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지켜야할 가치
공군 대학에 초대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드리면 좋을지는 여러 번 생각했으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목을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한편 과거 유신 시대 때 신문 인터뷰를 청하는 기자들로부터 "이 어두운 시대에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서였고 또 동시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 사회, 우리 자신이 너무나 가치관 혼란 속에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우리는 지금 분명히 시대적으로 어떤 전환기 앞에 서 있습니다. 연대적으로도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곧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WTO(세계 무역 기구)의 시대, 이른바 경제적으로는 국경이 없어지고 완전한 시장 개방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다 우리나라는 이미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이사국이 되었고 또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회원국이 되는 것이 확정되어 있습니다(비록 야당에서 비준을 거부하는 반대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회원국 가입 시기를 다소간 늦출 뿐이지 회원국이 된다는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위상은 그만큼 또 높아졌고 또 그만큼 세계 인류 공동체 안에 우리의 책임이 무거워졌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보면 우리의 정치, 경제는 안정되고 사회는 선진국답게 시민 의식, 질서 의식으로 기틀이 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 중요한 이유는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를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다수가 그런 선진 국민의 의식도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우리가 이 시대의 한국인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어떤 가치관에 살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며 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 저의 느낌입니다. 지난여름에 호주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브리스번에서 또 시드니에서 만난 우리 교포 신자들이 제게 들려준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은 말은 "여기가 지상 낙원입니다."였습니다. 과연 참으로 아름다운 고장이었습니다. 하늘, 땅, 바다, 공기, 다 공해 없이 깨끗하고 맑고 푸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여기가 낙원입니다."라고 한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분들 말이 호주에서(뉴질랜드에서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는 어린이들이랍니다. 그 다음이 장애자, 노약자, 부녀자, 그 다음이 동물, 그리고 남자 이런 순서랍니다. 남자가 맨 끝에 온 것은 남자를 천히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앞선 이 모든 이들을, 동물까지도 아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을 누구보다 먼저 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이 말을 듣고 감동했습니다. 또 응급 환자나 교통사고로 다친 이가 병원에 가면 우선 환자를 치료하고 돈은 그 다음이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우선되고 어린이를 비롯하여 약하고 힘없는 사람, 장애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 동물까지도 그렇게 사랑하고 보호하는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고 한 사회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참으로 훌륭한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비추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같은 가치관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사람이고 동물이고 생명을 가장 아끼지 않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애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응급 환자에 대한 병원의 대처, 모든 것이 아직도 미흡합니다. 또 교통사고로 인한 인명 손실은 세계 최고라고 합니다. 낙태는 150만으로 세계 17위라고 합니다.
세계화 위해 정신적 가치관 정립부터
이런 상태로 세계화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세계화는 무엇을 뜻합니까? 세계화는 기회이면서 도전입니다. 온 세계를 활동 무대로 삼고 한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무한 경쟁 속에서 오직 일등만이 살아남는 무서운 도전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화는 분명히 치열한 경쟁의 장이요 이 경쟁에서 이겨 내는 능력과 기술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로 나라의 힘을 뜻하겠는데 일반적으로 이해되기는 High- Tech, 즉 첨단 기술, 그 밖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실력이 좋고 여러 분야에 대한 노하우(Know-how)를 아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때 그것이 우리나라로 하여금 WTO의 세계, 세계화된 21세기의 선진국 대열에 들게 하는 길이다, 이렇게 이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각 대학들은 이런 요구에 응답하여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나름대로의 대학 발전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줄 압니다. 