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2021. 11. 30. 오전 5:38:20

글자

g


가을 편지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다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보는 가을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씨만 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 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을...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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