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진홍색 수단

2015. 5. 17. 오전 9:39:02

글자
[주제가 있는 수필]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진홍색 수단
 
박영식 요한(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총장)
 
 
25년 전 나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비서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김 추기경님은 고위 성직자이셨으나 당신을 낮은 사람,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동일시하며 산 분이셨다. 당시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여서 고통 받는 사람들도 그만큼 더 많았고, 명동성당과 주교관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김 추기경님은 그들에게 한결같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셨다. 당신 자신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틈에서 태어난 농촌의 아들임을 잊지 않으셨다.
명동에서 사람들이 정부를 상대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인권 회복을 외치는 사람들 사이를 겨우 빠져나온 김 추기경님의 자동차가 남산 1호 터널로 진입하였다. 터널 중간쯤 지날 때 김 추기경님은 앞좌석에 앉아있는 나를 부르셨다.
 
“박 신부, 이것 좀 보게!”

“예!”하며 뒤돌아보자 추기경님은 당신이 입고 계신 진홍색 추기경 수단을 가리키셨다.

“박 신부, 이 수단 말이야. 이게 어떤 옷인가! 추기경의 지위를 대표하고 표시하는 진홍색 수단이 아닌가? 이 수단의 빛깔을 보게나! 주검의 빛깔이 아닌가!”

나는 엉겁결에 “아! 예, 그렇습니다. 참 묘하고 신기하네요!” 하고 대답하였다.
 
김 추기경님은 차분하면서도 의연한 목소리로 말씀을 이어가셨다. “빛의 세계에서 빛과 함께 머무는 동안, 곧 햇빛을 받는 동안 이 수단은 아름다운 빛깔을 지니고, 화려함과 높은 지위도 나타낼 수 있지만, 빛의 세계를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어둠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시체나 다름없는 거야! 그렇지. 내가 추기경으로 존경받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야.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지 않으면, 이미 죽음을 안고 사는 존재, 죽은 존재야! 역겨움을 자아낼 뿐이지! 이 수단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 하느님을 반사하고 어둡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기운을 전하라고 있는 거야!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라.’고 있는 거야!”
 
김 추기경님의 말씀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역시 큰 어른이셨다. 사제가 된 지 몇 년 안 된 어린 신부였던 나에게 추기경의 옷은 그저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나타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김 추기경님은 그 옷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라는 표시로 알고 계셨다. 김 추기경님은 당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알고 계셨다. 김 추기경님은 추기경의 지위가 하느님 안에서 이웃에게 봉사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평소에 깊이 인식하고 산 분이셨다. 겸허한 김 추기경님의 삶의 모습은 그러한 신앙과 철학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기에 그만큼 꾸밈없고 순수하며 모든 이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권하는 유언 말씀은 오늘도 나에게 겸허하게 살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강력한 말씀으로 다가온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보는 혜안을 가지셨던 김 추기경님의 모습을 닮아 진솔하게 살며 약한 이들을 위하는 사제로 거듭나고 싶다.
 
박영식 요한 - 서울대교구 신부. 1984-1987년 김수환 추기경 비서신부로 일했으며, 교황청 성서대학 성서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가톨릭 대학교 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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