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히브리서 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복음 마르코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어제 트위터(twitter)를 보던 중, 유명 연예인이 말했던 글 하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자랄 땐 좀 모자란 친구가 있으면 놀 때 ‘깍두기’라며 끼워 주고 함께 놀았다. 승리의 기쁨은 함께 나눴지만 패배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이런 아이를 ‘왕따’라고 부른다.”
크게 와 닿는 말이었습니다. 저 어렸을 때 어떤 놀이를 할 때 깍두기는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깍두기가 못한다고 해서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깍두기는 승부에 있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놀이를 잘 못하는 친구라 할지라도 모두가 함께 어울려 놀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승부 자체가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승리를 위해서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이 사회에 ‘왕따’라는 존재가 생겨난 것이 아닐까요?
잘 하는 것과 잘 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 그 차이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 차이가 상당한 것 같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 차이가 얼마나 있을까요? 하나같이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서로 하나가 되어 어울려 사는 것.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나보다 못한다는 이유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소외시킨다면 결국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차별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약자의 편에 서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는 세관에 있는 사람으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세금은 모두 로마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세금을 걷는 사람은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매국노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걷는 화폐가 로마의 돈인데, 그 돈에는 로마 황제의 모습이 담겨 있어 그 돈을 만지는 사람은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동족들로부터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세리들과 그리고 당시에 죄인이라는 평가를 받던 병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차별받지 말아야 하며,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의 이웃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더 이상 차별과 소외를 받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헛되이 보낸 날들은 웃지 않았던 날들이다.(샹포르)
명품, 좋아하세요?(손명찬, ‘꽃단배 떠가네’ 중에서)
2억원을 호가하는 시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속이 박혀 있기도 하지만 비싼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시계를 만든 스위스의 명장은 두 달에 한 개꼴로 작업하며, 일 년에 여섯 개 이상은 못 만든다는군요.
시대의 명품들에서 공통점을 봅니다. 당당한 브랜드 이름, 희소가치, 부여된 의미, 비싼 가격입니다. 그러고 보니 명품도 무언가를 닮았습니다. 분명합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당당한 브랜드 이름 - 이 얼굴로 생긴 사람 중에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이름.
희소가치 -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증하는 작품 중의 작품(전화로도 부모님께 바로 확인 가능. “그럼 내 새끼가 어떤 새낀데!”
부여된 의미 -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중심. 마지막으로.
비싼 가격 - 최고의 명품들을 다 합해 놔도 이보다 더 비쌀 수는 없다!
바로 나, 바로 당신. 명품이 모델로 삼은 진품. ‘원조명장’ 신이 만들고 ‘좋았더라.’라고 선언된 바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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