이곳 공군 대학도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의미의 `세계화' 강조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이 세계화에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가치관 또는 철학이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세계화란 먼저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전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한편으로는 각자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민족이나 인종, 피부 색깔, 빈부의 격차 등 모든 차별을 넘어서 하나 될 때, 모두가 고르게 잘살고 모든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인간으로 존중될 만큼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것이 참된 세계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럽 공동체, 즉 EU(European Union)가 단순히 공동 이해관계 위에 서 있는 것만이 아니고 더 깊이 그 바탕에 공통의 정신문화와 가치관을 전제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그것은 다시 그리스도교적인 문화유산, 인간 존중과 평등, 자유와 우애 등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세계화를 위해서는 세계화에 걸맞은 인간관과 세계관이 필요하고 여기에 기초한 정신적 가치관을 지닌 인재 양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계화에 있어서 참으로 경쟁에서 이기려면 단순히 지적,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우수할 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우수한 인재가 필요합니다. 즉 온 세계 모든 민족과 인종, 인류 전체를 향하여 열려 있는 마음, 모든 이를 사랑하고 품을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고 이런 가치관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거창하지 않더라도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 남을 존중하고 위할 줄 아는 인간, 즉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영어나 외국어 실력이 좋고 국제 감각이 뛰어나고 기술과 여러 분야의 노하우를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정직하고 성실하지 못하다면 이로써는 장기적으로 볼 때 세계화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정직하다. 한국인은 성실하다. 그 때문에 한국인은 믿을 수 있다." 만일 세계인들이 우리 한국인을 이렇게 알고 믿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힘입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인은 친절하고 이웃을 위하고 사랑할 줄 안다." "한국에는 인종 차별이 없다."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야말로 한국은 타고르가 말한 대로 `동방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말인 줄 압니다. 이 이상과 우리의 현실 사이의 괴리는 너무나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세계화 속에서 정말로 선진국 대열에 들려면 이 이상을 우리의 가치관으로 삼아야 합니다.
돈만 알고 인정 없는 남한 사람들
이런 견지에서 오늘의 우리 한국인은 어떠합니까? 정직하고 성실합니까? 매일같이 보도되는 소식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컨대 거의 매일같이 보도되는 가짜 이야기, 또는 큰 백화점에서조차 국산품인데 외국 상표를 붙여서 외제처럼 속여 비싸게 파는 것 등을 비롯하여 고질병 같은 부실 공사, 그로 말미암아 지난 2, 3년간 연이어 일어난 대형 붕괴 사고, 그 밖에 수없이 많은 사기와 공직자 부정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 한국인은 오히려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한 편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섭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언제가 되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서로 언제가 되면 믿고 살 수 있는가?" 이런 개탄과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확정된 후 TV나 신문 등에서 WTO와 월드컵을 앞두고 세계 시민이 되기 위한 우리 한국인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피는 캠페인이 연재된 일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국인들의 교통 무질서, 음주 문화 등 시민 의식은 수준 이하입니다. 또 지난여름 `헤럴드 트리뷴'지의 사설에서는 극동 경제 논평에서 `Far Eastern Economy Review'지의 "한국 부패"라는 기사를 그대로 옮겼는데 거기 따르면 김영삼 정부의 개혁 추진력은 약화되고 공직자 부패는 여전하며, 정치인들은 선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한국인을 지배하는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작년 초에 서울 모 대학 총장님이 저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제가 정확히 옮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분이 한 2년 전에 북경 대학에 초빙 교수로 한 학기 계시는 동안 약 20여 명의 북한 유학생들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비교적 소상히 남한의 발전상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남쪽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북쪽보다 더 잘사는 것도 알고 있으나 동시에 그들이 아는 남쪽 사람들은 돈만 알고 인정이 없으며 심지어 같은 동포임에도 불구하고 연변에서 온 동포들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사람들, 한마디로 수전노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남한 사람들한테 흡수 통일될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남한관은 연변을 통해서 듣는 소식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연변에서 온 동포들은 불법 체류자가 많기 때문에 이 땅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고 서러움과 한을 안고 돌아간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연변 동포들이 보는 우리 남한은 잘살기는 하지만 동포애나 인정 있는 곳은 아닙니다. (이 점은 통일을 바라는 우리로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뿐더러 우리는 타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입니다. 