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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 사랑방에서 내고 있는 <인권오름>에서 아래의 기사를 보게 되었어요. 스타벅스 무지 좋아 했던 저도 다시 한번 저의 커피 마시는 습관을 고려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다니는 학교에선 이번 학기부터 도서관과 학생 유니온의 커피 가게가 모두 Fair Trade 하는 커피 회사에서 오는 제품들로 바뀌었더라구요. Stone Creek Coffee라는 밀워키의 조그만 회사더군요. 밀워키에는 이 가게 처럼 fair trade를 하지만, 훨씬 더 맛이 좋은 Alterra라는 커피 가게도 있지요. 커피 좋아 하시는 분들, 한번 밀워키에 오세요. 제가 쏘지요! 근데 Alterra는 걸어 가기엔 너무 멀어서, 그 대용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굳이 스타벅스 마시러 다녔는데, 지금은 그냥, 아니 정확히는 의식해서, 학교에서 사마시고 있어요. 스타벅스 처럼 이스라엘 군사주의에 동조하는 기업보다는 공정 무역에 참여하는 기업의 커피를 마시는 게 저로선 합리적인 소비 활동 같아 보입니다. 맛? 오히려 제게는 밀워키에만 있는 이 가게의 커피가 훨씬 개성적이어서 더 맛이 있던데요. 맛은 취향이니 길들이기 나름이죠. 한 번 아래 기사 읽어 보세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 “스타벅스를 보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생각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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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내 삶의 불복종 ①] 나는 스타벅스에 가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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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 ||||||||||||||||
하루는 사람들과 명동에서 캠페인을 열기로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스타벅스 커피매장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날 우리는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만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서로 다른 스타벅스 매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명동에만 스타벅스가 세 곳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심 속에서 스타벅스는 공공기관만큼이나 주요한 위치에서 흔히 눈에 띄곤 한다. 커피가격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리만치 매장 안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으며, 그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여유롭게 책을 읽는 모습들은 밖을 지나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들어가고픈 유혹에 빠져들도록 한다. 나 역시 그 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적이 있다. 진한 커피가 기호에 맞기도 했고 지인들과 만나는 장소로도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스타벅스 커피나 가게 안에 진열된 제품들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런 경험 탓에 스타벅스는 어느덧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커피 브랜드로 성장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스타벅스와 시오니즘
이 같은 사실들은, 내가 무심코 지불하는 커피 값이 축적될수록 팔레스타인인들의 억압과 고통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관계를 각성하게 만들었다. 가만 보면 현대인들은 이미 주체성을 상실한 종속적인 소비 패턴 속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이 결국에는 중동지역에서의 극단적인 희비를 낳는 야만적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종속이라는 점이 매우 경악스럽게 보였다. 그마저도 심각한 ‘이미지의 오류’를 겪고 있다는 인식에 나는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이미지의 오류란 이런 것이다. ‘스타벅스’ 하면 대개 도시적이면서 개방적이고 아늑한 이미지로써 사람들의 감성을 휘어잡고 있다. 하지만 흔히 ‘이미지’라는 것이 실체를 가리는 수단으로 이용되듯, 스타벅스의 실체에 기반하고 있는 진실의 이미지란 팔레스타인에서 시오니즘 부흥과 동시에 한 세기가 넘도록 벌어지고 있는 바로 이스라엘의 학살과 착취가 아닌가?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인권을 짓밟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이러한 이스라엘의 인권유린 행위들을 스타벅스에 그대로 투영시키고 난 다음에 그곳에서 편안히 커피를 마시는 일은 웬만해선 힘들어졌다. 더욱이 하루를 멀다하고 들려오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끔찍한 범죄소식들은, 나에게는 하루 1달러가 없어 굶주리는 어느 나라의 어린이들이나, 혹은 1달러를 더 벌기 위해 커피 농장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문제보다도 더 참혹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살육’에 대한 양심의 고동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오늘날 부와 현대 도시생활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스타벅스는 나에겐 살육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난 더 이상 스타벅스에 가지도,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스타벅스 로고에 새겨진 별이 곳곳에서 밝게 빛날수록 팔레스타인인들의 평화와 인권은 명멸해 간다. 스타벅스에 저항을!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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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오름 제 23 호 [입력] 2006년09월27일 4:45:23 | ||||||||||||||||
스타벅스, 마셔야 하나?
2006. 10. 5. 오후 1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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