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씨앗을 심은 후부터

2000. 4. 28. 오전 11:32:00

글자

철학을 아주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 주신 강사 선생님이 있었어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함께 생각할만한 글을 꼭 칠판에 적어주시곤 했죠. (프린트지 말고 꼭 칠판에요.)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글을 노트에 받아적었어요. 언젠가 이 시를 적어주셨을 때 한 구절 한 구절 적으면서 눈물이 났다가 결국 수업 내내 울다 강의실을 나와야 했던 기억이 나는 군요. 좀 울고 싶은 마음이 들어 꺼내봤어요. 읽을 때마다 빛나는 구절이 새롭게 다가오는 좋은 시입니다. 영화 <길>을 보셨다면 시를 읽는데 도움이 되실 거예요.  언젠가 지구 게시판에 올렸다 지운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이 봄, 다시 올려봅니다.

 

토마토 씨앗을 심은 후부터

-영화 <길>에서의 사랑의 고백

 

 

물오리가 없으면

아가씨가 대신 물오리가 되라고

당신은 말했죠 마을 장터에서

공기총으로 나를 겨냥하면

심장을 엎지르며

나는 죽는 시늉을 했어요

해장국도 끓일 줄 모르고

쓸모없이 나뒹구는 돌처럼

한 때는 심장의 빈 어둠으로사는 것이

온통 지긋지긋했지요

그러나 내가 당신 곁을 떠난다면

누가 당신 공기총을 반짝이도록

닦아줄까요 당신이 코를 골며

잠자고 있는 동안에

나는 들로 나가 토마토를 심었답니다

떠도는 우리들이라

토마토의 수확을 기다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빈 깡통 안에 무심히 떨군

토마토 씨앗 하나가

내 안에서 싹을 틔웠답니다

 

 

토마토 씨앗을 심은 후부터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달라졌어요

어쩌면 내가 토마토를 심은 그 다음부터

우린 마음 속에 토마토 밭을

안고 다니기 시작한지도 모르죠

자, 그러니 이제 당신 마음도

내게 말해보세요

 

-백미혜 시집 <<토마토 씨앗을 심은 후부터>>에서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1지구 모임방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