희 자손들에게 기쁨이 되고 좋은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과 하느님 백성의 삶의 행복은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결과는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 그 자체가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자신의 복에
관련시키는 자기 중심적인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하느님 중심의 차원 높은 신앙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6,24-28)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6)
'목숨을'로 번역된 '프쉬켄'(psychen)의 원형 '프쉬케'(psche)는 '숨쉬다', '바람불다'
라는 뜻을 가진 '프쉬코'(psycho)에서 유래한 명사인데, '목숨'(life; 요한10,17)이라는 뜻
뿐만 아니라 '영혼'(soul; 마태10,28)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 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영혼도 가리키는
이중적인 용어이다.
마태오 복음 16장 25절에 나오는 역설적인 교훈은 이러한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 간의
대조 관계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즉 자신의 육적인 생명에 대한 애착만을 갖고 이것을 지키려는(히브2,15) 자는 끝내는
육적인 목숨과 더불어 영적 목숨까지 잃게 되지만(루카12,20),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자신의 육적인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자 하는 헌신된 삶을 살 때, 오히려
그의 영혼이 살 뿐 아니라 종말에 그 육체 또한 주님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임을 뜻한다(야고1,19; 묵시21,4).
또한 '얻고도'에 해당하는 '케르데세'(kerdese; he gains)는 능동태인데 반해,
'잃으면'에 해당하는 '제미오테'(zemiothe; lose)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태'(voice)는 본문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전달해 준다.
즉 이 문장은 사람이 온 세상(천하)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힘쓰는 노력은 자발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하느님께서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심은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이 구절을 직역하면,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위한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이다.
한글 새성경에서 '제 목숨을' 다음에 '주고'에 해당하는 '도세이'(dosei;
shall give)가 빠져 있는데, 이것은 미래형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일이 관습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격언적 미래형'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인간 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생명의 단(일)회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앞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25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유한한 육적인 생명보다 훨씬 소중한 영생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영생의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그토록 소중한 목숨까지도 권능의 예수님께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각오를 촉구하신 것이다.

<내 십자가를 지고 찾아가는 행복의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의 태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16,26) 하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목숨이란 영혼에 반대되는 육신이 아니라 전 존재를 뜻합니다. 따라서 살아계신 주님의 성전인 자신의 목숨을 우주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 세상과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됨을 깨우쳐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면 먼저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16,24).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의지로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끊어버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끊는다든가 포기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사실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려면 먼저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소명을 지닌 사람인지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겠지요.
자신을 버린다는 건 그런 인식 위에서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들,
곧 세상에 대한 애착, 물질에 대한 탐욕, 명예심, 인간관계를 분열시키고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오욕칠정의 뿌리를 비워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자신을 “죄인들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 (1티모 1,15)이라 하였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끊임없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 안에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자신을 ‘구더기만도 못한 사람’, ‘가장 보잘것없는 종’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인식을 통하여 자신을 철저히 비워내고 대신, 그 빈자리에 주님을 모셨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인식을 올바로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영에 이끌려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게’(1요한 2,15) 됩니다.
나아가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게 될 때 비로소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자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만을 갈망하는 진정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며 하느님만을 갈망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곧 참된 기도의 시작이요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다.
'제 십자가’란 겪게 되는 삶의 무게, 불편한 관계,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분노, 온갖 고통과 시련 등입니다.
공동선을 파괴하는 사회의 구조악, 인간존엄성의 파괴, 생명경시, 불평등과 차별 등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십자가를 내 힘이 아니라 자비와 정의이신 하느님과 더불어 져야 하고, 십자가가 구원의 선물로 바뀔 때까지 그것을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일상의 고통과 시련과 불편함을 인내하며, 우리 사회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바꿔나감으로써 진정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