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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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존 레논 피살과 두 팬의 자살

외적으로 어려울 때일수록 내적으로는 더 심화되고
또 '마음의 눈'이 열려서 인생을 더 깊이 볼 수도 있습니다 .
지금이 만약 시련의 때라면 오히려 우리 자신을 보다
성장시킬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모든 사람이 죽기를 싫어하고,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결국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비록 당장의 즐거움이 없다 해도
내일의 즐거움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즐겁기 위해 살려고 합니다만
현실은 너무나도 익살스럽습니다.
원하는 즐거움 대신에 싫어하는 고통만으로 우리를 맞아 줍니다.
삶의 이유가 되는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하여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혜택도 균형을 잃은 현 사회제도 하에서는
도리어 빈부의 극심한 차이를 벌려 놓았고,
따라서 계급과 민족의 갈등이 끝날 날이 없으며
여전히 기아와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혜택에서 배척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합리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증오는 투쟁으로 발전하고
투쟁은 전면 전쟁으로 번질 지도 모른다는
검은 먹장구름 같은 세계 기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 한심한 일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고성능 무기의 위협을
우리 자신이 당하고 있다는 익살스런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밖에서 우리 즐거움을 찾기란 매우 힘든 사회요 현대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안에서 찾기란 더욱더 힘듭니다.
확실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는 원하는 바를
차지하지 못하는 싸늘한 현실에서 오는 고독과 번민,
원하지 않는 고통 앞에서 당하는 불안과 공포,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숙명적인 절망, 그것뿐입니다.
결국 이 같은 고독과 번민, 불안과 공포를 거슬러 싸우고 싸워도
마침내 패배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결정적인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군상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80년 존 레논이라는 가수가 피살되자, 레논의 젊은 팬 두 사람이
"우리는 절망했다!"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그들의 절망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수들을 만난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 나는 죽음이 임박한 그들에게서 말할 수 없이 조용한
내적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자유도 없고, 더구나 풍요와는
거리가 먼 그들에게 절망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은 그들의 실존적인 어둠을 밝혀 주는
진짜 빛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 젊은 자살자에게는 그 빛이 레논 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빛은 참말로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할 때 발견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과 개성이 있기에 인간입니다.
성서적인 창조를 전제하지 않은 채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적(神的)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가치를, 내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를 인식할 때,
우리는 이웃과 타인을 비로소 다시 보게 됩니다. 그것이 빛입니다.
사랑이 싹틀 때, 그것이 빛입니다. 이런 경구가 있습니다.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는 빛을 낼 수 없다.'
빛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불태워야 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죽기까지 가는 것이고 생명까지도 바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란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스스로 인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인식하고 스스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면,
거기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나는 모든 문제의 근본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치의 경우,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하고, 경제면에서는 돈보다 인간을 앞세우는
경영이 바람직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왔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곤경과 어려움은
훨씬 덜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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