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2009. 4. 16. 오전 10: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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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앙을 모든 사람을  위한 간결하고 규범적인 신앙 조문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전달해 왔다. 이러한 신앙의 종합을 ‘신앙 고백’이라고 부르는,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86~187항)

 

1. 신경信經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 사람들입니까?” 라고 어떤 이가 여러분께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가톨릭교회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여러분은 각자의 체험대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설명하겠지만,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남 없이 정확하고 자신 있게 설명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축일과 매 주일 미사 중에 고백하는 ‘사도신경’ 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사도로부터 현재까지 이어 오는 교회의 신앙을   요약한 ‘신앙 고백’입니다. 이를 ‘크레도Credo’ 또는 ‘신경Symbola fidei’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 각자는 세례 때 신경의 내용에 동의하고 고백함으로써 교회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제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한 ‘사도 신경’의 내용을 12회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2. 하느님을 믿습니다!

신경 전체는 하느님께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는 고백은 가장 근본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시며,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새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레 통성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의미  있고 중요한 사람이라 판단되면, 즉시 그 이름과 연락처를 전화기에 저장하거나 수첩에 적어둡니다. 이렇듯 서로의 이름을 알려주고 기억하며 부른다는 것은 인격적인 만남과 친교를 원한다는 표현이며, 동시에 그 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중 가장 근본적인 계시는 불타는 덤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면서도 타 없어지지 않는  덤불 속에서 당신 누구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를 모세에게 말씀해 주십니다(탈출 3,13-15).                 “나는 곧 나다.”, “나는 있는 나다.” 라는 의미의 “주님”라는 이름으로 계시하시는데 이 이름에는 “하느님만이 ‘있다’”는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즉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와 소유를 받았으나, 오로지 그분만이 스스로  존재 자체이시며, 그분의 모든 것은 그분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느님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현실은       바로 하느님 현존을 드러내며, 주변의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존재의 원천이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름으로도 당신을 계시하시는데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고 진리를 따르며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이름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우리를 통해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고 빛나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3. 성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하면서 신경을 시작합니다. 이 고백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고백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persona을 지니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며, 가장 근본적인 교리로서 하느님께서 계시하지   않으시면 알 수 없는 신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삼위일체 신비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히포Hippo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354-430) 성인은 어려운 삼위일체 신비를 골똘히 생각하며 해변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바닷물을 옮겨 담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인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지적하자, 그 어린아이는 천사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삼위일체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며 떠나갔다고 합니다. 저 역시 이 교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첫영성체나 예비신자 교리교사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개의 이파리로 이루어진 클로버나 세 개의 각들로 형성된 삼각자를 예로 들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시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 위격들을 하느님을 구성하는    한 부분 정도로만 이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삼위일체 신비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세 위격들은 서로 독립적이고 고유한 위격들로 구별됩니다. 그러나 모두 동일한 한 하느님으로서 본체를 이루십니다. 또한 세 위격들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관계에는 어떤 차별도, 우월함도, 열등함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부는 성자에게, 성부와 성자는 성령에게 그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초월성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삼위일체 신비는 지성적 · 철학적 탐구로 이해될 수 없으며 다만 지극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자를 통하여 세상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며 성령을 보내시어 끊임없는 친교와 통교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을 깨달을 때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랑의 신비는 우리가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 때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체험됩니다. 피상적이고 우열優劣을 나누며 이해利害가 엇갈리는 관계가 아닌 이해와 존중, 경청과 배려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격려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사랑의 신비, 곧 삼위일체 신비에로 이끌리며 그 아름다운 내어줌에 경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저희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한 하느님이신 당신의 자녀들임을 깨닫게 하소서.

저희가 서로 아끼고 사랑함으로 당신 사랑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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