국내 화교, 외국인 노동자, 심지어 혼혈아에 대한 사회의 배타적 태도는 극심합니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 한국인은 배타적인데다 같은 동포로부터 돈만 아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고 동남아에서는 해외여행 중의 한국인 모습이 역시 돈만 알고 이웃도, 예의도 모르는 `추한 한국인'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장입니까? 어느 정도 과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우리를 보아도 이기주의, 물질주의에 젖은 우리 사회, 인간다운 삶의 가치관을 갖지 못한 우리 사회는 더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신문 사설은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논하면서 "외채는 1,000억 달러로 불어나고 수출은 격감하고 있는데 반대로 과소비는 증가만 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입니다.1 (10월 28일 신문에 한국은행 조사 보고로서 제조업 생산성이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하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생산에 일본의 4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투입하고 제조업 1인당 생산액은 일본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근면 성실 등 인간 교육이 첫째 과제
그렇다면 이런 한국인상을 그대로 둔 채 이기주의, 물질주의, 사치와 과소비에 흐르는 한국인을 그대로 둔 채 세계화의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인은 나름대로 임기응변의 순발력이 있어서 단기적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세월이 갈수록 우리 한국인은 세계 속에서 멸시를 받고 소외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물론 우리 한국인의 장점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한국인에게는 밟고 또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잔디처럼 질긴 생명력, 끈기와 저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어려운 환경에 놓여도 그 시련과 고초를 이겨 내고 당당히 일어서는 강인함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일제의 탄압 아래서도 한국인은 목숨을 걸고 독립 투쟁을 꾸준히 하였고 해방 후 오늘에 이르는 세월 동안 6 25 동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인구는 많고 땅은 좁고 부존자원도 없는 악조건을 이겨 내고 오늘 이만큼의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내일도 그런 저력으로 계속 발전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인,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한 한국인, 이런 한국인의 결함, 단점을 고치지 않을 때에는 세계화 속의 경쟁에서 탈락될 위험이 크다는 것도 함께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 깊이 반성하고 참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참된 인간 교육을 받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며 근검절약 할 줄 알고, 3D를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3D를 극복하며 부지런히 일하는 한국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교육은 참으로 그 자체가 본래 중요한 과제이고 우리를 위해서는, 즉 오늘의 한국을 위해서는 모든 것에 앞서는 과제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막가파 이야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 결손 가정에서 불우하게 자랐고 가정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가정에서부터 학교,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공군 대학 총장님이 이 대학에 부임하시면서 이 대학의 모든 이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함께 진리와 정의의 인간, 애국 애족하는 인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 바치는 군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드린 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총장님께서 기도하신 대로 이 대학의 여러분만이 아니라 저 같은 종교인을 포함하여 모든 종교인, 교육자, 언론인 등 우리 모두가 참 인간이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인간관을 확실히 지녀야 합니다. 그러려면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인생에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돈입니까? 입신출세입니까? 사랑입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 하나 없다 하여 누가 목숨을 끊는다면 우리는 동의할 수 있습니까? 건강을 잃었다고 혹은 돈이 없다고 누가 자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동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에는 건강이나 돈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 2년 전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제게 어떤 젊은이가 왔습니다. 인물이 잘생긴 그는 자기소개를 하는데 불행히도 에이즈 환자였습니다. 저를 찾아온 이유는 자기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환자이고 그 때문에 이제 세상의 희망은 아무 것도 없지만 다른 이들을 에이즈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몇몇 에이즈 환자들과 함께 자신들이 왜 에이즈에 걸렸는지 수기를 썼으니 그 책에 서문을 좀 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그 청에 응했습니다. `벼랑에 선 사람들'이라는 책 이름으로 얼마 전에 출판되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다 아시는 바대로 에이즈는 무서운 병입니다. 모든 희망을 앗아 가는 절망입니다. 이 병에 걸렸다 하면 사람들로부터는 멸시와 두려움 때문에 소외되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절망을 극복하고 남을 위해 일어선 것입니다. 