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2015. 3. 29.)(마르 11,1-10)

2015. 3. 28. 오후 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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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수난 성지 주일>(2015. 3. 29.)(마르 11,1-10)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나뭇가지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축복한 나뭇가지, 곧 성지(聖枝)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당신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실 곳임을 아십니다.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은 머지않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성주간을 시작합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0<또는 요한 12,12-16>
예수님과 제자들이 1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3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는 거요?’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4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5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6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7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8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10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곡 모음 nwc

 

<예수님을 따라서>     송영진 모세 신부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7-1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아의 나라를, 또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하신 일입니다. 입성 장면을 보면, 마치 어떤 군대의 장군이나 왕이 한 나라를 정복한 다음에 정복자로서 그 나라의 수도로 진군해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모습인데, 예수님의 행렬은 실제로는 아주 작은 규모의 초라한 행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도 그렇게 수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나 시민들에게 당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한 상징적인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지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입성 당시에는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분이고, 세상에 참 평화를 주시는 '평화의 왕'이신 분입니다. (장군들이 타는 말은 전쟁과 교만을 상징합니다.)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가장 작은 차를 타기를 원하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기 위해서이고, 예수님의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직자들에게 작은 차를 타라고 권고하신 것은 가난을 실천하라는 뜻도 있고,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실하게 노동하고, 저축하고, 그래서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고,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세속적인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인생의 목표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성직자들이 가난과 겸손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렇게 살겠다고 공적 서원을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집보다 훨씬 더 좋은 집에서 살면서, 또 보통 사람들이 타는 차보다 훨씬 더 좋은 차를 타면서, 예수님의 겸손과 가난에 대해서 강론을 한다면, 그게 바로 위선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자기들의 겉옷이나 나뭇가지를 깔아 놓은 것은 당시에 왕의 즉위식 때 왕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던 행동을 따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아 놓은 행동을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을 상징하는 행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 표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사제가 입고 있는 사제복, 군인이 입고 있는 군복, 학생이 입고 있는 교복처럼 옷이 신원, 신분, 직업, 계급을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부자들은 비싸고 좋은 명품 옷을 입고 있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그 반대일 것이고...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욕심, 욕망, 이기심 등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전부 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사람들은 그 길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몰랐거나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길이었고, 다시 그 뒤로는 부활과 승천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십자가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부활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십자가를 거부하면 부활과 영생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입니다. 누구에게나 각자 자신의 몫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자기의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지주일의 종려나무가지(Rami Palmae)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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