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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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y VII)
축일 5월 25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소아나
태생인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힐데브란트(Hildebrand)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아저씨가
원장으로 있는 로마(Rome)의
아벤티네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라테라노(Laterano) 학교에서 요한 그라치아노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였는데, 그의 스승이
그레고리우스 6세로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교황 비서가 되었다.
그 후 1047년에 그레고리우스 6세가 서거하자
성 오딜로(Odilo)가
지도하던 클뤼니(Cluny)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툴(Toul)의 주교인
브루노(Bruno)가
레오
9세(Leo IX) 교황으로 등극하면서부터
자문관이 되었다. 그는 상스(Sens) 회의를 주재하여
베렌가리오를 단죄하였고,
니콜라우스 2세(Nicolaus II)
교황 때에는 교황 칙서 발간 책임자로 일하였다.
그는 1073년에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이
서거한 뒤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직매매 죄를
들어서 밀라노(Milano)의 대주교를
면직하면서부터 교회 규율을 바로잡기 시작하였고,
1075년의
시노드(Synod)에서 평신도의 성직 임명을
금하였다. 복잡한 사건들이 많았으나, 그의 재임
기간 중에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교황권을 확립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
로마간의 일치 사업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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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디오니시오(Dionysius)
축일 5월 25일
디오니시오는
'박쿠스 신(神)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시성조사를
실시하던
몇 분의 주교들
가운데 정통 그리스도교를 끝까지
주장하고, 351년에 밀라노의 주교직에 오른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에게 제일 큰 공을
돌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 아타나시우스는
그 당시에 수많은 반대를
받고 있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355년에 아리우스파(Arianism)의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아타나시우스의 단죄를 선언하기 위한
시노드(Synod)를
궁중에 소집하였을 때, 가톨릭 신앙의 열렬한
옹호자이던 디오니시우스는
스스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모든 대표자들이 칙서에 서명을
마치려고
할 즈음에, 성
디오니시우스,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그리고 칼리아리(Cagliari)의 루치페르가 완강히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추방되었는데,
디오니시우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피신하여
이곳에서
360년경에 서거하였다.
성 바실리우스(Basilius)가 그의 유해를 밀라노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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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Leo)
축일 5월 25일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방 트루아의 만트네
출신인 성 레오는 성
로마누스(Romanus)가 세운
수도원에 들어간 첫 번째 회원이었다.
그 후 그는 로마누스를
계승하여 원장이 되었는데,
그의 재임기간에 이 수도원은 괄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가
습관적으로 성세대 앞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던 어느 날
성
힐라리우스(Hilarius), 성 마르티누스(Martinus)
그리고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가 발현하여
3일 뒤에 죽으리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만큼 그의 성덕은 천상의 성인들도 인정하였다고
한다. 리에(Lye)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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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
축일 5월 25일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최고 명문가인 팟지
집안 후손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Maria
Magdalena)는 어릴 적부터 선행과
신심생활에 특히 관심을 보였는데, 14세 때에
피렌체에 있는 성 요한
수도원의 기숙생이
되면서부터 더욱 열렬한 신앙인이 되었다.
부친은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녀 자신은
극렬히 반대하면서 카르멜 수녀원을 선택하였다.
1583년에
그녀는 정식으로 수녀회에 입회하고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기를 마친 후 그녀는
중병으로 인하여
서원을
빨리 발하였다. 그녀의 병은 아주 위중했으며,
동료 수도자가 아프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고, 나의 구원을 바라보면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그녀의 뛰어난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였다. 서약 후부터 자주 탈혼에 빠졌으며,
한 번은 거의 40일
동안이나 천상의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항상 빵과 물까지 절제하여 단식했으며,
천상 정배와 성모님의
도움을 늘 간구하였다.
그러던 중 약 5년 동안은 영적인 건조기를
맞이하여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1590년에는 ‘테 데움’을 노래하던 중에 탈혼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리자,
“기뻐해 주세요,
이제
저의 겨울은 끝났습니다.” 하며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녀는 예언하는 은혜를 받은 것 외에도 먼 곳에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고,
탈혼 상태에 있을 때 어떤 경우에는 무기력해지는
때도 가끔 있었다.
1604년부터 마리아 막달레나는
누워만 있어야 했다. 격렬한 두통에 시달리고
사지의 고통이
극심해졌다. 그녀는 1607년 5월 25일
41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으며, 1669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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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동정(1566-1607)
신비적 탈혼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영적 일치를 의식하면서
내적 외적으로
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날 만큼 하느님과의
영적 일치에로 몰입되는 것이다.
파지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을
너무나 퐁요롭게 받았기 때문에
그녀를 '탈혼 성녀'라고 부를
정도이다.
