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3월 15일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
St. Louise de Marillac
Santa Luisa de Marillac Vedova e religiosa
15 August 1591 at Meux, France -
15 March 1660 at Paris, France of natural causes; body incorrupt
Beatified : 9 May 1920 by Pope Benedict XV
Canonized : 11 March 1934 by Pope Pius XI
크리스찬 사회사업가들의 주보 성녀.

성 루이즈 드 마리약은 1591년 8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한 정치가들을 탄생시킨 귀족 드 마리약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푸이시에 있는 수도원에 맡겨져 교육을 받으며 자란 루이즈는 1613년
본래 수도자로 살고 싶어하며 결혼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거절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청원서 심의관 앙투안 드 그라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후에도 영적독서로 영성을 성화시켜 나갔고 부르심을 받고도
부름심을 따르지 않았던 괴로움에 어두운 밤과 같은 영적인 시련을 거쳐야 했다.
1623년 성 니콜라스 성당의 성령 강림절 미사에서 루이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의 순간을 체험했다.
그날 자신의 모든 이기적인 야심과 인간적인 계획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1624년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만난 루이즈는 1625년 남편 앙트안이 세상을 떠나자,
남은 생애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만 모두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후 루이즈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도와 1633년 가난한 이들의 종이라 불리우는
지금의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였다.
1660년 3월 15일 69세를 일기로 자신과 함께 사도직을 수행했던 자매들과 협력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 그녀는
1934년 3월 11일 성인품에 오르셨고 1960년 2월 16일에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모든 크리스챤 사회사업가들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홈에서)

그녀의 임종 때, 프랑스 내에는 이미 4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돕는 구호소는 수 없이 많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이는 곧 그리스도이시니..."

1617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샤티옹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애덕부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어느날, 평소대로 빈첸시오는 미사를 집전하기위해 제의를 입고 있을 때,
한 부인이 외딴 집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의 처참한 환경에 대해 말하였다.
전 식구가 다 아파 몸져 누워있으나 그들을 돌봐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빈첸시오는 측은함이 넘친 강론을 하여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사후, 빈첸시오는 그 외딴집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가는도중,
빵과 약품 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하루에 그 집을 방문하고 그 다음날에는 전혀 방문하는 이들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조직적인 봉사단체가 필요함을 깨달았고,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위하여 애덕부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렇게 창설된 애덕부인회는 프랑스 전체로 그 조직이 커 나갔다.
귀족 부인들로 구성된 애덕부인회는 본당이나 마을에 가난하고 병든 환자들을 방문하여 돌보았고,
자선병원 등에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애덕의 마음은 넘쳤으나, 그들의 대부분이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활동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아, 때때로 그들은 자신들의 하녀들에게 대신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애덕부인회는 증가했으며 빈첸시오는 루이즈 드 마리약에게
애덕부인회를 맡기며 하느님의 다른 뜻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중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봉사하고 싶다는 원의를 품은 한 양치기 소녀가 빈첸시오를 찾았다.
빈첸시오는 말가릿 나조와 같은 지향을 갖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하는 자매들을 모아
루이즈에게 맡겼다.
1633년 11월 29일. 6명의 처녀들이 성 루이즈 드 마리약에게 맡겨졌으며
이로써 최초의 활동회인 사랑의 딸회를 창설되었다.
그당시, 교회에서는 수녀들이 수녀원 담밖을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실질적인 활동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빈첸시오는 수도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의 딸회라 이름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1655년 파리 대주교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1668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로마에서 승인되었다.
성 빈첸시오는 사랑의 딸회 창설 당시부터 1625년에 창설한 빈첸시안 선교회 (라자리스트회)
총장신부에게 사랑의 딸회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성 루이즈 드 마리약이 본회의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청한 것이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홈에서)

