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어떤 관계

2008. 3. 2. 오전 6:27:54

글자
 
 
 
 
 스 송을 다시 만난 것은 십이 년만 이었다. 유난히 "어머!"라는 감탄사를 즐겨
쓰던 그녀는 분명 송미숙이었다. 나는 한 순간 엉켜버린 세월의 실타래 앞에 장승
처럼 굳어버린 채, 결코 예사롭지 못한 상황에 점점 아득해지는 느낌을 어쩌지 못
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나 온 십여 년 세월동안 가슴 저 밑바닥에 침잠한 채, 이따금씩 동틀 무
렵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책갈피에 고이
접어 말려 둔 검붉은 장미꽃잎이 파스스 부서지는 아픔으로 아릿하게 저며오기도
했다.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는다 했던가. 이렇듯 그녀라는 존재가 그토록 애틋하게
가슴에 앙금처럼 남게된 까닭은, 석연치 않은 이별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누구신데요?"
이제껏 뒤쪽에 우두커니 서서 황당한 사건현장을 철저히 살피던 아내가, 이쯤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듯 참견하며 들어왔다. 비록 말투는 나긋나긋 깔아 누이고
입 꼬리 마저 올렸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배어져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인사가 늦었군요. 강선생님은 한국에 있을 때, 교회에서 알던 분
이세요. 그런데 부인께서 어쩜 그렇게 고우세요."
역시 그녀다웠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어느 한적한 서울 변두리 교회에서였다. 군복무시절
같은 내무반에 동기와 함께 외출을 나왔다가 그가 다니던 교회에 동행했던 터였고,
그곳 성가대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한눈에 홀딱 반해버린 나는 사람 좋은 그를
졸라 그녀를 알게된 후, 제대 후에도 교제를 계속해오는 처지에 이르렀다.
급기야 난생처음 그녀를 인생의 반려자로 생각했고, 고작해야 손이나 잡는 선에서
스스로 만족해하며 제 물건 아끼는 즐거움을 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들어 온 외화 한편을 볼 작정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침 외출 중이었다. 빗나가 버린 예정시간. 딱히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혼자서라도 영화관람을 하기로 했다. 얼마 후 종영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관
객들이 꾸역꾸역 출구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뒷모습이 앞서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설마 하는 기분이 되어 그 움직임을 주시했
다. 그 뒷모습은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건장한 사내의 팔짱을 낀 채,
사뭇 매달려 가듯 하고 있었다. 다정한 연인임을 한눈에 알 수 있듯이... .

그랬는데, 한쪽 계단을 다 내려간 그들이 다음 계단으로 접어들기 위해 돌아서는
순간, 난 하마터면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팔짱을 꼬옥
낀 채 아양 떨 듯 하던 그 여자는 다름 아닌 미스 송이었다.
그 다음에 내가 어떻게 그 계단을 내려왔으며, 집에까지 도착했는지 지금도 알 수
가 없다. 다만 그날 정신없이 퍼마신 술 때문에 다음날 정오까지 거의 혼수상태
였다는 기억밖엔.

그후 그녀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부재중이라는 핑계로 일절 받지 않았다. 끓어오
르는 증오심으로 쉽게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증스러운
그녀의 목소리조차 듣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기를 수 차례... .
업친데 덮친다고 했던가. 가전제품 도매업을 하며 제법 잘 돌아가던 친구가 딱 삼
일만 돌려쓰면 된다며, 그 즈음 상당한 회사공금을 빌려간 후 부도를 내고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급기야 도망자를 좇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해
한해를 나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숨어 지내야 했다.

그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주위사람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회사측과 일단 합의를
보는 선에서 서울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는 다소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그제서야 설마하던 그때의 의구심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토록 감쪽같
이 나를 속일 수 있었을까? 기막힐 정도의 그 완벽함에 질려버리다가도, 끝내 자
신이 매달리고 있는 쪽은 역시 설마였다. 그만큼 세월이 흘러서일까. 자꾸 생각할수
록 그녀가 그립고 보고싶어졌다. 더구나 그해 여름은 그냥 숨어 살 때와 달리 현실
적으로 가혹하리 만치 잔인했다. 돌아 온 자에게 남겨진 것은 구제금융으로 떠 안
은 부채뿐이었다. 그만큼 나는 지쳐있었고, 마침내 그녀를 찾아 나서기에 이른 것이
다. 직접 만나서 확인한다는 그럴듯한 명제를 앞세우고.
하지만 내게 돌아 온 것은 그녀가 갑작스레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떠나버렸다는 우
울한 소식이 전부였다. 그 동안 여러 번 나를 찾아 왔었다는 사연과 함께... .

