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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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롤루스 요세푸스 에우게니우스 드 모제노드
(Carolus Iosephus Eugenius de Mozenod,또는 가롤로)
축일 5월 21일
성 카롤루스 요세푸스 에우게니우스 드 모제노드
(Carolus Iosephus Eugenius de Mozenod, 또는 가롤로)는
1782년 8월 1일 프랑스 남부 액상 프로방스
(Aixen-Provence)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중산층으로 수녀원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부유했고, 아버지는 귀족이었고 전통 교육을
받았으나 가난했다. 그들의 혼인생활과 가롤로의
가정생활은 지속적인 집안싸움과 외할머니의 간섭,
신경과민의 이모에 의해 꽤나 괴로웠다.
1790년 12월 13일, 8살의 가롤로와 그의 가족은
프랑스 대혁명을 피하여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그의 가족들은 프랑스의 니스(Nice), 이탈리아의
토리노(Torino), 베네치아(Venezia), 나폴리(Napoli)와
팔레르모(Palermo)에서 11년을 생활했다.
가롤로는 매일의 생활을 통해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배웠으며, 대부분의 교육은 베네치아의 본당신부인
바르톨로 지넬리(Bartolo Zinelli) 신부로부터 받았다.
팔레르모에서는 젊고 부유한 이탈리아 귀족들과 함께
방탕하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끝나고 어머니는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아버지는 외면상의 정치적인 이유로 이탈리아에 남았다.
아버지가 1802년 가족 소유의 땅을 회수하고자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성 가롤로는 부모님을
재결합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19세기 초반에
드문 사건인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유년시절과
지속적인 가정불화와 가정의 파괴는 가롤로로 하여금
도움이 필요한 가정과 그 구성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했다.
수년 동안 가롤로는 혼자 괴로워하면서 팔레르모에서
경험했던 세속적인 삶에 한 손을 담그고,
다른 한 손은 베네치아에서 바르톨로 신부와 함께
경험했던 종교적 삶의 아름다움에 담근 채 생활했다.
해답을 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가롤로는 1805년
수감자들에게 교리교육을 하고 함께 노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하느님께서 승리하시어,
1807년 성 금요일에 십자가의 발치에서 신비 체험을
한 가롤로는 충만한 하느님 사랑의 힘에 의해 감동을
받고 1808년 파리에 있는 성 술피스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811년 29세의 나이로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수품 직후
아미앵의 주교 총대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그는 이를
포기하고 액상 프로방스의 본당 신부를 택하여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일하고 선교 하였다.
그는 상류층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아닌 지방
사투리를 사용해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였다.
그는 병자들, 수감자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였으며 젊은이들을 보살폈다.
교도소에서 사목할 때 그는 병에 감염되어 거의
죽을 고비도 넘겼다.
성 가롤로는 자기 주변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막론한 추수꾼들을 모아들였다. 그들은 예전의
카르멜회 수도원에서 일하고, 그들 중 성직자들은
지역 전체에 걸쳐 본당 업무를 수행하여 프로방스의
선교회를 형성하였다. 이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그 명성은 퍼져나가 지역 바깥에서도 그들을
요청하곤 하였다. 가롤로는 공식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26년 2월 17일에 교황 레오 12세
(Leo XII)로부터 새 수도회인 원죄 없으신 성모
수도회의 설립을 승인받았다.
성 가롤로는 선교사로 남고자 했지만 교회는
그의 작은 수도회의 발전을 확실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그는 1823년 마르세유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1832년 10월 14일에 그는 이코시아(Icosia)의
명의주교가 되었으며 1834년에는 보좌주교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는 그를
1837년 12월 24일에 프랑스 마르세유의 주교로
서품하였다.
그는 23개의 본당을 설립했으며, 50여개의 성당을
건축하거나 재건하였고, 은퇴하거나 박해당한
사제들을 돌보았으며, 교계 규율을 재건하였고,
젊은이들을 위한 교리 교재를 개발하였다.
