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가끔씩 세례 받을 때의 순간을 기억해내어
그때의 마음을 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왜 세례를 받았는가?
나는 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가?
세례를 받을 때 나는 어떤 마음을 가졌으며 그 마음은 지금 어디 있는가?
세례를 받을 때 나는 - 의식을 했던 하지 못했던 -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내 몸에 부으며 세상을 살기로 작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이를 -
설사 그가 나의 원수라 하더라도,
나를 박해하는 자라 하더라도,
나를 저주하는 자라 하더라도 -
하느님 대하듯 하면서 이 세상을 살기로 작심하였다.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백성)로 대하며 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 나의 잘못인지 내가 속한 종교의 잘못인지 모르겠지만 -
세례를 받는 순간
나는 세례 받은 자만이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리스도교는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종교로 여기며
세례 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다.
세례는 나에게 우월감을 심어주었고,
그런 식으로 나는 그리스도교에 속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
우리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내 종교에 속한 분이 되었다.
나는 점점
하느님이 만민의 하느님이며
모든 민족 모든 겨레가 주님을 찬미한다(시편 117,1)는 사실을 잊고
그렇게 또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었다.
하느님 나라가 모든 이 안에 와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나는 점점 배타적인 인간이 되는 모순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하시면서
곧이어 “회개하라.” 하신 말씀을 잊었다.
그리하여 내 편리한 대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생각을 바꾸어 복음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복음을 내 생각 속에 가두었다.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고 믿는 것은
하느님은 내 안에만,
나와 같은 언어와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안에,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문화를 달리 형성한 사람들 안에도
이미 와 계심을 믿는 것인데
나는 그러지를 못하였다.
다른 민족 안에도 하느님이 와 계심을 믿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것인데
나는 그러지를 못하고
오히려 다른 생각과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들에게
배타적으로 구는
모순된 행위를 보여 왔다.
왜 나는 이사야가 한 말을 깨닫지 못했을까?
“나(야훼)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이사 66,18-19)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언어와 종족과 종교를 떠나 모든 민족들을 모으기 위하여 오셨는데,
우리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도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그들 모두도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을 영광을 알리는데
왜 나는 이를 깨닫지 못했을까?
너무 쉽게 내 편리한대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내게 유리한대로 하느님을 믿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4-29)
그들은 자신들을 선택된 민족의 일원으로 여기며
이미 하늘나라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던 자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문 밖에 세워놓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자 그들이 당황하여 주님께 말한다.
“주님, 저희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희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저희는 당신의 식탁에서 같이 먹고 마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들었고
당신께 신앙을 고백하며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전하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선교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모르신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저희가 문 밖에 서 있어야 합니까?
문을 열어 주십시오.
저희들입니다.
들여보내주십시오.”
그런데 그 말이 주님께 안 통한다.
모든 이 안에 하느님이 와 계신다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대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를 선민의 방편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배타적이었다.
자기 주변에 울타리를 쳐 놓고는
그 안에 그들만의 천국 문을 크게 만들어 놓고 쉽게 신앙하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위선자, 눈먼 자라 비판하셨다.
위선자란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말을 하지만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 자이다.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하면서 그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잠그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면서
사람들을 그들과 같은 배타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그들은 온 세상을
위선과 눈멂으로 불행하게 한다.(마태 23,13-22)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임을 깨달은 자는
남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임을 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기에 그는 자기가 세례 받은 일을 내세워 남을 차별하지 않는다.
믿음과 세례가 남을 차별하는 기준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믿음과 세례를 강조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백성)임을 깨닫고
그렇게 서로를 대하며 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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