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는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의 중앙 역 대합실에서 글 모르는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는 은퇴한 여교사이다. 그이는 매사 냉소적인데다가 성실하게 살지도 않는다. 어느 날 도라는 이상한 쪽지 하나를 받는다. 아홉 살짜리 소년 하나를 시내 어느 집에 데려다 주면 천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이다. 도라는 솔깃해서 아이가 부유한 외국인의 집에 입양되는 걸로 알고는 쪽지에 적힌 주소로 아이를 데려다 준다. 받은 돈으로는 낡은 텔레비전을 바꾸고 몇 가지가지고 싶었던 물건들을 사서 오랜만에 즐거워한다. 그런데 도라의 집에 놀러 온 이웃의 친구가 의문을 던진다. 그 아이가 입양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친구는 아이가 장기 매매 단에 팔려가 살해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를 해준다. 도라는 그날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다음날 도라는 아이를 빼내 고향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긴 여행을 시작한다.
몇 년 전에 본 브라질 영화 중앙역은 적당히 타락하고 이기적인 도라가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통해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따뜻한 마음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아름다운 영화다. 여기서 대부분의 우리와 닮은 도라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가정을 한 번 해 보자. 그 아이는 집 없는 아이일 뿐이고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에 의해 팔려 갔을 거라고 도라가 생각했다면, 누구나 그이를 사악하다고 여길 것이다. 뭔가를 해야 할 때에 하지 않는 게 바로 죄악이 되는 경우가 있다. 도라의 새 텔레비전 만큼도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사는데 우리는 충분히 중독 되어 있다. 정말 필요한 것도 아닌데 쓰는 돈을 조금만 기부해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데도 내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이를 팔아 넘긴 다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도라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말씀 하신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것도 그 이유이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반드시 거창한 거만은 아니다. 거친 욕망과 생활의 안락을 최소한에서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의 질곡과 불협화음을 없애 나갈 수 있다. 만약 예수가 우리 안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랑으로서 경험되는 분이라는 걸 받아들인다면, 자꾸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유예할 일이 아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진짜로 목숨까지 걸었는데, 우리는 각자가 가진 것의 그 무엇이든 1%만이라도 걸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데 목숨을 내놓는 것이 이런 정도라면 한 번 해 볼만한 거 아닌가.
박상훈 신부님의 글을 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하여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