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가끔 교회에서 행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전례에 많이 참석하였고, 특히 미사나 교회행사를 많이 치러보았기 때문에 전례나 의전에 대하여는 비교적 밝은 편입니다. 그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지간히 큰 행사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치러내면서 살았습니다. 국제적인 행사나 회의에 많이 참석해 보았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아주 능숙한 편입니다. 국빈으로 모시는 사람들도 접대를 해 보았고, 외국의 대통령을 모시는 일도 계획해 보았고, 의전에 관해서도 많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행사나 전례에 참석하면 잘못하는 것이 잘하는 것보다 더 많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형식에 너무 치우치다 보니까 가끔 그 형식과 틀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되지 않았는지 생각되고, 내가 전례의 기본 정신에 따라서 살지 아니하고 시늉만 내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행사를 준비하다 보면, 좌석배치가 대단히 신경 쓰이는 부분입니다. 참석하는 귀빈들은 어디에 좌석을 배치하는지 항상 비서들을 보내서 확인하고, 자리가 좋지 않으면, 자리를 바꿔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하고, 정말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눈에 거스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같은 직장 안에서도 누가 서열이 높은지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지고, 규정이나 예규로 서열을 미리 정해놓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테이프 커팅을 할 때도, 행사장에서 사람들을 소개할 때도 그 서열과 신분이나 위격에 맞지 않게 소개한다면 엄청난 질책을 받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자주 주장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신부님들의 서열은 아주 자동적으로 정해져 있어서 서품 연도별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같은 서품 동기일 때는 생년월일이 서열을 정하는데 사용되는 기준입니다. 누가 뭐래도 언제나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답니다. 군인들은 계급으로, 사회에서는 선배와 후배로, 나이로 서열을 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서열을 정하실까 생각해보면 진땀이 난답니다. 세례의 순서로 서열을 정하지 않으실 것이고, 견진을 받은 순서도 또한 아닐 것입니다. 선행을 하고 자랑하는 것으로 정해질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나이도 아닐 것이고, 학식이나 사회적 명성도 아닐 것이며 더구나 신분으로 정하실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 중에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른과 아이에게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순서라기보다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리타분한 유학의 얘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 그 순서와 질서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그래야 한답니다. 먼저 난 사람이 먼저 죽어야 하고, ‘찬물도 손위가 있다.’는 속담처럼 어른을 공경하고, 집안에서도 그런 질서가 있어야 한답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그렇고, 하느님의 법칙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신자들도 그런 것을 지켜야 하고, 성직자들도 그런 것을 지켜야 한답니다. 집에서도 가장에 대한 예우는 당연히 모든 식구들이 지켜야 하고, 그런 속에서 가정이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서와 질서는 밖으로 나타난 것에 치중하면 형식적인 것이 되고,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은 덕(德)이 되는 것입니다.
장유유서의 질서를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가정에서의 형제관계입니다. 물론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은 기본이고. 형제간에 배우는 것이 가장 잘 배우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형제관계가 아주 약해져서 이 질서와 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이런 질서를 가르치기보다는 자식을 위하는데 눈멀어 질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형제간의 관계는 모든 사람이 부모와 형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친구사이에서 이를 다시 보충하여 그 질서를 배우게 되는데 친구(朋友)사이도 장유유서를 배우는데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점차 파괴되고, 부부관계, 부자관계, 사회관계 등 점점 담을 쌓고 살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유유서의 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가 신앙 안에서도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외적인 질서가 아니라 내면적인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질서가 존재하고, 하느님의 법이 존재해서 사람들의 교만과 자만심에서 오는 허례와 허식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라고 주님께서는 재삼 강조하십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외형적인 행동일지라도 모든 예절의 기본입니다. 절하는 것도 자신을 낮추는 것이어서 고개를 깊이 숙여 절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공경을 나타내는 아주 좋은 태도입니다. 우리나라의 큰절은 아주 좋은 예절이며, 큰절을 하면서도 마음으로 존경과 사랑을 품고 있지 않으면 절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군인들이 거수경례를 할 때 자신의 오른 손을 올려서 이마에 올림으로써 자신을 상대방의 무릎 밑으로 내린다는 표현입니다. 서품식에서 수품자들이 부복하는 것도 자신을 낮추는 외적이며 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하고 보상을 바라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비천한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동등해지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정하시는 서열은 나를 얼마나 낮추고,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면서 섬김의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서 그 분의 판단 기준에 따라 서열을 정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가장 높은 사람이고, 내가 가장 살사는 사람 같지만 그분이 정하신 서열로 나는 꼴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다만 빨리 내 서열을 눈치 채고, 서열을 높이기 위해서 지금은 바닥을 기어 오르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 앞에 부복하고 저희의 등급을 조금만이라도 높일 수 있도록 등업 지침을 내려 주소서. 아직도 그 방법을 모르고 있는 저희를 깨우쳐 주소서. 아버지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