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보나벤투라

2005. 7. 15. 오전 8:50:22

글자

오늘의 성인 성 보나벤투라를 소개합니다.

 

성 보나벤투라

 

유년시절

 

성 보나벤투라는 1217년에 중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이해하려면 그보다 12년 전인 1205년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교회의 십자상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은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말씀은 그에게 새로운 신앙 수도회를 세우도록 인도했다. 4년 안에 성 프란치스코는 교황 이노센트3세의 승인을 얻어냈다. 젊은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온갖 종류의 생업에 종사하는 추종자들을 끌어 들이면서 중부 유럽으로 전파되고, 곧 이어 스페인, 영국, 아프리카, 중동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들의 생활 철학은 단순성과 가난에 근거를 두었다. 보나벤투라가 태어날 즈음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500개 이상의 회의와 많은 학교를 설립했으며, 그 중 하나는 보나벤투라가 태어난 마을 근처에 있었다.

 

보나벤투라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작은 마을 바뇨레지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존 디 피덴사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약간 수완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지방의 내과 의사였다. 물론 당시의 의술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예방접종, 혈청, 엑스레이 등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 디 리텔로였다. 그의 양친은 독실한 신자들이었으며 어머니가 특히 더 그랬다.

 

어린 존은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내며 건장하게 성장할 즈음 11살이 되던 1228년에 심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 당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들이 서서히 쇠약해지며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기도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존의 어머니는 달랐다.

 

마리아는 성 프란치스코가 몇 해 전에 그 지역을 방문했을 때에 그를 만났던 것이 분명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1226년에 돌아가셨으며 그의 위대한 성스러움과 하느님에 대한 공경의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나갔다. 실제로 그는 서거 후 불과 2년 만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시성 되었다. 마리아는 성 프란치스코에게 서원하였다. 우리는 그 서원이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만약 프란치스코가 그의 아들의 목숨을 구해 주도록 하느님께 중재해 준다면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기로 서원하였다.

 

그녀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

 

어린 존은 치유되었다. 나중에 존이 기록하기를 저는 성 프란치스코의 중재에 힘입어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졌습니다.

 

학업의 시대 그리고 프란치스코회에의 입소

 

존은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그 지역 프란치스코 수도회 학교에 들어갔으며 거기서 그는 아주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 졌다. 마침내 17세에 더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보냈다.

 

우리는 17세의 존이 어떻게 중부 이태리에서 파리까지 여행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는 로마의 항구인 오스티아로부터 남 프랑스의 니스까지 배로 여행한 후 육로로 로와르 계곡을 지나 파리에 갔을 것이다. 또는 육로로 이태리 반도를 올라가 북쪽으로 알프스를 넘어서 다시 서향 하여 파리에 갔을 수 있다. 어쨌거나 그것은 힘들고 위험한 여행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알 수 있듯이 그 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그 여행을 했다.

 

존은 지체 없이 새로운 환경에 자리를 잡아갔다. 그의 동료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그의 명석함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모든 해답을 알지 못함을 깨닫고 끊임없이 더 배우고 싶어하는 10대의 학생이었다. 학급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무언가 또 다른점, 즉 그가 몹시 겸손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떤 종류의 영예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존이 공부를 계속할 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계속 번창하여 수천 개로 불어났다. 존이 파리에 도착한 후 오래지 않아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인 영국사람 헤일의 알렉산더가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이것은 수도회로서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수도회가 대학의 일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부수 효과로서 그것은 또한 수도회 내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단순성을 추종하는 세력과 지적인 노력을 추가하고자 하는 세력간의 갈등을 점점 더 확대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훗날 이 두 세력간의 갈등은 존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243년에 존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이름을 보나벤투라 (영어로 보나벤쳐)로 정했으며 이태리어로의 뜻은 행복한 여행이다. 이 이름으로 그의 남은 일생동안 불려졌으며 수 세대에 걸쳐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했으며 5년 후에 거기서 교수 자격을 얻었다. 이 즈음 그의 첫번째 저서가 탄생했다. 그 후 그는 계속 저술 활동을 해 나갔다. 그의 저술들은 아주 중요했으며 신학적인 질문들을 분석하였다. 예를 들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전반적인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하여 저술하였다. 우리가 웅대한 그의 마음을 여기서 다 알 수는 없다. 그의 저서는 아홉 질이며 각 페이지는 두쪽씩이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저서는 연구되고 있으며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

 

수도회의 수도원장 그리고 추기경

 

보나벤투라는 안개 속에 산 사람은 아니다. 그는 일상의 업무를 항상 깊은 겸손의 마음으로 수행했다. 보나벤투라의 또 다른 면이 모든 사람들 특히 교황님에게 뚜렷하게 알려졌다. 그의 위대한 영성과 그가 지녔던 존경심, 그리고 어떤 문제의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그는 더욱 더 자주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중재자로 초청을 받았다.