"어디 이 근처에 사시나봐요?"
그녀가 짐짓 아내를 향해 묻는 듯 했다.
"아니에요. 저흰 캐나다에서 왔어요. 이번에 우리 이이가 자꾸 여행을 가자고 해
서...여기 뉴욕은 처음이죠. 지나는 길에 마침 한인상점 같아 몇 가지 살까하고 들렸
는데, 이런 좋은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군요. 그냥 지나쳤더라면 꽤나 섭섭할 뻔했어
요. 안 그래요, 여보?"
아내는 말꼬리 끝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나의 반응을 보려는 듯 시선을 매달아 두
고있었다. 나는 내심 아내의 한계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저 애가 댁의 아드님인가 봐요? 아주 잘 생겼네. 그래, 몇 살이지?"
"다섯 살이에요, 해야지."
그때 마침 가게 안쪽에서 사무실인 듯한 문이 열리며, 키가 작달막한 사내가 누런
서류봉투를 들고는 이쪽을 향해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여보, 인사하세요. 한국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시던 분이세요."
사내는 무심히 지나치려다 붙잡힌 걸음이 되어 멈칫했다.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거 어떡하죠. 급한 볼일이 있어놔서...이거, 초
면에 실례부터 해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신경 쓰시지 말고 어서 일 보세요. 바쁘신가 본데... ."
아내가 얼른 나서서 손사레를 치며 답례를 했다.
"예, 그럼."
사내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이내 바깥으로 사라졌다. 나는 사내가 방금 빠져나간
출입문 쪽을 넋 나간 사람모양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요? 어서 물건 고르지 않고."
아내가 기어이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바라보았다.
"너 이거 좋아하겠구나. 이건 아줌마가 널 만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야."
그녀가 가게카운터 위에 놓여있던 몽키인형을 집어 아이를 향해 흔들자, 빠른 템
포의 신나는 음악소리가 났다. 이윽고 아이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웃으며 아이를 향해 카운터에서 내려왔다.
그때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가 심하게 다리를 절고 있는 게 아
닌가. 아내도 뜻밖이었다는 듯, 아이에게 인형을 건네주는 그녀의 다리께만 바라보
고 있었다. 다시 그녀가 카운터로 돌아가고 난 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제서야 아내가 아이에게 건성으로, 고맙습니다 해야지 한 마디 해주고는, 그대로
아이의 손목을 이끌어 진열대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내와 저만큼 거리를 두고 나서야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뜻밖이었다. 모든
것이. 그렇다고 그 지경이 된 그녀의 불행에 관해 그냥 모른 척 할 수도 없지 않은
가. 나는 한번 더 마른침을 삼킨 후, 더듬거리듯 물었다.
"아니, ...어쩌다가?"
그녀는 씁쓸하게 웃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다시 야릇한 어색함이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나는 그 침묵을 깨듯 무심코 한 마디 툭 던졌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잠재되어 온 물음이었을 것이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해 보세요."
그녀는 해사하게 웃어주었다.
"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보셨죠? 종로 피카디리
극장에서...웬 키 크고 몸집 좋은 남자하고...?"
갑자기 십여 년 전으로 곤두박질치는 세월과 토막쳐 쏟아 내놓는 낱말의 홍수 속
에, 그녀는 잠시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바깥양반이 그때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언제인가 느꼈던 설마하던 기분을 이번엔 기필코 확인하고 말리라는 충동으
로 이미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오래도록 아무 말이 없던 그녀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그랬었군요."
"기억나십니까?"
나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회사 근처로 몇 번을 찾아가 묻기도 했고요. 그날도
그 때문에 버스에서 내려 찻길을 건너는데...노란 색 개인 택시였어요."
"아니, 그 그게...무...무슨...?"
그녀의 입 꼬리에 설핏 씁쓸함이 번지는 듯 하더니,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그때 그 사람은...사촌오빠였어요."
이윽고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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