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이하)’는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에 놓인 이웃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못 본 척 외면하는 사람. 동정심은 지니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
그들의 무능을 내심 질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돌보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다.
성 빈체신오 아 바울로(1581-1660)는 ’애덕부인회(1617)’, ’선교회(라자리시트회.1625)’,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1963)’을 설립하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된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들의 주인"이라며 스스로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청했다.
빈첸시오는 1581년 프랑스랑드 지방의 푸이에서 검소하고 성실한 가정의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배웠다.
가난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가정교사로 일해 스스로 학비를 벌었던 그는 19살 때 사제로 서품된다.
그러나 그는 서품 5년째인 1605년 마르셀리나로 여행을 하는 도중 터키의 해적을 만나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빈첸시오는 연금술사로부터 병을 고치는 법과 화학,물리학 등을 배웠는데
이는 나중에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데 요긴하게 쓰여졌다.
그 후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나 냉담하고 있던 농부를 회두시킨 그는 농부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훗날 그 농부도 로마의 한수도원에 입회했다.
빈첸시오는 가난하게 컸고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 내적 갈등도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피에르 베륄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이들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께 봉사하겠다고 서약하기에 이른다.
1617년 빈첸시오는 병들고 불쌍한 이들을 돌볼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평신도 여성들의 봉사 단체인 ’애덕부인회’를 만들었다.
40세가 됐을 때는 노예들을 찾아가 돌봤으며, 활동의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해
1625년 남자 수도회인 ’선교회’를 창설했다.
이어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을 받아 1633년 ’가난한 이들의 종의 회’라고도 알려진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를 청설했다.

빈첸시오의 협조자가 된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1591-1660)은
어릴 적부터 수도자가 되고 싶었던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앙뜨완과 결혼, 아들 한명을 낳았다.
남편이 일찍 세상으 떠난 다음 그녀는 빈첸시오가 일하고 있던 ’착한 어린이들의 학교’근처에서 살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루이즈는 빈첸시오와 만나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이 가져온 내면적 어둠을 이웃에 대한 봉사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즈가 빈첸시오 모르게 받아적었던 훈화는
빈첸시오가 수녀들에게 직접 썼던 방대한 양의 편지와 함께 그의 영성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빈첸시오는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많은 여자 수도회가 봉쇄 구역 안에서 페쇄적인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랑의 딸들은 병자들의 집과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며 셋방이 수녀들의 독방이다.
성당은 본당 성당을 사용하고, 도시의 거리가 바로 봉쇄 구역이며,
병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빈첸시오에게 기도는 필수적이었고 그는 수녀들에게도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세속에서 일하는 수도자들은 봉쇄 생활을 하는 수도자보다 죄지을 기회를 더 많이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빈첸시오는 또 수녀들이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내 모든 자매가 어디에 있든간에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Incorrupt body of Saint Louise de Marillac.
Picture taken April 20, 2001, by Joann.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육화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겼다.
그는 주인이 불렀을 때 즉시 달려가는 착한 종처럼,
하느님이 불렀을 때 즉각적으로 순명한 옛 예언자들처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가는 모습은
마치 불이 났을 때 달려 가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집, 자기의 가장 소중한 물건에 불이 붙어 사랑스런 가족을 위협하고 있을 때 취할 행동,
바로 그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태도여야 한다는 것이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가족
루이즈 드 마리약은 매우 바쁜 여성이었다.
그는 성 빈첸시오 드 폴과 함께 ‘애덕의 수녀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요한 23세 교황은 그 공을 받들어 그를 사회사업가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하였다.
루이즈는 어린 시절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일생을 수녀원에서 보낸 ‘전형적인’ 수녀는 아니었다.
그는 남편이 죽기 전까지 12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고,
외아들 미셀을 낳았으며 언제나 그를 마음에 두고 살았다.
그의 자서전에는 “수도 생활을 하며 온갖 일을 다하는 중에도 결코 아들을 잊지 않았다.”라고 씌어 있다.
루이즈는 아들이 장성한 후에도 결코 그를 홀로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아들을 마음에 가까이 두었고 임종 순간에도 마지막으로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축복했다.
우리가 아무리 생활에 쫓긴다고 하더라도 루이즈의 모범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일을 하는 데 바쁘더라도
우리 자신이 가족의 축복이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족 중에 소홀히 대한 사람은 없었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야기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