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5

2006. 11. 5. 오전 8:45:16

글자
실크로드 -- 5 (돈황 막고굴)

    10월 3일 (화) 아침
     돈황 막고굴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하여 소식 전할까 

                        (혜초)
 
위의 사진은 우리가 묵은 돈황산장 옥상에서 명사산의 해돋이를 기다리며 찍은 사진이다. 가이드가 시간이 없다며 독촉을 해, 해 맞이는 하지 못 했다. 녀석의 면상을 낙타 발바닥으로 그냥..... 물론 상기 글중 계림은 신라를 뜻한다. 6시 기상, 식사 7시, 출발 8시. (이 시간표는 연속 3일간 계속되어 피로가 누적 되었다.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중국의 연휴와 맞물려 관광지마다 중국인들이 넘쳐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인 듯했다) 덕분에 주차장에 도착하니 텅 비어 있었다. 동굴들은 명사산의 끝자락을 흐르는 작으마한 강물로 침식된 절벽에 보통 3개 층으로 되어 있다. 원래가 이곳 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건축재료가 없어 흙에 풀잎등을 섞어 만든 벽돌을 쌓아 거주하고 있는데, 살인 적인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많은 곳에서 절벽에 간단히 굴을 뚫고 활용하고 있는 것을 아직도 여기 저기서 볼수 있다. 옛도시의 형성이 전적으로 샘솟아 흐르는 水量의 양에 의존되어 그에 맞는 인구가 살수 있는 도시나 촌락등이 형성되다가 물이 마르면 흙벽돌집을 방치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다시 흙으로 간이 집을 짓고 살았을텐데, 서로의 터전을 지키려는 가족, 혹은 부족들과 생존을 건 전쟁도 벌어졌을 것이다. 불교(혹은 기타 다른 교)의 전파 통로인 이곳은 오아시스의 장점과, 그로 인한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것을 계기로 자연스레 휴식겸 도량 연마, 그리고 소원성취나 득도의 목적으로 동굴을 팠으리라.
앞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백양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절벽을 따라 아직 개발되지 않은 동굴들이 보인다. 막고굴의 원래 모습도 이랬었을까?
 
       돈황이란..?

     만리장성 끝을 넘어 존재하는 
     일년 강우량 37밀리미터에 증발량 2500밀리미터인 
     아주 건조한 중국의 서북 쪽 고비사막 안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서양과 통하는 길목으로, 
     대상행렬이 쓸쓸한 방울소리 울리며 서역의 고행길로 떠나가고 
     서역에서 물건을 싣고 온 대상들이 험란한 여행을 마치고 
     중국 땅으로 들어서서 지친 몸을 쉬게 하는 곳,

     실제로 실크로드에 있어 돈황은 중국땅의 시작이자 끝 지점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히말라야산맥을 넘지 못하고 멀리 돌아서 
     중국서역을 따라 전래되어 왔기 때문에 불교 유적지로 유명하다.
 
     특히 실크로드상에 놓여 있는 동서무역의 요충지로서 
     불교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 및 문화의 교류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교유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니교, 조로아스타교, 이스람교 
     심지어는 기독교의 유적도 남아 있다한다 



     당말 송대에 들어오면서 경제의 중심이 장강 이남으로 이동해 가고 
     대표적인 무역품이 비단에서 도자기류로 대체됨에 따라 
     안전한 운송을 위해 해로를 이용하면서 
     육로 실크로드가 점차 쇠퇴했고 

     이후 명나라 때에는 서쪽 국경을 가욕관까지로 삼아 
     돈황지역에 있던 한족들을 모두 가욕관 경내로 이주시키고 
     국경을 봉쇄했기 때문에 돈황은 4-5백년간 버려진 땅이 되었다. 



