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이미 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묵시21:1-8)

2021. 5. 2. 오전 8: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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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성서


(93) 이미 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묵시21:1-8)


(묵시21:1-8)

1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5 그 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신 뒤 다시금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은 거저 마시게 하겠다. 7 승리하는 자는 이것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8 그러나 비겁한 자와 믿음이 없는 자와 흉측스러운 자와 살인자와 간음한 자와 마술장이와 우상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장이들이 차지할 곳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죽음이다.'

 

우리는 지난시간에 요한 묵시록 21장 서두의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현대 신학이 어떤 해석을 하고 있는가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았습니다. 현대 신학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전소멸 설갱신 설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많은 분들이 갱신 설로 돌아섰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갱신 설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유산으로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의 우주와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갱신 설입니다. 그러나 갱신 설이든 완전소멸 설이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곳이며, 죄가 없는 곳이며, 그 곳의 삶의 원리는 힘의 원리로 대표되는 이 땅의 삶의 원리와 정 반대의 것으로 사는 곳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묵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사실 공간적이며 장소 적인 면 보다는 구원받은 성도의 상태에 더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미래의 어느 날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질 공간 적이며 장소 적인 곳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이 가시적인 역사와 이 처음 땅, 처음 하늘 아래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와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4:17)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서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이 된 엥기켄엥기조라는 동사의 직설법 완료형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회개하라 天國이 와 있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하늘나라(天國) 이 왔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루가17:20-21) 2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21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와 있다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게다가 성경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새 사람들이 이미 이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후5:17)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영적으로 우리 가운데 와 있으며 우리 새 사람들은 그 하느님 나라를 이 옛 하늘과 옛 땅에서 경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지금 읽었던 고후5:17 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믿으면(안에 있으면)’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도 없고 애통함도 없고 곡하는 것도 없고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순간 이미 하늘나라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페2:5-6)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영적으로 하늘에 앉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65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야기도 사실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65:17-18) 17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18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나는 '나의 즐거움'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고 '나의 기쁨' 예루살렘 시민을 새로 나게 하리라.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를 희망하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임할 것이라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장차 올, 장소 적이며 공간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메시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구현되게 될 이 땅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영적으로 이 옛 하늘과 옛 땅 안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골로1:13-14)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한 추상적인 개념을 경험적이며 실제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한다는 것이 참 힘듭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통치의 개념으로 설명을 해 드린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쫓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세상 나라에 속해 있을 때에는 세상의 법과 질서인 나의 이익과 힘의 원리를 쫓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다음에는 그 아들의 나라의 법과 질서인 나의 희생과 내 이웃의 유익, 그리고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새로운 법과 질서 속에서 살게 되지요. 그 삶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 나라의 삶인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질서 속에서 잘 살아내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삶 속에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늘 희생하고 손해 보고 섬기면서도 항상 행복한 분들이 계시잖아요. 바로 그 삶이 이 땅에 시작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인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의 원리인 나의 희생과 내 이웃의 유익,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다툼과 애통함과 슬픔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상대적인 빈곤이나 상대적인 부끄러움이나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밟아야 하는 그런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왜 슬프고 애통하고 고통스러워합니까? 그 삶의 중심이 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이기심이 오히려 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손해 보는 것 같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 사람들 보다 내가 덜 행복한 것 같고, 다른 사람들 보다 내가 더 희생하는 것 같아서 생기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나의 희생과 내 이웃의 유익,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점차 익숙해지게 되면 그런 것이 나를 애통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 나를 슬프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과 희생과 섬김이 있는 곳에 왜 갈등과 미움과 다툼과 경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요? 그 것은 우리가 지금은 죄에 오염된 이 연약한 옛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에 대한 오염과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고통과 슬픔과 눈물과 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문득 문득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의 원리와 그 나라의 질서 속에서 경험되는 말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과 감격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고 이제 곧 그 나라가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 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요 격려인 것입니다.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은 언젠가 오게 될 장소 적이며 공간 적인 좋은 나라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새 나라의 원리와 질서로 살고 있는 우리 교회 안에 이미 시작된 나라를 동시에 상징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공간적, 물질적 개념으로 그리면 안 됩니다. 그 것은 헬라의 공간적 이원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시간적 이원론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그 나라가 오시며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하루 속히 그 하느님의 통치를 기뻐하며 그 나라의 질서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주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지금 이 땅에 이미 임한 영적인 의미의 하느님 나라에 더 강조점을 두고 설명을 하는가 하면 묵시록 21장이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장소 적이며 공간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묵시21:1-2) 1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본문 1절과 2절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고 그 위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 성안에서 우리 성도들이 살게 되는듯한 인상을 받게 되지요? 그건 잘 못된 추측입니다. 정말 성경이 그런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거룩한 새 하늘과 새 땅에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옴으로 해서, 그 거룩한 새 하늘과 새 땅이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의 안과 밖으로 또 다시 거룩이 구분되는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새로운 세계 안에 내려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자체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묵시록 219절과 10절을 보면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신부 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이 장소 적이며 공간적 인 화려한 어떤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교회가 살게 될 곳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나라의 질서와 원리로 살게 될 백성들 자신에게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묵시21:9-10) 9 마지막 일곱 가지 재난이 가득히 담긴 일곱 대접을 손에 든 일곱천사 중 하나가 나에게 와서 '이리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인 그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10 그리고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 가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새로운 하늘의 질서와 하늘 의 원리로 살아갈 수 있는 교회는 스스로의 능력이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느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를 새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할까요?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입니. 왜 예루살렘이 평화의 터전이 되었습니까? 그 예루살렘 안에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성전 자체가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언약궤가 있지요? 바로 그 언약궤가 성전을 성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언약궤가 하느님이 함께 하심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전이 성스러운 곳이 되는 것이고 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평화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난 후 죄인들은 절대 하느님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실패와 실수를 상징하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모세의 십계명 돌 판과, 만나 항아리를 감싸고 있는 어떤 존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인간의 죄악들이 그 존재의 피 아래로 감추어지고 하느님이 그 죄인들과의 평화의 관계를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언약 궤 안에 상징으로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언약 궤 안에 하느님의 함께 하심과 하느님과의 평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들어 있는 곳이 성전이 되는 것이고 그 성전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 ‘평화의 터 전이 되는 것입니다.