또 33개의 수도회들을 교구로 받아들였으며,
교구 사제의 숫자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렸고 모든
서품식을 주례하였다.
성 가롤로 주교는 본당들을 재정비하고 교육에
있어서의 정부의 독점을 약화시키고자 남몰래
노력하였다. 교황직에 대한 적극적 옹호자였던 그는
교회의 일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대항해 싸웠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교황의 선포에
공적으로 찬성했으며, 그 교리를 널리 퍼뜨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25권에 달하는 저서를 썼다.
복자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마르세유의
대주교가 된 그는 1856년에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원로원 회원이 되었고,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59년에는 추기경직을 제안받았다.
1841년 12월 2일 성 가롤로 주교의 첫 선교사들이
캐나다에 진출하였고, 그가 선종할 당시에는
10개국에서 선교하는 6명의 수도회 주교와 400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오늘날 68개의 나라에
5,0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이 선업을 이어가고 있다.
성 가롤로는 1861년 5월 2일 마르세유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975년 10월 19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5년 12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가정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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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고드릭(Godric)
축일 5월 21일
잉글랜드(England) 노르포그의 왈폴에서 태어난
성 고드릭은 젊었을 때 행상을 하다가, 그 후
16년 동안 선원 노릇을 하였다.
그가 수많은 항해 끝에 꽤 큰 부자가 되었지만,
린디스파른(Lindisfarne)의 수도원을 방문한 뒤로
마음이 변하여 예루살렘 순례 길에 올랐다.
그 후 그는 또다시 프로방스의 성 에지디우스
(Aegidius) 경당과 로마(Rome)를 순례하였다.
이때 그는 엘릭이라는 은수자와 함께 2년 동안
은수생활을 하다가 재차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더럼(Durham)에서 숨은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60여년을 살면서
높은 성덕을 쌓았다. 그는 예언과 환시 그리고
천리안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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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코스트라토(Nicostratus)
성 안티오쿠스(Antiochus)
축일 5월 21일
저자가 불확실한 성 프로코피우스(Procopius)의
행전에 따르면 성 니코스트라투스(또는 니코스트라토)와
성 안티오쿠스(Antiochus)는 로마 보병대의 호민관이었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팔레스티나
(Palestina)의 카이사레아 필리피(Caesarea Philippi)
에서 동료 군인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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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폴리에욱투스(Polyeuctus)
성 빅토리우스(Victorius)
성 도나투스(또는 도나토(Donatus)
축일 5월 21일
성 폴리에욱투스(Polyeuctus)와
성 빅토리우스(Victorius) 그리고 성 도나투스
(또는 도나토)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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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발렌스(Valens)
축일 5월 21일
성 발렌스는 프랑스 오세르의 주교로 세 명의 소년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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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벤베누토(Benvenuto)
축일 5월 21일
벤베누투스(Benvenutus, 또는 벤베누토)는 마르카의
레마니티 출신인데, 이곳은 로레토(Loreto)와 인접한
마을이다. 그는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는데,
높은 자리를 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늘 새기면서
겸손의 덕을 키웠다고 한다. 미사 중,
특히 영성체할 때 그는 자주 탈혼에 빠져들었다.
이때 그의 몸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보였다고 한다.
한번은 탈혼에서 깨어보니 동료 형제들의 식사 준비
시간이 훨씬 지났음을 알고 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천사가 모든 준비를 다 해두었다고 한다.