그녀는
1566년, 플로렌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때의 플로렌스는 큰 도시로서
일류 가문들이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
카타리나
파지와 같은 환경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귀족과 결혼하여 안락한
생활을 즐기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홉 살 때, 가족의 고해 신부로부터
묵상하는 것을 배웠다.
그녀는 당시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첫영성체를 하고 한 달 후에
사적 동정 서원을
하였다. 16세가 되자
그녀는 플로렌스에 있는 갈멜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는
매일 성체를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타리나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을 받고
1년 동안 수련 기간을
보냈는데 그때
심하게
앓았다. 장상은 그녀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를 침대에
눕힌 채로 소성당으로
데리고 가
개별적인
예식으로 서원을 하게 했다.
서원을 하자마자 그녀는 약 두 시간에 걸처
탈혼상태에 빠졌다. 그
같은 탈혼 상태는
그 후
40일간 아침 영성체 후에 계속 일어났다.
이러한 탈혼 상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풍요롭게 체험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착각에 대한
보호 조처로서 또한 계시를
보존하기 위하여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해 신부는 그녀의
체험을 다른 수녀에게
구술하도록 명했다. 이것은 6년이 지난 후엔
다섯 권의 두꺼운 책을
쓸 정도였다.
처음 세
권의 책은 1548년 5월 27일부터
1585년 성령 강림 주간 동안의 탈혼 상태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간은 5년간의 혹심한
시련을 위한 준비였다. 네 번째 책은
이 시련에 대한
기록이고, 다섯 번째 책은
개혁과 쇄신에 관한 편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또 다른 책인 '영적
권고'는 수도자
양성에
있어서 그녀의 경험들을 모은 것이다.
예외적인 것이 이 성녀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했다. 그녀는 생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사람에게
발현하였으며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탈혼 상태에
머무는 것이 쉬운
일이므로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느님께서는 그녀가 그
다음 5년 동안
영적
삭막함을 체험하게 될 때 느끼는
괴로움에 대비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특별한 접근을 허용하셨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서 온통 무시무시한 것 밖에는
보지 못하는 어두운
상태에 떨어졌다.
그녀는
맹렬한 유혹을 당했고
크나큰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1607년,
41세에 세상을 떠났고
1699년에 시성되었다.
그녀의 사망 후 350년이 넘을 때까지도
그녀의 시체는 썩지
않았다.
설명 :
신비가들에 대한 하느님의
친밀한 일치의 은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원한
일치의 행복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에서 신비적 탈혼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은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성령이다.
탈혼 상태는
육체의 연약함과 하느님의
비추심에 거역하는 육체의 힘 때문에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가 정화되고
강해지면
탈혼 상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탈혼 상태의 여러 가지 면에 대하여는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영혼의 성'제6편 5장과
십자가의 성요한이 쓴 '어둔밤'제2편 1장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인용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파지의 마리아 마달레나는
고통 속에서
구원의
은총을 발견하였다. 그녀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의
남은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것에 대한 그녀의
바람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동료 수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에게만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당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서로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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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Madeleine Sophie
Barat)
축일 5월 25일
성녀 막달레나(Magdalena, 또는 마들렌)
소피아는
술통 제조업자인
자크 바라의 딸로서
1779년 12월 12일에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의
즈와니(Joigny)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큰 오빠
루이(Louis)에 의하여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루이는 나중에 예수회 사제가 되었고
동생에게 항상 엄격한
규율과 벌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여성 교육에 임할 여자 수도회 설립을
계획하여,
예수회의 일부로
설립하려던 바랭(Varin) 신부는
루이의 추천에 따라 소피아 바라와 3명의 동료를
1800년에 수도생활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심 수녀회의
창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다음 해에
아미앵(Amiens)에서 그들의
첫 수녀원과 학교를 세웠고, 1802년에 성녀
막달레나는
비록 회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당시 23세)
장상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63년 동안 성심
수녀회를
지도하였다. 성심
수녀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04년에는 그르노블(Grenoble)의 성모 방문
수녀회
공동체를
흡수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1818년 미국에
수녀회를 전파한 성녀 로사 필리피나
뒤센
(Rosa-Philippine Duchesne, 11월
17일)도 끼어 있었다.
이 수녀회는 1826년에 교황 레오 12세(Leo
XII)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1830년에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푸아티에(Poitiers)의 수련원이 폐쇄를 당하자
성녀 막달레나는 스위스에
새로운 수련소를 세웠다.
