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시대의 아픔에 참견하는 사람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강연 집「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매우 독특한
지식인 론을 제시한 바 있다.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다."
다소 엉뚱한 이 말은 사실 지식인뿐 아니라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듣게 되는 비난이다.
지배자와 권력자들은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해왔다.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쓸데없이….
신성한 교사가 학생들이나 가르칠 일이지 쓸데없이….
종교인이라면 기도나 열심히 할 일이지 쓸데없이….
노동자가 경제도 어려운데 쓸데없이 왜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는가?
지난 5월 23일 중미 엘살바도르에서 로메로(′Oscar Romero) 대주교에 대한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군부독재와 내전으로 수만 명의 국민이 희생되던 1970년대 후반 로메로 대주교는
매주 강론, 가톨릭 라디오 방송, 주보 등의 매체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고발하고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엘살바도르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주화 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물론 로메로는 교회 안팎으로부터 "쓸데없이 정치에 참견하고"
영혼을 구원해야 할 교회의 영적 사명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마침내 1980년 3월 24일 미사 집전 중에 정부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로메로 주교의 강론 말씀 중 몇 대목을 간추려 본다.
"우리는 임종 시에 영혼을 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구원해야 합니다."(1977. 07.16).
"각 나라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맡은 임무는 각 나라의 개별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만드는 것입니다."(1977. 12.11).
"인간의 생명과 자유와 존엄성이 능욕을 당하는 일은 교회에 진정한 고통을
안겨줍니다."(1977. 12.31).
"아무런 백해도 당하지 않고 세상의 재화들을 공급받으며 특권들을 누리는
교회는 조심하십시오.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1979.03.11.)
"로메로 주교 시복식은 순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시복시성에 관한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신앙 또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죽었을 경우에만 순교자로 인정한다.
로메로 주교의 경우 이 원칙이 바뀌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이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살았던 사람들도 시성이 될 수
있게 되었다." (L. 보프)
9월 순교자의 달이다.
우리 사회는 대체로 <내 집 마련>과 <자녀 교육>밖에 모르는 한심한 상태에
빠져 있다. (송호근).
종교인들 역시 <부와 건강과 가족>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로메로 대주교 시복의 메시지가 간절하다.
우리는 좀 더 시대의 아픔에 참견해야 한다.
-오재선 도비아 신부(광주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