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 그분의 참된 마음은

2015. 8. 19. 오후 1:51:08

글자
[주제가 있는 수필]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그분의 참된 마음은
 
박형규(목사, 남북평화재단 이사장)
 
 
내가 김수환 추기경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봄, 지학순 주교와 내가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일 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고 나온 직후였을 것이다. 지 주교가 원주에서 사제, 신도들과 유신체제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일 때, 이에 호응해 서울에서도 천주교 사제들과 개신교 목사, 전도사들이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학생회관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종로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까지 성경과 소금을 들고 시위행진을 하다가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는 사건이 있었다. 나는 지 주교의 ‘반유신=민주화 운동’이 천주교 전체에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간혹 원주에 가서 지 주교를 만났다.
 
어느 날 지 주교께서 “나와 함께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보자.”고 하시면서 추기경이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성명을 낸다면 민주화 운동이 천군만마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 주교는 김 추기경과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했고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 명동에 있는 추기경 공관으로 갔다. 젊은 비서신부의 안내를 받아 추기경 집무실에 갔는데 안에서는 두 분이 담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추기경은 일어나 문 쪽으로 오셔서 내 손을 꼭 잡으며 “그 동안 고생 많았소.” 하면서 당신 오른편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나는 커피 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은 지 주교의 안색을 살폈다. 살짝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나는 속으로 얘기가 잘 된 것으로 알고 긴장을 풀었다.
 
그날은 추기경을 처음 만난 자리라 나는 말을 아꼈다. 지 주교는 나를 소개하고는 추기경과 당신은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동창이요 동지로서 한 사람은 추기경으로서 나라 한복판에서 교회와 나라를 위해 일하고 또 한 사람은 변방인 원주에서 역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등 농담 섞인 말씀으로 첫 만남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애쓰셨다. 그리고 주교회의에 관해서는 추기경께서 의견을 받아들여 일정을 정하고 회의장소도 알려줄 것이니 그날 근처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때 정말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기분으로 들떠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과연 주교회의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교회의가 열린 곳은 서울 외곽의 어느 수도원이었고 나는 지 주교가 마련해 준 작은 방에서 기다렸다. 두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주교들이 해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 주교가 들어와 침통한 음성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뒤로 추기경과 나의 만남은 정례화되고 빈번해졌다. 추기경은 내게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특히 학생들과 노동자와 농민 특히 도시빈민 조직운동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어하셨다. 때로는 나의 사정 때문에 새벽에 가서 아침식사를 대접받으면서 얘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정부의 앞잡이 노릇하는 폭력배들에게 구타당해 성모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친히 병실로 찾아오셔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셨다.
 
주교회의는 추기경과 다른 의견이었지만 그 대신 ‘정의구현사제단’이 활동을 개시하고 신구교의 사회선교협의회가 발족하게 된 것도 김수환 추기경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전국민적 추모 행렬을 보면서 김 추기경의 숨은 민중 사랑의 업적이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고 감탄하면서도 그분의 참된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고 걱정도 해보았다.
 
박형규 - 서울제일교회 목사로 20년 동안 시무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KNCC 인권위원장,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지금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이다.
 
[경향잡지,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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