     청나라때는 돈황을 회복하여 다시 한족들이 이주해 왔지만 
     이미 육로 실크로드가 무역로의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돈황은 사람들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렇게 세상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있던 돈황에서 
     1900년 우연한 기회에 엄청난 분량의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다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 했으나, 

     연이은 내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다시 어둠속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야 서북 공정과 맞물려 귀한 대접를 받기 시작하며.
     많은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발췌했음)
  
막고굴은 굴마다 불상의 형태나 벽화의 내용이 다르다. 회화적인 것, 건축물의 그림, 나신의 비천녀, 그러나 어두운 동굴의 천장과 벽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정밀하고 기하학적인 그림들에는 한결같이 어떤 종교적 고행과 의미가 느껴진다. 막고굴 내에서는 일체의 사진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보는 느낌은 상상 이상의 놀라움을 선사한다. 섬세하게 그려 넣은 벽화가 있는 자그마한 동굴 단 하나만 학술적으로 연구한다고 해도 많은 시간과 인원이 소요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종교적 신념 만으로는 만들 수가 없고, 권력층이나 부유층(특히 당나라 시대때)의 스폰서를 받은 전문적인 장인들의 집단이 이루어 낸 것들이 많을 듯 싶다. 우리가 본 것은 7-8개 정도 되는 듯 한데, 점점 늘어나는 현지 관광객들로 인해 좁은 통로에 정체 현상이 생기고, 굴 속에는 많은 발걸음으로 인한 묵은 먼지가 흩날렸다. 혜초 스님의 느낌을 짐작하기조차 불가능하다. 유적의 보존상 먼지 제거도 어렵다고 한다. 중국인 가이드는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과 중국에는 없었다는 한국식 "장고(혹은 장구?)"가 그려있는 동굴에선 보다 목청을 높여 설명하긴 하지만 서툰 한국말 때문에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존을 위해선 개방을 일체 금지해야 한다며 침을 튀기지만, 현지인의 생업을 위한 엄청난 관광 수입 때문에 몇개 동굴을 선택해 순환하며 개방한다고..
가장 큰 불상을 덮고 있는 7층 탑의 정면과 측면 실크로드를 따라 건조한 기후덕택에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동굴 지역들이 많지만 유난히 이곳이 주목 받는 것은 동굴의 규모와 크기, 접근성, 보존 상태등.. 뭐니뭐니해도 막대한 양의 돈황문서(물론 많은 양이 유럽의 박물관에 유출되었지만..)때문인데 중국인 가이드가 당시의 외국 도굴꾼및 밀반출자에게 나뿐놈. 도둑놈. 강도(이때는 발음들이 매우 정확했다)등의 욕을 곱배기로 해 댔다. 그러나 이미 문서들이 노출되어 있었던 당시 그들이 선진기법으로 안전하게 보관한 공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이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나 이교도들에게 노출되면 순식간에 초토화가 될 수 있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대체적인 동굴의 정면 모습. 보존과 통행을 위해 모두 보완했다. 동굴속의 탁한 곰팡이 섞인 듯한 흙냄세와 수많은 인파, 그리고 제법 많이 걷는 바람에 어제의 낙타발바닥 요리도 효과가 없는 듯 모두들 피곤해 한다. 이렇게 실크 로드의 백미인 돈황 관광은 끝을 맺었다. 10월 3일 (화) 오후 하미(하밀) 버스 이동 버스가 하밀을 향해 달려간다. 하늘과 맞 닿아 있는 지평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혀있는 왕복 2차선 312번 도로표시판엔 상해부터 3천 몇백km라고 적혀 있다. 기사가 운전을 하며 파리채로 파리를 잡고 있다. 졸음 방지를 위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호기심으로 시작해, 몸살 날 지경인 차창밖 사막 경치를 보며 하밀로 가는 중이다. 종종 저 멀리 신기루가 보였지만 눈만의 착각인 듯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홀로 걷는 사람을 보는 것도 대단한 이야기 거리가 되는 되는 참이다. 주변에 민가도 없는데.. 봇짐을 메고 어디로 행하는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토론과 논쟁을 하였다. ............ 그 외엔 다른 할 일도 없었으니까.... 서쪽으로 달려 가면서 험한 산고개도 넘어 가는데.... 저 멀리 만년설이 쌓인 높은 산들이 천산 산맥의 시작임을 알려준다.
엊그제 타고온 기차길을 기차가 달려간다. 볼거리 찾기에 혈안인 우리에겐 조그만 변화도 큰 위안이 된다. 어두워져서야 하밀시에 닿으니 거진 7시간 동안 황량 자체에서 미를 찾는다며 얼마나 심신이 피로 했는지... 모처럼 공업지역같은 활기를 느낄수 있었으나 피로가 누적되어 식사후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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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글.좋은영상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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