왜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지 아시겠지요?

교회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평화롭게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과 평화로운 자들이 된 것이고 이제 그들과 함께 하느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장소 적이며 공간적인 것 보다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다는 증거가 2122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는 구절이 나오지요? 그런데 1119절에 보면 분명 하늘에 성전이 있고 그 성전 안에 언약궤가 보였다고요.

여기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주님과 함께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에 더 초점을 두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하느님과 평화롭게 되고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된 사람들이 이 땅에 있지요?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예루살렘은 분명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언젠가 우리에게 상속으로 주어질 장소 적이며 공간적 인 곳이라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 나라는 너무나 좋을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러한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의 화려함으로 우리에게 기대를 격발 시키고 격려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평화롭게 된 어린양의 신부들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힘을 축적하는 그 삶 속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께만 순종하고 의지하는 그러한 참 행복이 넘치는 곳이라는 것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우리가 이 땅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이 장소 적이며 공간 적인 화려함과 유익함보다 그 새 나라의 질서와 원리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더 초점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분명 이 땅에서 그 새 나라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는 거라는 말이고 그 새 세상이 주는 행복과 감격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만이 그 나라를 희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 하늘의 질서와 원리에 순종하는 삶을 조금이라도 맛보지 못하고 어떻게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희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먹어보지도 못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며 침을 흘릴 수가 있나요? 사람은 절대 미리 경험하거나 맛보지 않은 것 간절히 희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익혀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보자라고 외치 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날에는 전혀 꿈도 못 꾸던 그런 삶, 내가 져 주고, 내가 희생하고, 내가 손해 보아 다른 이들이 이익 을 보는 그런 삶을 한번 살아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미리 조금씩 알아가자는 것 입니다. 그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이용해서 여러분의 소원 성취를 하고 문제 해결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그 나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이 새 하늘과 새 땅까지의 결론이 어떻게 도출이 되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왜 이 천지를 창조하셨는지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존재 중에 특히 살아 있는 존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은 고정 된 것입니까? 아니면 흐르는 양태입니까?