 

그 뒤 6년 동안 그는 교수직을 계속하고 저술활동과 개인적 연구활동을 하였다. 1254년에 그는 신학의 대가로 임명되었으며 파리의 프란치스코 대학의 대표직을 넘겨받았다.  1256년에는 대학내에서 심각한 논쟁이 발생하였는데 생활 방법으로서 극도의 단순성을 지향하는 프란치스코회 등을 포함한 종교적 수도회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었다. 그는 그들의 이상에 대하여 고무적인 옹호를 하였다.

 

1년 후인 1257년 수도회내에서의 길고도 팽팽한 논쟁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교황 알렉산더 4세가 개입하였다. 그는 당시 수도회의 수도원장을 사퇴하도록 비밀 지시를 내렸다.

그는 팔마의 존이었는데 자기 후임에 보나벤투라를 추천하였고 교황은 그를 승낙하였다. 보나벤투라는 로마에서 열린 총회에서 수도원장으로 공식적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나이는 40세였다.

 

수도원장으로서 보나벤투라는 매우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는 파리를 수도회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수도회 내에서 가난하고 단순한 이상을 추구하며 사람들 가운데서 사목활동을 하고자 원하는 수도회 내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매년 로마로 여행을 하였다. 로마에 머무를 때는 자기의 관심분야나 교황님의 관심분야에 관한 문제들을 가지고 교황님과 토론하였다.

 

이러한 방문 중에 그의 부모님을 뵈올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가 17세의 소년으로 떠난 후 23년의 세월이 흐른 뒤라서 그럴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우리는 그랬었기를 바란다. 그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을 것인가.

 

그가 프란치스코회의 대표직을 인계 받은 후 최초로 하고자 한 일은 그 큰 수도회를 통합하는 일이었다. 그는 마침내 해냈다. 1260년에 수도회는 보나벤투라가 작성한 새로운 칙령을 채택하였다. 보나벤투라가 쓴 새로운 성 프란치스코의 일대기가 공식 일대기로 채택되었으며 모든 다른 작품은 파기 되었다. 어떤 이에게는 보나벤투라가 수도회의 제2의 창시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간 중에 모든 유럽과 전세계에 확산되는 수천개의 수도회를 관리하면서도 그는 저술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시간을 내었다. 그는 연속되는 설교집을 발간하였고 또한 로마에의 여행을 계속하였다.

 

1273년에 그의 업적을 인정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높은 영예에 대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잘 모른다.

 

그의 생애의 축복

 

그 다음 해에 보나벤투라는 교황을 도와 리용의 제2차 회의를 준비하였다. 그는 이 회의에서 특히 여러 가지 개혁과 조정운동 등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회의가 속개되는 도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서거하였다.

 

보나벤투라는 1274년 7월 15 갑작스럽게 서거하였다. 그는 당일자로 교황님, 추기경, 수도원장이 지켜 보는 가운데 안장되었다. 그 광경은 이렇게 적혀있다. 그리이스인이나 라틴인, 성직자나 일반 신도들 할 것 없이 그런 위대한 인물을 잃게 됨을 애도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의 관을 따랐다.

 

보나벤투라는 1482년 4월 14 1588년 3월 14 시성 되었고, 이 가장 겸손한 사람은 교회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받았다. 그는 교황 식스투스 5세에 의해 온 세상 교회의 박사로 선언되었다. 오늘날 전세계 천주교회는 7 15일을 그의 축일로 지낸다.

 

후기

 

성 보나벤투라의 일대기는 특별히 따로 없다. 그러나 바오로출판사의 서양 정신사의 고전이나 맥그로힐의 세계 일대기 대사전 등에 여기 저기 조금씩 나타날 뿐이다.

 

번역: 강능원 멜라니오, 2003.7.15.

원전: http://www.catholic-church.org/stbonaventure/stb2.html

 

댓글 1

  • 2005년 7월 15일 오후 12:03

    글 너무 너무 잘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많이 부탁 드립니다.

묵상의 나눔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