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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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둔스타누스(Dunstanus, 또는 둔스타노)
축일 5월 19일
잉글랜드(England)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의
발톤스보로그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성 둔스타누스(Dunstanus, 또는 둔스타노)는
이곳의 아일랜드계 수도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청년이 되어서는 아텔스탄의 왕궁에
들어갔으나, 934년경에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고, 939년에는 윈체스터(Winchester)의
주교이자 자신의 아저씨인 성 알페기우스
(Alphegius)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둔스타누스는 얼마동안 고향땅에서 은수자로
생활하다가, 국왕 에드문트의 부름을 받고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943년에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수도원을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시켰고,
또 다른 많은 수도원의 활성화를 기하는데
큰 몫을 하도록 운영하였다.
국왕 에드문트가 뜻밖에도 살해되었을 때에는
국왕 에드레드의 왕좌로 나아가는 자문관이
되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모든 수도원들의
원대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세속적인 정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색슨족의 부도덕성을 들추어냄으로써 색슨 귀족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고, 덴족과의 평화에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에드위가 국왕 에드레드를 승계하여
국왕이 되면서부터 그 왕은 둔스타누스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국왕은 그의 재산을 압류하고
왕국에서 추방하였다.
이리하여 둔스타누스는 플랑드르(Flandre)의
겐트(Gent)로 갔지만, 국왕의 동생 에드가가
에드위를 축출하였으므로 곧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캔터베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국왕과
그는 국가와 교회의 개혁을 꾀하였다.
둔스타누스는 교황 요한 7세(Joannes VII)에 의하여
교황 대사로 임명되면서부터, 성 에텔월드와
성 오스왈드와 함께 교회 규율을 쇄신하기
시작하였고, 그전에 덴마크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수많은 수도원들을 재건하였다.
둔스타누스는 국왕 에드가의 자문관으로 16년 동안
있으면서 그의 잘못을 발견하는 즉시 꾸짖고
진언을 드림으로써 그의 인격은 날로 성숙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캔터베리로
돌아왔으며, 대성당 학교에서 교육에 임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잉글랜드 수도원의 재건자였다.
또한 그는 유명한 음악가로서 하프를 연주하거나
찬미가를 작곡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숙련된
철공예가였다. 그는 갑옷 제조자, 금세공인,
자물쇠 제조자 및 보석 공예가들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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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노 노벨로(Augustine Novello)
축일 5월 19일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하고 법률을
가르치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지자인
아우구스티누스 노벨로(Augustinus Novello,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국왕 만프레드의 수상이
되었는데, 베네벤토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은퇴하였다.
이때 수도자 마태오 테르미니가 만일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한다면 완쾌되리라고 약속했는데,
이것이 사실로 나타나자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후일 교황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는 그를
교황청의 고해신부로 임명했고,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는 그를
시에나(Siena)의 교황대사로 임명하였다.
1298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지만, 2년 뒤에 은퇴하고 자신이 세운
성 레오나르두스(Leonardus) 은둔소로 숨어버렸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9년에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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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퀴노(Alcuin)
축일 5월 19일
영국의 요크에서 출생한
알퀴누스(Alcuinus, 또는 알퀴노)는
성 에그베르토(Egbertus)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요크 주교좌 학교에서는 베다(Beda)의 제자였으며,
767년에는 바로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의 지도하에 이 학교는 학문의 전당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샤를대제(Charlemagne)의
초청을 받고 아헨(Aachen)의 궁중에 학교를
세웠으며 왕의 고문이 되었다.
796년에는 투르(Tours)의 성 마르탱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후일 페리에르,
트루아(Troyes) 그리고 코르머리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를
주도하는 힘이자 정신이었고, 프랑크 코트를
유럽 문화와 학문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는 제국을 통하여 문맹을 퇴치하였고,
초급 교육 교육제도를 신설했으며, 7과목을 배우는
고등 교육제도, 삼학(문법, 수사, 논리)과
사학(산술, 음악, 기하, 천문학)을 근거로 한
교육제도를 만들어 중세 유럽 교육제도의
기반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문(古文) 사용을 격려했던 그는 뛰어난
신학자였고, 794년 프랑크푸르트 시노드
(Synod of Frankfurt)에서 단죄된 양자설 이단을
반박하였다. 그는 성서 주해서도 저술하였고,
지금도 수사학에서 인용되는 “요약”(Compendia)의
저자로서 놀라운 언어구사와 함께 수많은 편지들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크게 발전시킨 학교 가운데
하나인 투르의 성 마르탱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공경이 공식적으로 공포된 바는 없으나 흔히
복자로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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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보 헬로리(Ivo Helory)
축일 5월 19일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의 케르마르틴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성 이보 헬로리는 그곳에서
자랐으나, 장성한 후에는 파리(Paris)에서 신학과
교회법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고 오를레앙(Orleans)
에서는 민법을 공부하였다. 브르타뉴로 돌아오던
길에 그는 렌(Rennes)과 트레귀엘의 판사가
되었는데, 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또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이주해 온 난민들을
도왔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란
별명을 얻었다.
