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보내온 원재홍 선교사님의 나눔입니다.


  제주에서 보내온 원재홍 선교사님의 나눔입니다.

                      

6월 13일 수요일 복음강론

찬미예수님.
오늘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시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율법을 강조하는 듯한 오늘의 복음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의 성격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출신 그리스도 공동체를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였지만 율법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와는 달리 같은 공관복음인 루가복음과 마르코복음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기에 이스라엘 율법에 대해서는 잘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라고 할 수 있는 바오로가 그처럼 율법을 배척하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의 오늘 복음 말씀이 루가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어제의 복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라’ 이어져 나옵니다. 즉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을 지키기에 급급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복음에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마라”는 율법을 지키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에게 바보나 멍청이라고 하거나 형제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당에 잘 다니고 초등학교 때는 성당의 복사도 하고 주일학교도 열심히 다니던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어느 날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아버지, 나 오늘부터 무신론입니다.” 주일학교 연극에서 신부 역할을 하고 나서, 커서 신부가 되겠다고 했던 아들인데 이게 왠 날벼락입니까?

그러나 놀람을 꾹 참고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들 왈.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보면 안 다니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도 없고, 어떤 사람은 더 못되었더라. 그러니 성당에 무엇 때문에 다니느냐” 하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아빠엄마부터 아들 눈에는 모범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해라“고 허용했고 그 이후로 아들을 성당에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다행히 제 발로 걸어서 ‘가톨릭동아리’에 들었고, 대학 4년 내내 방학이면 도보성지순례도 하고 피정도 가고 함께 캠프도 가는 열심한 신자 생활을 했습니다.
 
혹시나 엄마아빠의 모습이 우리 아들보기에는 그래도 괜찮았나 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은 했지만 다른 대답이 돌아올까 봐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식들을 성당에 강제로 데려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의 모습이 모범적으로 비쳐야 아이들이 성당에 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재 복자품을 신청하고 있는 125위중에 황일광 알렉시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천당이 두개가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는 죽은 후 가는 천당, 하나는 죽기 전 이 세상에서의 천당입니다.
 
그분은 백정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멸시했지만 천주교 신자가 된 후 교우들은 그를 무시하지 않고 애덕으로 형제 대우를 해 주었고, 어디를 가나 양반 집에서까지도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우로 사는 것이 바로 천당의 삶이라 했고, 죽으면 또 다른 천당에 가기에 흔쾌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면서도 “만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그분은 외쳤고, 걸을 수가 없어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고통의 내색을 하지 않고 타고난 명랑성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합니다.
 
황일광 순교자로 하여금 천당의 삶을 느끼게 한 것은 바로 교우들이 그를 차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용수공소에서 매일 세시에 모여 신약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사도신경부터 읽기 시작해서 오늘은 히브리서를 읽었습니다. 읽고 나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생각하면서 함께 묵상을 합니다. 그런데 항상 저에게 기억나는 구절은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데살로니카 1서 5장 1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을 타이르고 소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며,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하십시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박해의 시대가 아닌 요즈음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면서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은 소소한 일상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평화롭게 잘 지내는 것이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없으면 좋을 사람.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저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과 제가 사랑하는 사람. 잘나고 능력 있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내가 존경할 사람으로, 힘없고 부족하고 또 자주 실수하고 가진 것도 별로 없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내가 사랑할 사람으로 말입니다.

 에페소서 5장 1절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마칠까 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