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있는 수필]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이 보낸 편지
구중서 베네딕토(문학평론가)
김수환 추기경은 1986년에 가톨릭 대학 의학부 교수들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썼다. 그해 봄 신입생 선발에서 3명의 응시생이 지체장애라는 이유로 불합격이 된 뒤였다. 김 추기경은 이 장애학생들에 대한 재심을 간청하는 편지를 교수들에게 쓴 것이다.
그리스도가 약자들을 더 돌보려 하셨고, 이 정신은 가톨릭대 의학부의 창립정신과도 일치된다는 것이 김 추기경이 편지를 쓴 동기였다. 당시 김 추기경은 가톨릭 대학교의 재단 이사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애 학생들의 구제를 위한 재심을 하향식으로 권고하지 않았다. 그는 고된 의학공부가 학생의 건강한 체력을 필요로 함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심사 교수들이 장애학생을 합격시키지 않은 것이 정당한 판단이라고 김 추기경은 편지에서 말했다. 심지어 그는 가톨릭 대학 의학부가 크게 발전한 것은 교수들의 성실한 노력 덕분이라는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함에도 약자를 더 돌보려 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해 장애학생 구제를 위한 재심을 간청한다고 적었다. 김 추기경의 편지가 낭독된 뒤 교수회의는 장애학생 구제를 위한 재심을 거의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지위와 권력을 하향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겸허와 예의를 다해 언행을 하는 것은 ‘인격’에서 나온다. 권력보다 사명이 중요하고 물질보다 인격이 중요하다. 역사의 ‘진보’는 이 중요한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가 “인격에서 ‘진보’를 찾아야 한다.”고 한 것은 미래 세계를 구원하는 데 신선한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민주 투사’란 말을 내세우며 독선적으로 소영웅주의에 빠지면 결국 남을 원망이나 하면서 자기가 책임을 지고 당대의 일을 감당하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역사를 본질적으로 진보시키지 못한다. 진보를 실제로 실현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누구를 보수주의자라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8년에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로서 강화도 심도직물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1971년 성탄 메시지를 통해 독재 정권의 영구집권 획책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당일부터 6일 동안 명동성당에서 반독재 농성을 하던 300여 대학생을 김수환 추기경이 앞장서 엄호했다. 이 농성이 비폭력 항쟁의 명예로운 마무리가 되게 지도한 이 또한 김 추기경이었다. 그리고 이 명동대성당 농성의 기운이 6·29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민주회복의 성취였다. 이것이 김수환 추기경 20년 민주화 운동의 업적이며, 여기까지가 그의 몫이었다.
그 다음의 일들은 정치 분야의 사람들이 감당할 몫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어떤 이는 연로한 김 추기경이 보수주의자로 변모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혜화동 주교관을 방문했을 때, 김 추기경은 세간의 구설에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후 끝이 없던 조문 행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구중서 베네딕토 - 문학 평론가, 수원대 명예교수. 김수환 추기경 평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를 펴냈다.
[경향잡지, 2009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