그는 일생동안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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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쿤도(Secundus)
축일 5월 21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사제
성 세쿤두스(또는 세쿤도)는 다른 많은 성직자와 평신도,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한 신자들과 함께 동방교회에서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이 격심하던 때에 그들에 의해
순교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
주교가 아리우스파에 의해 추방된 사이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를 강탈한 게오르기우스
(Georgius) 주교는 열성적인 아리우스주의자로서
많은 신자들을 죽음에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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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쿤디노(Secundinus)
축일 5월 21일
성 세쿤디누스(또는 세쿤디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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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티모테우스(Timotheus)
성 폴리우스(Polius)
성 성 에우티키우스(또는 에우티키오(Eutychius)
축일 5월 21일
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맥 및 사하라 사막 북부지대에 대한 로마 시대의 호칭)
출신의 성 티모테우스(Timotheus)와 성 폴리우스(Polius)
부제 그리고 성 에우티키우스(또는 에우티키오) 부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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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크리스피노(Crispin)
축일 5월 21일
이탈리아 라치오(Lazio) 지방의 비테르보 태생인
피에트로 피오레티(Pietro Fioretti)는 어려서부터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였다. 그는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뜻밖에도 신기료장수가 되어 일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25세 때까지 그 일을 하다가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크리스피누스(Crispinus,
또는 크리스피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성 크리스피누스는 수도원의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비테르보에서는 정원사, 톨파에서는 주방 요리사로서
봉사했다. 톨파와 브라치아노(Bracciano)에서 유행병이
돌 때에는 그의 주위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요르비토에서
재무를 담당하였는데, 사실 이런 일보다는 그의 기적과
예언 그리고 지혜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50년 5월 19일 로마(Rome)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806년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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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호스피시오(Hospitius)
축일 5월 21일
성 호스피티우스(또는 호스피시오)는 프랑스
방리유(Banlieu) 부근, 오늘날 성인의 이름을 딴 도시
(Cap-Saint-Hospice)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오래되어 폐허가 된 탑 위에서 사순시기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철제 사슬을 몸에 두르고 오직 빵과
대추야자만을 먹으며 살았다. 그는 예언과 기적의
선물을 받았다.
성인의 유해는 5월 21일에 레랭(Lerins)으로
옮겨졌는데, 이날을 현재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는 자신의 저서에서 성 호스피티우스를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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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 보볼라(ANDREW BOBOLA)
축일 : 5월 21일
안드레아 보볼라는 폴란드 예수회원이었는데,
그는 핀스크 근교 야노브에서 코싹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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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콘스탄티누스 대제(St. Constantine the Great)
축일 : 5월 2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또는 콘스탄틴 1세라고도 불린다.
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퇴위 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켰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인한 황제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따라 갈레리우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하였다.
306년 아버지가 죽자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정통파 황제를 자칭하고 로마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꺾어야 했고
312년에야 정식으로 황제 지위를 얻었다.
314년부터 로마 제국 동부를 차지한 황제
리키니우스와 대립하였으나, 323년 고트인(人)의
침입을 막아낸 후 리키니우스를 격파, 제국을
통일하여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원래 그는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나 그리스도교에 깊이
경도하여 그 자신도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勅令)을 공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당시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의 사법권 ·재산권 등을 우대하였다.
또한 북아프리카 도나투스파의 분파(分派) 문제도
조정하였으며,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는 등 교회 내의 분쟁 ·교리(敎理)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한 통치 방식을 계승
발전시켜, 문무(文武) 관직의 기능을 완전히 분리하였고,
황제고문회의의 권한을 강화하여 중요한 정치에
관여시켰으며, 황제를 정상으로 하는 계급적 관료제도를
완비하였다.
또한 상비군 제도와 변경의 둔전병(屯田兵) 제도에
의거하여 군제를 정비하였으며, 사르마티아인(人)과
게르만인을 변경지방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야만족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행정적으로는 관료와 군대의 유지, 오리엔트식의
궁정조직과 의례(儀禮)형식의 채용, 대규모 건축사업
등에 대한 지출이 증대하였기 때문에 각종 세금제도
(금을 납부하는 형식으로)를 신설하였고, 솔리두스
금화본위(金貨本位)로 화폐제도를 정비하게 되었다.
한편 이교적 색채를 불식한 그리스도교적인 도시로서
비잔티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노플)라고 명명하였다(330).
그는 군인 ·통치자 ·입법자로서 제1급의 인물로
꼽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재건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
(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5월 21일 오늘의 성인♡
2016. 5. 20. 오후 3:45:58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