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5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루카 11,42-46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론하는 것, 어려운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
강론이 어려운 까닭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믿음의 벗님들에게 전할 내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듣기 좋은 표현이나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요즈음 강론 자료로 훌륭한 많은 서적들이 나왔기에, 이 책 저 책, 이 자료 저 자료를 잘 사용하면 멋지고 맛깔스런 강론을 쓰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강론이 어려운 까닭은 애써 준비한 강론이 믿음의 벗님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이미 제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벗님들, 기도하십시오.”라고 강론을 하려 하면, 제 마음에는 “그렇다면 너는?”이라는 자책의 쓴 소리가 들려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럼 너는 그렇게 하고 있냐?” “화해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십시오.” “믿음을 실천하십시오.” “낮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불의에 맞서고 항상 정의를 추구하십시오.”
“그럼 너는?” “그럼 너는?” “그럼 너는?” “그럼 너는?” “그럼 너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잖아.” “진짜?” “글쎄?” 마음 안에서 저와 또 다른 제가 끊임없이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어?” “글쎄?” 어느새 제 안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나섭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자. 그리고 몸으로 보여 주자. 물론 힘들겠지만, 어때 이젠 됐어?” “그래도, 강론은 해야 할 것 아니야?”
어찌 보면 강론을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평소에 사제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고 싶은 말들, 나누고 싶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강론 시간은 기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두렵습니다. 강론을 통해서 제게서 나간 수많은 말들이 바로 제 자신에게 족쇄로 다가오기에 두렵습니다. 그렇습니다. 강론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입니다.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제대로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이나 훈화, 그리고 여러 자리에서 ‘한 말씀’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제로서 제 입장입니다. 분명 믿음의 벗님들에게 ‘말을 해야 하는 사명’은 제게는 두렵고 과분하고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입을 다물고 싶지만 다시금 입을 여는 것은 바로 이 사명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사제인 제게 하시는 사랑 가득한 훈계입니다.
부족한 저의 삶의 모습 때문에 위축되어 해야 할 말을 못하는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제게서 나온 말들로 가장 먼저 제 자신에게 짐을 지우고 이를 삶을 통해 증언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지니고 싶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가장 충실히 수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제로서 저의 강론은 믿음의 벗님들뿐만 아니라, 아니 그 전에 제 자신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힘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