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말씀의 실천은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니코데모를 대하게 됩니다.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는 니코데모는 바리사이로서,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님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런 만큼 나름대로 지켜야 할 체통과 특권과 본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밤’에, 가능한 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도 그렇지만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는 말투가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님으로 알고는 있으나, 신비에 감싸인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비가 위축되는 어투입니다. 신비를 학설로 변질시킨 모습니다. 보통 안다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약점입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 단계 뛰어넘지 않으면,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 그 무엇을 보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나의 지식은, 반드시 믿음을 더해 주는 것으로 승화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앎이 나의 믿음으로 진행되고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작업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는 것을 하느님 앞에서 곱씹으며, 곱씹은 것을 실천할 때 가능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과 지식을 곱씹으며 침묵 중에 주님과 함께 있는 기도 시간과 이에 대한 실천은 내가 위로부터 태어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내가 위로부터 태어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성령은 활동하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나를 영적인 사람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도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영으로 태어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