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16세)
안의사 김아려(17세)와 결혼하여 후에 2남 1녀(딸 賢生, 아들 분도, 俊生)를 두게 되다.
1897년(19세)
안의사는 1월 중순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Thomas, 도마)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다. 이때 그의 부친을 비롯하여 숙부, 사촌 등 일가 친척과 인근 마을사람 등 모두 33명이 함께 세례를 받다.
1898년(20세)
안의사 교회활동에 헌신하다. 청계동 본당에서 안중근은 숙부 安泰健(가밀로) 회장과 함께 교회 일에 헌신하다. 안중근은 돈독한 신앙심을 갖고 청계동 성당의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빌렘 신부를 따라 미사 복사도 하면서 그를 수행하여 황해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열중.
1899∼1904년(21∼26세)
안의사 교회의 총대로 추대되어 교우들의 난제해결에 앞장.
1907년(29세)
연해주에서 조국독립투쟁을 시작하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직을 맡아 항일독립운동에 큰 경륜을 펴기 시작하였다.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에게 의병부대 창설에 대해 설득작업을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嚴仁變, 金起龍 등과 의형제를 맺다.
1909년(31세)
안의사 斷指同盟을 통해 同義斷指會를 조직하다. 3월5일경(음력 2월 7일경), 안중근은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大韓獨立'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다. 안의사가 회장에 선임, 회무를 주관하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안의사 하얼빈 역두에서 伊藤博文을 총살응징하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제6회 공판(최종판결)이 개정되다. 안의사 사형 확정 판결에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함.
1910년 3월 8일, 한국으로부터 여순감옥으로 빌렘 신부가 찾아오다. 다음 날인 9일부터 10일까지 빌렘 신부가 안의사의 영생영락을 위하여 告解聖事와 彌撤聖祭大禮, 예수의 聖禮聖血을 받아 모시는 대예식을 행하다. 안중근은 이 미사 중에 직접 복사를 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다. 이때 감옥소의 일반관리들도 함께 참례하다. 면회실에서 溝淵 검찰관, 栗原 전옥, 園木 통역, 中村 간수장, 水野, 田 두 변호사 등이 입회하에 안정근, 안공근 두 아우와 빌렘 신부를 면회하고 20분 동안 기도를 드린후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다.
안중근 의사는 25일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마지막 면회하는 자리에서 모친과 부인, 숙부, 동생, 뮈텔 주교, 빌렘 신부 등에게 미리 써놓았던 6통의 유서를 전하다. 이 보다 앞서 安秉瓚 변호사를 통하여 뼈에 사무치는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전달하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