1284년에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는 구호소를 세워
병든 이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사목하였을
뿐만 아니라 설교 능력 또한 비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일생 동안 엄격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는 법률가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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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Coelestinus V,
또는 첼레스티노 5세(Celestine V)
축일 5월 19일
첼레스티노는 '천국의 주민'이란 뜻이다.
이탈리아 남동부 아브루치(Abruzzi)의 이세르니아에서
출생한 피에트로 디 모로네는 시골 농부의 12 아들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는 20세 되던 해에
은수자가 되었다가 사제가 되려고 자신의 움막을
떠나 마침내 로마(Rome)에서 서품을 받았다.
1246년에 그는 파이졸라의 베네딕토 회원이 되었고,
술모나 근방의 몬테 모로네에서 은수생활을 계속할
허락을 받았다. 많은 군중들을 피하여 5년을
이렇게 살다가 2명의 동료와 함께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몬테 마엘라로 숨어들었으나,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지금은 수도원이 된 몬테 모로네로 되돌아와야만
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적용시켰지만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274년 그는 자신의 은수자회인 첼레스티누스회를
승인 받았으며, 교황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의
서거 후에 정치적인 알력 때문에 2년간의 교황직
공백 기간이 발생하자, 피에트로는 추기경들에게
위협적인 언사로 새 교황을 즉각 선출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추기경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84세의 노령인 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294년 8월 29일에 코일레스티누스 5세
(Coelestinus V, 또는 첼레스티노)로 등극하여
혼란하던 교회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는 건강과 직무의 과중함을
이유로 들어 1294년 12월 13일에 교황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와 버린 유일한
교황이다. 가예타니(Caetani) 추기경이 그를
승계하여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로
등극하였으나,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으로
번지자 그는 코일레스티누스 5세를 아나니(Anagni)
근교의 푸모네 성(城)에 감금하였다.
코일레스티누스는 이 성에서 10개월 만에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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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치리아카(Cyriaca)
축일 5월 19일
성녀 키리아카(또는 치리아카)를 포함해서 6명의
그리스도인 처녀들이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황제 때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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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칼로케루스(또는 칼로체로(Calocerus)
성 파르테니우스(Parthenius)
축일 5월 19일
교회가 같은 날에 합당한 공경을 드리고 있는
성 칼로케루스(또는 칼로체로)와 파르테니우스
(Parthenius)는 형제지간이다. 그들은 데키우스
황제의 아내인 트리포니아의 궁에서 침실 경호
책임자 및 경비원으로 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해야할 궁지에 몰리자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 당시에 신자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은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게 하고
이를 거절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어 즉시
처단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르메니아인들로서
에밀리아누스라는 영사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가
그들의 후원자가 죽게 되어 궁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들은 불 속에 던져졌으나 타지 않았기
때문에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목을 베었다고
전해온다. 그들의 시신은 아나톨리아에 의해
칼리스투스(Callistus)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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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필로(Theophilus)
축일 5월 19일
테오필루스는 하느님의 벗이라는 뜻
성 테오필루스(또는 테오필로)는 이탈리아
코르시카(Corsica) 섬의 작은 마을인 코르테에서
태어났고 본래의 이름은 비아지오 아리기
(Biagio Arrighi)였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깊은 신심을 길렀는데,
주일이면 성당에서 들은 강론을 집에서 되풀이
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15세의 나이로 카푸친회에
입회 신청을 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하다가 2년 뒤에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면서 테오필루스
(하느님의 벗이라는 뜻)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로마(Rome)와 나폴리(Napoli)에서 사제 수업을
마치고 1700년에 사제가 되었다.
1705년 그는 선교 사제로 임명되면서부터 놀라운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설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작은 형제회
내부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서도 열성을 갖고
활동하였다. 그는 푸체치오에서 선종하였고,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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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푸덴티아나(Pudentiana,)
성 푸덴스(Pudens)
축일 5월 19일
\성녀 프락세데스(Praxedes, 7월 21일)는
로마 사람으로 로마 원로원 의원인 성 푸덴스의
딸이며 성녀 푸덴티아나(Pudentiana, 5월 19일)와는
자매간이다. 그들은 모두 성 베드로(Petrus)에
의해 개종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 푸덴스는 디모테오 2서 4장 21절에 언급된
푸덴스와 같은 인물로 믿어지며,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성사록에 그의
축일이 언급되어 있다.
황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리스도인들을
사냥할 때 성녀 푸덴티아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돈이나 기타 방법으로 매수하여
구출했는데, 마침 성녀 프락세데스도 그녀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성녀 푸덴티아나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성녀 프락세데스와 그녀의 아버지
성 푸덴스(Pudens) 그리고 성녀 푸덴티아나는
순교하여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의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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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필로테로(Philoterus)
축일 5월 19일
니코메디아의 귀족인 성 필로테루스(또는 필로테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행전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다지 신뢰할만한 것은 아니다.
♡5월 19일 오늘의 성인♡
2016. 5. 20. 오후 1:51:17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