예를 들어 꽃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10분 전의 꽃과 10 분 후의 꽃은 같은 꽃입니까? 아니면 다른 꽃입니까? 본질의 면에서는 같은 꽃이지만 그 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요? 꽃봉오리가 생기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떨어지고 낙엽이 지고 다시 새순이 돋고 꽃은 이렇게 계속해서 자기 존재의 특징을 밖으로 발산을 하고 있습니다.

새도 마찬가지이고 물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살아있는 존재는 모두 다 자기가 가진 고유의 특징을 밖으로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존재라는 것은 본질의 측면에서는 고정된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신성으로 충만하신 존재이십니다. 하느님이라는 존재 역시 하느님 고유의 특징인 그 충만한 신성을 밖으로 발산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 하느님의 신성이, 영광이 밖으로 발산이 되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천지 창조입니다. 꽃이 꽃의 특징을 밖으로 발산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 발산되어 표현되어진 것이 바로 천지 만물인 것입니다.

 

(로마1:20) 20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그 천지 창조라는 것은 하느님의 신성이 밖으로 발산이 되어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과 하느님의 능력과 성품과 지혜가 만물에 입혀지고 그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만물 자체가 하느님의 능력과 성품과 지혜를 그 만물을 통하여 반사하도록 의도되어진 것입니다. 그 것을 찬양이라고 합니다.

찬양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과 성품과 지혜가 만물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것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도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께 찬양을 하고 영광을 돌린다.’ 는 것은 하느님의 성품과 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지 창조의 주인공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지 만물이 하느님을 위해서 지어졌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지 만물은 하느님의 신성의 발산으로 창조되었고 그 신성의 영광을 받아 신성 안에서 하나로 묶여졌으며 그 하나로 묶여진 천지 만물은 그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 다른 말로 찬양하는 것이 바로 천지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조금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태양이 있습니다. 그 태양이라는 본체가 존재하고 그 태양에서는 빛이 발산됩니다. 그 태양에서 발산되는 빛에 의해 천지 만물의 색깔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물체가 갖고 있는 이라는 것은 그 물체가 태양 빛을 받았을 때 태양 빛이 갖고 있는 수많은 색 중에 그 물체가 반사하는 색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라는 것은 곧 태양의 존재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태양이라는 본체가 있고 그 본체에서 발산되는 빛이 있고 그 빛을 반사하는 물체가 있습니다. 그 그림 안에 천지 창조를 가져다 넣어 보십시오.

