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가끔 안일한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반성하기도하고, 고생하면서도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하심에 의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자신을 추스르기도 한답니다. 모든 역경을 이기고 꿋꿋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삶은 너무 안일하고 풍족하며, 게으르고, 허영에 가득 차있고, 정신적으로 병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낀답니다.
7,8년 전에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전경빈 옮김)이라는 책을 읽고 무척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와세다 대학의 재학생일 때 쓴 책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고, 성장하면서 10cm 남짓 자라났답니다. 그런 팔다리로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기며, 대학을 다녔고, 금년 2월에 초등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은 초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한다고 합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 모든 것은 정상이었지만 팔다리가 없는 ‘사지절단’(四肢絶斷)의 몸이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는 애기 엄마에게 비정상적인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황달을 앓고 있다고 한 달이나 떼어놓고, 애기 엄마가 산후 조리를 한 다음 한 달 후에야 모자 상봉을 하게 되었답니다. 병원에서는 애기 아버지와 모든 사람들이 애기를 보고 기절할 엄마를 위해서 병실까지 준비하고 모자상봉을 하게 하였답니다. 그러나 ‘모자 상봉의 순간은 정말 상상 밖이었다고 합니다. “어머 귀여운 우리 아기....” 대성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질 것을 염려한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애기 엄마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답니다. 비록 팔과 다리는 없었지만 배 아파 낳은 아들, 한 달이나 만날 수 없었던 아들을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어머니에게는 무엇보다 더 컸던 것입니다. 애기 엄마는 그 첫 대면을 ’놀라움‘이 아니라 ’기쁨‘이었다고 그는 머리말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대하는 부모님, 선생님, 형제들과 친구들이 그를 정상인과 같이 대하였다는 사실이었고, 그 가장 큰 역할을 한 분은 어머니와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성모 통고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어머니에게 요한을 아들로 여기시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시는 정말 가슴 아픈 장면을 요한 복음사가와 루카 복음사가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오늘을 ‘성모 칠고축일(聖母 七苦祝日)’이라고 했습니다. 축일(祝日)이라고 하면 흔히 축하(祝賀)하고 잔치를 베푸는 경사스러운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은 기념일로 바꿨지만 ‘축(祝)’자는 본래 ‘빌다’, ‘기도하다’, ‘묵상하다’라는 의미랍니다. 그래서 축일이라면 ‘축하하는 날’이라는 뜻보다는 ‘기도하고 묵상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신부님들의 영명축일도 ‘영명을 축하하는 날’이라는 뜻보다는 ‘신부님이 성인신부 되기를 기도하고 묵상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성모 통고 축일’(9월 15일)은 성모님의 모든 고통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꾸어 참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기도하는 날이랍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할 때 흔히 일곱 가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성모님의 고통과 즐거움은 모두 예수님의 고통이며, 처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살 어름판과 같은 그 시대에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모든 고통을 당신의 고통과 아픔으로 간직하신 성모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은 항상 상상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것이랍니다.
1. 이집트로 피난하심(마태 2, 14)
2. 시메온의 예언(루카 2, 35)
3. 예수님을 잃어버림(루카 2, 48)
4. 예수님께서 골고타 갈바리아로 오르심(요한 19, 17)
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심(요한 19, 25)
6.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요한 19, 40)
7. 예수님을 무덤에 묻음(요한 19, 42)
어찌 성모님의 고통을 이렇게 일곱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 아픔을 짐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모님만이 그 깊은 아픔을 간직하셨고 우리는 다만 아주 작은 경험과 느낌으로 체험할 뿐입니다.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고, 세상 구원의 협력자로서 그 고통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만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을 단순하게 느끼기 위해 축일을 제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1. 사실 우리의 삶은 피하고 싶은 고통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나도 매일이 고통스럽고, 빨리 죽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괴롭고 힘들고 서럽고, 육체적으로 병들고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 성모님을 생각했습니다.
2. 성모님도 우리와 같아서 정말 형극(荊棘)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리한 창에 가슴을 찔려 받는 고통 중에서 매일을 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고스란히 가슴에 안고 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느끼는 그런 고통은 뒤로 밀어두고도 말입니다.
3. 성모님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희망을 간직한답니다.
성모님의 고통을 생각하고 우리의 고통을 즐겁고 가볍게 견딜 수 있답니다. 나도 가장 어려웠을 때 성모님을 생각하고 견디며 살았던 기억이 난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고통만 간직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의 기쁨과 즐거움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우리도 고통 중에 있을 때, 성모님께 의지하고, 성모님께서 주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끊임없이 청해야 하겠습니다. 전구하심을 간절히 바라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부속가를 아주 천천히 묵상하시기를 제안합니다.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