인생에는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아직도 이룩해야 할 무엇인가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저는 이 청년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말을 듣고 아직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또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1988년 올림픽이 있은 그 해 가을에 장애자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이 장애자 올림픽 때 캐니라는 캐나다 출신 젊은이가 있었지요. 머리와 가슴만 남은 것 같은 그런 장애자였습니다. 그 젊은이는 장애자로서 세상에서 출세하여 부귀영화와 향락을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보여 준 인생은 참으로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남을 위해 기쁘게 봉사하였습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장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입니까? 그 젊은이는 비록 육신으로는 거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생명이 있고 의식이 있는 한 아직도 값지게 살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감동 깊게 보여 주었습니다. 저 유명한 3중고의 장애자 헬렌 켈러도 같습니다. 그럼 인생에 있어서 비록 건강, 돈, 명예, 지위 등 세상에서 정상인으로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잃어도 아직도 인간과 인생을 값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생명보다 더한 가치
성경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자기 목숨,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참으로 생명은 아주 소중합니다. 생명을 잃으면 세상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떤 생명입니까? 단순한 육신 생명입니까? 육신 생명도 생명으로서 분명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여러분 군인처럼 나라를 위하여 또는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혹은 이웃을 구하는 사랑을 위하여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진리와 정의, 또는 나라를 위하는 대의를 위하여 또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또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들이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의 순교 선열들이 그런 분이십니다.) 이를 보면 육신 생명이 소중하지만 우리 각자의 인생에는 그보다 높은 가치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는 무엇인가? (아우슈비츠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이 능력이 있다는 것은 많은 이가 증언했습니다.) "그럼 육신 생명까지 잃어도 아직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 하고 더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본 바대로 정의로운 인간, 진리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더 인간답습니다. 그런 인간의 삶이 더 참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던져진 질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많은 고민과 탐구를 하였습니다. 특히 철학은, 동양 철학보다 서양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로부터 오늘의 실존 철학에 이르기까지 이 질문을 거듭거듭 던지고 그 답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무엇이다? 라고 확실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 비하여 우리 동양 철학은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본 일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이 정의가 오랫동안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정의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인간의 진리를 다 말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17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에게는 자신을 의식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 점에 있어서는 우주보다도 더 위대하나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없이 나약하다, 이런 인간의 양면성을 말한 것이지 인간 본질을 정의한 말은 아닙니다. 어떻든 인간에 대한 탐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철학뿐 아니라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 의학 등 여러 가지 학문을 통하여 또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이 무엇인지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인간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분명히 그 육신으로 보면 다른 물질과 똑같이 물질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은 곧 원자로써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물체는 물론 아니요 단순한 생물도 아니며 동물만도 아니요 이 모든 것과 유대를 가지면서도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정신적, 영적 존재입니다. 정신과 영은 한편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면서도 과학적 연구 방법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양심과 양심의 소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도덕률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가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도덕률이 있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인간을 오늘날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학문으로 온갖 각도에서 연구하고 연구했지만 아직도 인간은 무엇이냐에 대한 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참된 과학자들은 겸허해져서 인간의 신비 앞에 어떤 경외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과학적 탐구보다도 초월적 조명으로써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신비가 있습니다.