신성으로 충만하신 하느님이라는 영광의 본체에서 신성이 발산이 됩니다. 그 신성은 만물을 하나로 묶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만물 안에 충만한 신성을 나타내시는 것을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이 성령으로 묶여 있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렇게 성령에 의해 하나로 묶여진 만물에 하느님의 신성이 충만하게 입혀지고 만물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그 충만한 신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 즉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것이 바로 천지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을 때로는 우리의 거룩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이 바로 하느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성경에 언급되는 하느님의 영광은 세 가지로 나뉘어서 언급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 자신 안에 충만히 들어있는 영광이 있지요. 그 것을 신학에서는 본체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본체적 영광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영광을 발산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발산적 영광을 인식한 피조물들의 반응을 효과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하는 역할은 그 발산된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의 발산적 영광에 반응하는 피조물들에게서 나오는 효과적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만물의 머리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生育하고 蕃盛해서 땅에 充滿하라, 땅을 征服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많아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전등이 하나일 때 보다 여러 개가 모이면 그 빛이 더 하듯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들 이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해 지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이 더욱 더 풍성하게 드러나게 되니까요.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해서 그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 안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인간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원래 자기를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이렇게 이기적인 존재가 된 것은 바로 타락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회복이 되고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던 삶에서 내 이웃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만물의 머리가 되어서 그들을 다스리며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는 역할이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모든 만물은 인간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을 때 짐승들한테 자 이름을 지어 줄 테니 둘씩 나와라하니까 모든 짐승들이 거기에 순종했지요?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신성 안에서 통일된 연합의 관계를 유지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자랑해야 할 만물의 통일됨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땅을 저주하십니다. 땅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의 존재의 기반인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모든 만물이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인간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할 짐승들을 비롯한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통일이 되었던 그 질서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인간의 초기 역사는 자연과의 투쟁의 역사다라고까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하느님의 저주가 땅에 떨어지자 세상은 힘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방송 중에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가 있지요? 여러분 정말 그 프로를 보고 있으면 즐거우세요? 치이타가 순록을 쫓아 가서 목을 물어뜯고 내장까지 파먹는 그 장면이 정말 즐거우십니까? 원숭이가 다람쥐를 잡아서 어적어적 씹어 먹는 그런 장면이 정말 즐거우세요?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는 그런 장면이 정말 즐거우세요?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투쟁과 다툼으로 가득 찬 그런 마귀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 천지 만물은 하느님의 영광의 발산으로 창조되었고 그 천지 만물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그 하느님의 영광 앞에 순종하며 그 하느님의 영광을 자랑하고 찬양하던 상태에서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힘을 쌓아 다른 존재들을 밟아버리는 그런 상태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옛 하늘과 옛 땅인 것입니다.

그럼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천지 만물이 하나로 재통일되어서 다시 하느님의 발산적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고 그 분께 순종하며 그 분을 찬양하는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겠지요? 그래서 이사야서에서 그 회복된 땅의 하모니를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다치지 않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곳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다시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만물이 인간의 타락으로 또 저주를 받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영원히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필요한 새 사람들을 창조해 내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절대 타락할 수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 된 것이고 하느님은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교회라는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고 그 안에서 다시 하나로 회복되고 재통일된 피조물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느님만을 찬양하며 사는 모습을 상징으로 보여주시고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페소서에서 敎會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한 몸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신 목적이 하느님 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함이라고 명확하게 記述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만물이 그렇게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 회복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교회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은 이제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타락한 옛 하늘과 옛 땅의 질서와 원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낮아지고 자신이 비워지며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의도된 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들을 生育시키고 번성케 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풍성히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이사43:7) 7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보세요. 이렇게 우리는 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며 그 하느님의 성품과 능력과 지혜에 감탄하며 감격하며 자랑하고 찬양하게 지어진 자들이고 모든 만물이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는 그 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땅에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와 있으며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벌써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에페1:11-14)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14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세요. 이게 바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목적입니다. 분명 장래에 너무나도 눈부신 장소 적 공간 적 개념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거긴 너무나 좋을 거예요. 그러나 그 곳은 환경 적으로 조건적으로 너무나 좋은 곳이어서 우리의 희망이 되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너무나 좋은 곳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좋으신 영광의 하느님을 지금 알고 계시다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처럼 살 수 있습니다.

아니 살아야 합니다. 이미 그 나라가 와 있다고 하는데 왜 그 나라를 못 누리시고 여전히 옛 하늘과 옛 땅의 습관을 쫓아 자신을 학대하고 무지개 같은 헛된 꿈을 쫓아 고단한 삶을 사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자유를 맛보십시오.

오직 하느님만 의뢰하고 하느님께만 순종하며 하느님을 자랑하고 하느님만 찬양하는 그 삶이 얼마나 속편하고 짜릿한 삶인지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하느님의 그 작정과 예정 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은 거저 마시게 하겠다.’고 하시지요? 하느님이 시작하시고 하느님께서 끝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 역사 자체가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느님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 안에서 마귀의 미혹을 쫓아 불타버릴 것들 쫓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며 하느님께 순종하며 하느님을 자랑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내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믿음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존재와 그 땅의 시민으로서의 여러분을 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실 분들이고 지금도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풀 빵 파는 자리 때문에 다투는 그런 유치한 삶을 사실 겁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이 천지 만물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 올 수 있게끔 살아야 하는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지금부터 그 삶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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