1865년 5월 25일 예수 승천 대축일에 그녀가
파리(Paris)에서
운명할 즈음에는 12개국에 백여 개의
수녀원과 학교가 있었다. 그녀는 1925년 5월 2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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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시크라테스(Pasicrates)
성 발렌시오(Valentio)
축일 5월 25일
성 파시크라테스(Pasicrates)와
성 발렌티오(또는
발렌시오)와 다른 두 군인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속주였던
모이시아
(Moesia,
오늘날의 불가리아, 루마니아 지역)의
실리스트리아(Silistri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도로스토룸(Dorostorum)의
성 율리우스(Julius, 5월 27일)의 일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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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다(Beda)
축일 5월 25일
영국 웨어마우스
자로우(Wearmouth-Jarrow)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수도원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이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 원장과
성 체올프리두스(Ceolfridus)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았다. 그가 성장한
뒤에는 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고, 30세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늘 수도원 안에서
생활하면서 주로 성서 연구에 전념했으며,
수도원 내의 교육과
저술에 몸을 바쳤다.
그는 당대의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영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서에 관한
그의 저서들은 당대에 가장 권위가
있었고 중요시되었으나, 그는 역사가로서 더
유명하다.
그의 “영국
교회사”와 “국민사”는 널리 알려져
있는 역사서이다. 또한 그는 영문법과 연대사
작업을
하였고 찬미가와
시를 썼다. 이외에도 그는
서한집과 강론집 그리고 순교록을 썼는데,
이들 책들이 모두
라틴어로 저술되었지만
그는 영어로 집필한 저술가로도 이름이 나 있다.
만년에 그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성 요한
복음서”를 번역하였고, 세비야(Sevilla)의
성 이시도루스(Isidorus)의 저서들을 추출하였다.
그의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엄한 자’(Venerable)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이 칭호는 853년
아헨(Aachen) 교회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영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존엄한 베다’라 하였다.
그는 단테(Dante)의
천국 편에 나오는 유일한
영국인이다. 비드(Bede)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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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델모(Aldhelm)
축일 5월 25일
웨식스(Wessex)의 왕 이느(Ine)의 친척인
성
알델무스(Aldhelmus, 또는 알델모)는 영국 웨식스에서
출생하여 윌트셔(Wiltshire)의
말머스베리(Malmesbury)
에서 공부하였으며, 캔터베리(Canterbury)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고, 그곳에서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하였다. 그런 후 그는 그곳 학교의
교장으로서 말머스베리로
되돌아 왔고, 683년경에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느 왕의 고문이었으며, 학문과 영성뿐만
아니라 웨식스의 가장
현대적인 교육자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로마(Rome)의 전례와 더불어
켈트(Celtic)
전례를 정착시키는데 힘을 쏟다가, 705년에 쉐르본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둘팅
방문길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라틴어로 시를 썼고, 동정론을 저술하였으며
영어와 라틴어로 된
발라드와 노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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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우르바노 1세(Urban I)
축일 5월 25일
우르바노는 라틴어로
'도시민(都市民)'이란
뜻이다.
성
우르바누스(Urbanus, 또는 우르바노)의 출생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폰티아누스(Pontianus)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따르면
222년 칼리스투스 1세(Callistus I) 교황이
세상을
떠난 뒤 교황으로
선출되어 8년 동안 재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우호적인 황제가 지배하는
동안 교황직에 있었기
때문에 전혀 탄압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3세기 전반기의
평화로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이집트, 시리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증가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로마(Rome)의 지하 묘지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수가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크게 기여한 것이
교황
우르바누스 1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그는 로마의
노멘타나가(Via
Nomentana)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박해로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많은 고통을 겪었고 결국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이에 근거해서
교회는 교황 우르바누스
1세를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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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노비오(Zenobius)
축일 5월 25일
이탈리아 피렌체의 주요 수호성인인 성
제노비우스
(또는
제노비오)는 그 지방의 제로니모가(家)의
후손으로서, 21세 때에 테오도루스(Theodorus)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후일 같은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덕행과 지식은 그의
친구이던
밀라노(Milano)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도
극찬하고 있으며,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교황도
그에게 의견을
구하였다고 한다.
그 후 테오도루스 주교를 계승하여 피렌체 주교로
착좌한 그는 뛰어난
설교와 기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또한 그는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와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를 제자로
길러냈다.
성
제노비우스는 80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산로렌초
(San Lorenzo) 성당에 묻혔다가 다시 주교좌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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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젠나디오(Gennadius)
축일 5월 25일
성 겐나디우스(또는 젠나디오)는 어릴 때부터
수도자로서 훈련을
받았는데, 후일 그는
성
프룩투오수스(Fructuosus)가 비에르초에 세운
산 페드로 데 몬테스의 원장이 되었다.
895년 그는 에스파냐
아스투리아스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5년 뒤에 주교직을 사임하고
황야에서 은수자 생활을
재개하였다.
그는
하느님께는 영광, 사람들께는 영혼구령이란
구호 밑에서 높은 덕을 쌓았다.
♡5월 25일 오늘의 성인♡
2016. 5. 26. 오전 7:28:10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