인간 존엄과 평등은 하느님에 근거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지각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그가 누구이든 어떻게 생겼든 잘났든 못났든 불구자든 천치 바보든 인간인 한 신성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녔다는 것을 거의 대부분의 인류 사회가 인정합니다. 나라의 권력도 침해할 수 없는 것 또한 인정합니다. 신앙인은 물론이요 불신앙인, 무신론자, 유물론자들까지도 인간 존엄성을 인정합니다. 적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이 존엄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평등과 인간의 기본 권리, 자유를 헌법에 명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헌법 제 9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또 제10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엄성이나 평등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학문으로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인간에겐 그가 아무리 못 생겼을지라도 이런 존엄성이 있다는 것입니까? 법률이 그렇게 말해서 존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법 이전의 천부적인 것입니다. 천부적인 존엄성을 법이 천명하였을 뿐입니다. 평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 것은, 법 이전에 인간은 천부적으로 존엄하고 그러므로 평등하다는 것을 밝힌 것뿐입니다. `천부적인 것' 곧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이 존엄성과 평등은 사실상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인정할 때에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인간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인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배제하면 우리는 끝내 인간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 때문에 총장님은 기도문에서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을 가장 보배로운 가치로 삼고"라고 하셨습니다. ("신학은 신, 곧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면서 바로 그 때문에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특히 존엄성과 관계하여 성경의 말씀을 요약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이 인간을 한 없이 사랑하신다." "또한 그 사랑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영원히 살리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성경 말씀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을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합니다. 이 같은 내용을 일반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구체적이요 현실적인 일로 받아들일 때, 즉 하느님이 나를 현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즉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못났다 하더라도 그런 나를 `여기서 지금(Hic et nunc)'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식할 때, 인간 존엄성과 평등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빼면 인간이 존엄할 이유도 평등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 존엄합니까? 어떤 분은 인간 존엄의 근거를 지성에 둘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성의 능력을 잃은 천치 바보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더구나 병으로 식물인간이 되었으면 더욱이 존엄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미 만인 평등은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느님은 그를 어떤 처지에 있든 버리지 않으신다. 그 때문에 존엄하고 또한 평등하다." 이렇게 해석해야 타당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 평등, 박애는 실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한 존엄성 때문입니다. 자유를 봅시다. 자유는 무엇입니까? 자유는 선택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자유는 우리가 항상 참된 의미로 선을 선택해야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악을 선택하면 인간은 계속 그 악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고 맙니다.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자유는 궁극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도 자유 없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하느님의 그 사랑에 인간이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과 사랑 속에 결합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모든 선한 것, 진리, 정의를 사랑하면서 완성되기 위해서입니다. 그중에서도 같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평등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이 평등합니다. 인간의 현실을 보면 너무나 차이가 많습니다. 인종, 국적, 피부색의 차이도 있고 남녀의 차이도 있고 지능의 차이, 빈부의 차이 그 어느 것으로도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평등한 것은 모든 인간이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이것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박애는 어떻습니까? 이 말은 본시 Fraternit 입니다. 곧 형제애입니다. "어떻게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될 수 있는가? 흑인과 백인이 어떻게 형제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참으로 하나이신 하느님을 모든 이의 아버지로 인정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모두가 아버지로 믿고 인간 서로는 서로 존경하고 형제와 같이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이 서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
