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2005. 9. 6. 오후 4: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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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안고듬티' 산골의 초가을 풍경
  이승철(seung812) 기자   
가을도 산골마을에는 더 은밀하게 찾아든다. 너무 조용하여 적적하기까지 한 산골마을에는 계절의 변화마저도 소음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떠나버리고 노인들의 차지가 된 마을은 고즈넉한 적막감에 싸여 있지만 가을은 잊지 않고 조용히 숨어들어 가을 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 농가의 마당가에서 꽃피운 백일홍 위에 앉은 검은나비
ⓒ2005 이승철
9월의 초하룻날 충남 청양군에 있는 작은 산골마을 안고듬티의 밤은 댓돌 밑의 귀뚜라미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 뒤뜰의 장독대 밑에서 여치와 함께 찌르르거리던 귀뚜라미가 새벽녘이 되자 창문가로 다가와 하소연이라도 하듯 하룻밤 길손을 잠 못 들게 하였던 것이다.

밝아오는 여명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여니 마당가에 높직하게 서 있는 가죽나무에서 휘파람새 한 마리가 호르륵 호르륵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 그러자 잠시 후 개울 건너 밤나무 동산에서 다른 휘파람새 한 마리가 화답이라도 하듯 호르륵 노래를 받아준다. 그들 두 마리 휘파람새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노래에 취해 있다가 사립문을 나섰다.

▲ 벼 잎 위의 작은 청개구리와 이슬
ⓒ2005 이승철
동구 밖으로 나서니 느티나무길 길섶의 잡초와 논과 밭의 벼이삭이며 콩잎이 이슬에 젖어 싱그러운 모습이다. 곧 동쪽 산 위로 붉은 태양이 불쑥 솟아오르자 벼 잎 위의 이슬방울들은 구슬처럼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고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이나 작은 새끼청개구리 한 마리가 역시 이슬처럼 벼 잎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앙증맞기 짝이 없다.

그런데 청개구리 이 녀석 카메라를 바짝 들이밀어도 전혀 반응이 없이 눈만 한번 감았다 뜨는 것이 꼭 잠에 취해 있는 모습이다. 아니면 풀벌레들의 가을노래에 취하였던가. 그러다가 카메라가 건드린 벼이삭 때문에 이슬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자 작은 다리를 움직여 한걸음 다가서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치 '아저씨 누구세요?'하는 것처럼.

그 사이 태양은 어느새 산위로 두 뼘은 더 됨직 하게 올라와 있었다. 벌써 아침을 먹었는지 할아버지 한 분이 자루를 들고 밤나무 산으로 오른다. 뒤따라 올라가니 밤나무 밑에 알밤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나무 가지에는 토실한 밤송이들이 탐스럽게 열려있다. 어떤 밤송이는 금방이라도 툭 벌어져 터질 것 같은 모습이다.

▲ 벌어진 밤송이
ⓒ2005 이승철

▲ 농가의 처마밑에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마늘
ⓒ2005 이승철

▲ 고샅길 돌담장엔 호박덩굴이
ⓒ2005 이승철
밤송이를 줍던 노인이 내게도 주우라고 눈짓을 한다. 몇 개를 주워 노인의 자루에 담으려고 하니 그냥 가져가란다. 이곳에서 나는 밤은 맛좋기로 소문난 공주 밤이다. 노인들이 애써 가꾼 알밤을 그냥 주워오기가 마음이 편치 않아 두어 개만 주워들고 산을 내려왔다.

마을 안길에서도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마당가에서 졸고 있던 강아지가 낯선 길손을 보고 몇 번 짖다가 그냥 꼬리를 흔들 뿐이다. 옛날에는 30여 호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정답게 살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20여 호에 30-40명의 노인들이 주로 사는 마을이 되어 조용한 정적만 감도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 살다가 떠난 집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노인이 혼자 사는 집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노인과 젊은 부부, 손자손녀들이 시끌벅적하던 넓은 마당은 콩밭이 되고 고추가 주렁주렁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사랑채는 그대로 흉가처럼 방치되어 쥐들이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았고 송아지가 매어있던 외양간도, 돼지우리도 썰렁하게 텅 빈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집집마다 처마 밑에는 주렁주렁 엮은 마늘이 매달려 있고 마당가와 장독대 옆에는 예외 없이 백일홍 몇 그루가 지난 여름부터 줄기차게 꽃을 피워 벌과 나비들을 불러 모아 할머니들의 말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청양지방의 특산문은 구기자다. 이 마을에서도 옛날에는 구기자를 많이 재배했다고 하는데 일손이 모자라 대부분 다른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밭두렁 가에 몇 그루씩 남아 있는 구기자나무들이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 고추밭이나 콩밭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 팥은 아직 꽃이 한창입니다.
ⓒ2005 이승철

▲ 마을안 공터 비닐하우스에서는 빨간 고추가 말라가고
ⓒ2005 이승철
유난히 과일나무들이 많았던 이 마을에는 지금도 여전히 감나무며 대추나무가 담장 옆이나 콩밭, 고추밭 가장자리마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호두나무는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원인을 물으니 호두열매가 조금씩 익어갈 무렵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나무마다 청설모들이 달려들어 날마다 따가는 바람에 한 개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이제 호두는 청설모들에게 주기로 하고 포기한 상태라고 담담하게 웃는다.

그래도 마을의 텃밭들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힘없는 노인들이 알뜰살뜰 가꾸었기 때문이리라. 등산길에서 자주 보았던 산죽처럼 생긴 작물은 생강이라고 한다. 농한기에 몸보신용으로 가꾸는 황기는 싸리나무처럼 생긴 모습에 작은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뜨거운 열기 속에 빨간 고추들이 말라가고 층층이 다락 논에는 어느새 고개 숙인 벼들이 누렇게 익어 가는데 이제서 노랗게 꽃을 피운 팥은 언제 열매를 맺으려는지….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걸터앉으니 밤 삶는 냄새가 입맛을 돋운다. 산책이 길어져 늦은 아침은 콩밭에서 자란 열무김치와 먹었다. 밥맛이 꿀맛이다. 아무래도 체중이 조금은 더 늘 것 같은 예감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산골마을 안고듬티의 초가을은 모처럼 찾은 길손의 마음까지 살찌우는 것 같았다.

▲ 콩밭이 있는 마을풍경
ⓒ2005 이승철

▲ 장독대와 백일홍
ⓒ2005 이승철

매미들의 합창이 / 잦아들면서
이슬 젖은 풀 섶에선 / 구슬픈 풀벌레 소리

쨍그랑 갈라질 듯 / 짙푸른 하늘 멀리
흰 구름 두둥실 / 그리움처럼 떠오르면

멀리 보이던 푸른 산이 /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가는 여름을 / 아쉬움으로 배웅하고

갈대숲을 헤집는 바람 / 추억 한 자락 끌고 와
눈시울 아롱아롱 / 보고 싶은 옛사랑이여

사립문 넘어 들어온 달빛이 / 토방 밑에 서성이고
소쩍새 애끓는 울음소리 / 별빛도 이슬에 젖는 밤

봉창을 두드리는 / 가녀린 달그림자에
노부부도 잠 못 이루고 / 한숨으로 뒤척일 때

멀리 산마을의 / 아련한 개 짖는 소리
이 밤 그대도 잠 못 이루고 / 추억 속을 헤매이는가.

-본인의 시 <초가을> 전문-


▲ 대추도 익어갑니다.
ⓒ2005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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