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촌(村) 결혼식의 일치

2008. 10. 14. 오후 3:22:38

글자
가족사랑을 위한 실천 10월 – 일치
 
누드촌(村) 결혼식의 일치
 
외국 해변에 위치한 누드촌에 살던 청춘 남녀가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였다. 주례를 모시기로 하였지만 문제가 생겼다. 누드촌에는 마땅한 주례가 없었던 것이다. 주례 청탁을 받은 외부 사람은 큰 고민에 빠졌다. “모두 벗고 있을 터인데 나는 어떻게 하나?” 결국 그는 누드로 참여하기로 하였다. 모두 벗고 있을 그들과의 일치를 배려한 것이다. 누드촌 사람들도 고민을 하였다. “아무리 누드촌 이라고는 하지만 누드 회원이 아닌 주례를 모시고 결혼식을 하는데…” 엄숙한 결혼식 날 누드촌 신랑신부와 하객 모두는 옷을 입고 주례를 맞았다. 그런데 주례는 목에 넥타이만 걸친 알몸으로 결혼식장에 나타났다.
 
참다운 일치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모습과 같은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다르지만 함께 하는 것’ 이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씀하셨다. 바람직한 것은 ‘화합하되 같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 일치도 마찬가지다. ‘다름’은 당연한 것인데도 많은 부부들이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께서 제작 과정을 달리 하셨다. 때문에 사람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생각과 가치관과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자녀를 키워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이 다르다. 혹자는 그 차이를 교육과 환경 탓으로 설명하지만 선천적인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때문에 남녀가 함께 살면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힘들기 마련이다. 사랑을 바탕으로 일치를 향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내 눈으로 세상을 그리고 남을 재단하면 일치되는 것이 없다. 사랑이 싹틀 수도 없다.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 남과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함께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연인은 비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는 연인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아주는 연인이란 말도 있다. 이런 뜻에서 보면 앞의 누드촌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화합과 함께 하는 사랑을 보여 준 사람들이다.
부부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존재다. 나 역시 상처받은 사람이지만, 치유해 주는 사명을 다하는 ‘상처받은 치유자’가 부부다. 이럴 때 가정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힘을 얻게 되고 하느님의 충실한 자녀가 된다. 그래서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부부가 그리스도 한에서 하나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은가!
결실과 풍요의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자. 나는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하는가? 나의 생각과 말이나 행동이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는가? 나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였다면 10월 한 달 가족 중 한 사람의 취미 활동에 동참하는 노력이라도 해보자. 그래서 일치, 함께 함의 기쁨을 맛보자.
 
-수원주보에서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1코린,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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