그러나 어떤 분은 "하느님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인생에 고통이 있느냐? 때때로 아무 죄 없는 사람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가 있는데 하느님이 계시다면 사랑하신다면 왜 그런 일이 있도록 허락하느냐?"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 반론에 대해서 제가 이 자리에서 속 시원한 답을 금방 드리기 어렵습니다. 저는 가끔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밖에 기다릴 수 없는 이들을 방문합니다. 어떤 때는 저 역시 "왜 하필 이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왜 있는지, 또 왜 하필이면 죄 없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한다 하여 하느님은 없다고 부인해 버리면 그야말로 그 고통과 고통 속의 인생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립니다. 인생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고통에 대해 설명이 안 되더라도 하느님이 있으면 왜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느냐고 넋두리라도 할 수 있고 불평, 불만, 항의라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많은 경우에 직접 체험도 하고 목격하듯이,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인생을 보다 깊이 살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선은 고통과 수고를 통해서 이룩됩니다. 고통 없는 인생, 아주 좋은 것 같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인생이 깊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고통을 모르면서 자란 사람들은-경우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으나-남의 사정, 남의 고통을 이해할 줄 모릅니다. 이에 비해 많은 고통을 겪고 산전 수전 다 겪은 사람은 특히 신앙 속에서 겪은 사람은 참으로 인생을 깊이 살 줄 알고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줄 압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은 하느님의 은혜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인생의 문제를 보아 왔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볼 때에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은 생명을 위해 생명은 영을 위해 영은 하느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창조의 힘에 의한 200억 년에 가까운 우주의 생성 발전은 생명을 낳기 위해서, 생명체의 발전은 의식을 가진 인간을 낳기 위해서, 그리고 이 인간은 하느님과 결합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이면서도 정신적, 영적 존재인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죽고 썩음으로 물질로 환원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 향해 가기 위해서, 영원하고 무한하시며 진선미 자체이신 하느님, 참 생명이요 빛이신 하느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미래는 참으로 위대하고 원대합니다. 그 때문에 모든 인간은 존엄합니다. 인간에게 이런 본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심리를 들여다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영원과 무한, 진선미와 완전한 사랑과 불멸의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물적 존재이기에 음식도 필요합니다. 공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진리, 정의, 사랑 등 정신적 빵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 무한하고 영원해야 합니다. 무한하고 영원한 것, 이는 곧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음식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 향하여 만드셨으니 당신께 가서 쉬기까지는 영원히 평안치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사랑이다
그럼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이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누구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이웃을, 특히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 약한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이 두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인생의 길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도 어느 날 사람을 모든 것에 앞서 존중하고 어린이, 장애자, 노약자, 부녀자, 동물을 사랑할 줄 아는 지상 낙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거리에서는 보행자를 앞세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오늘 이 시대에 한국의 정치인, 경제인, 지성인들이 이런 인간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이런 인간관을 기초로 한 생활 가치관을 교육을 통해 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언론이 이런 인간관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목탁의 역할을 한다면 하는 소망 또한 큽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랑을 살 때 우리는 참으로 세계인이 되고 한국은 세계에서 빛나는 큰 나라가 되며, 통일도 그 힘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996. 10. 31. 공군 대학)
1) `동아 일보' 1996년 10월 29일자 "횡설수설":
우리나라 국민 총생산 규모는 세계 12위 수준이고 1인당 국민 소득은 1만 달러를 넘었다고 해도 세계 32위에 머물러 있다. 한마디로 한국은 부자 나라도 아니고 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결코 잘사는 국민이 아니다. 더구나 최근 경제가 큰 어려움에 부딪쳐 성장, 국제 수지, 물가, 외채 어느 것 하나 걱정되지 않는 것이 없다. 내년 경기 전망도 암울하기 짝이 없다. 이 같은 실정에서 지난 5년간 우리나라 가계 소비 지출 증가율은 연평균 13.6퍼센트로 일본의 1.1퍼센트에 비해 무려 12배에 이르고 있다. 국민 은행이 91-95년 5년간 한국의 도시 가계 연보와 일본 가계 조사 연보를 조사, 발표한 한일 가계의 소비 지출 행태 비교 자료 분석 결과다. 물론 경제가 성숙 단계에 접어든 일본과 소비 지출 증가율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긴 하지만 소비 지출 증가율이 GNP 성장률을 크게 웃돌며 두 자리 수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 소비 구조면에서도 한국은 기본적 소비 지출보다는 자가용 고급화에 따른 차량 구입비와 유지비, 그리고 외식비 유흥 오락비 등 선택적 소비 지출의 증가율이 두드러진다. 가는 곳마다 먹자골목이 번성하고 있는 것만 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고소득층이 소비 지출 증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소비 구조의 전형이다. 한국의 현시적 과소비 풍조는 70년대 개발 과정과 80년대 부동산 붐을 타고 엄청난 불로 소득을 챙긴 졸부들이 앞장서 부추긴 데서 비롯됐다. 90년대는 이 같은 소비 구조가 중산층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소득은 개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큰 것, 비싼 것, 화려한 것만 찾는 과소비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 같은 과소비 풍조를 바로잡지 않고는 경제 회생이나 선진국 따라잡기는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