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역사신문] '호남의 사도' 유항검 일가 5명 순교
[사진설명] 호남의 사도 유항검이 동생 관검과 함께 전주 풍남문이 바라보이는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이 선고된 이들은 자신들의 육신을 찢어발길 소를 앞세우고 가면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탁희성 화백 작.
호남의 사도 유항검(46,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동생 유관검(34), 유항검과 이종사촌간이며 윤지충(바오로)의 동생인 윤지헌(38, 프란치스코), 이우집(39, 유관검에게 교리를 배움), 김유산(40, 토마스) 등 5명이 10월24일 전주 중진영(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능지처참과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유항검과 유관검, 윤지헌은 10년전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자리인 중진영에서 능지처사 됐고, 그들의 시신은 6토막이나 전주 풍남문 누각에 전시됐다.
사형 집행에 앞서 의금부는 10월19일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 4명은 서양 선박으로 조정을 위협해 한판 판결을 내려고 한 계책을 꾸민 '대역부도죄'로, 김유산은 북경을 왕래하며 서양인과 접촉하여 서찰을 전달한 유항검의 연루자로 사형을 선고하고, 판결문을 전라감영으로 보냈었다.
또 의금부에 압송돼 있던 유항검 일행이 전주에서 처형된 것은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의 특별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왕대비가 "이미 사학의 한 부류를 형조에 맡기는 것이 불가한 것은 아니나, 해도(전라도)에 내려보내어 정법(사형)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것도 또한 서울에서 거행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자, 순조 임금이 형조 당상에게 "이미 자교(대왕대비의 명령)를 받들었으니, 곧바로 거행하라"고 명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항검은 진주 유씨 소재공파 8대손으로 '호남의 사도'로 불릴 만큼 호남 지역에 가톨릭 신앙을 전파한 최초의 인물. 남인 출신인 그는 대단한 재산가로 권철신 집에서 가톨릭 교리를 배워 1791년 세례를 받고, 전주, 금구, 김제, 영광 등지에 가톨릭 신앙을 전파했다.
유항검은 '가성직제도'하에서 신부로 임명돼 활동하다, 자신이 독성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성직제도' 중단을 이승훈에게 제일 먼저 건의했다. 이후 그는 '성직자 영입운동'에 적극 나서 윤유일(바오로)를 북경교회에 파견하는데 자금을 후원했다.
유항검은 또 가톨릭를 유대 대신 사회개혁의 원동력으로 세워 봉건 지배계급의 체제를 지탱해 주는 원리인 주자학을 거부하고, 참신한 사상인 천주교로 대체하고자 '서양 선박 청원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활동 자금으로 거금 400냥을 내놓기도 했다.
유항검 자신이 1795년에 작성한 '대박청래' 청원서에는 "신부를 맞아온 뒤에 나라의 단속이 삼엄해서 좁은 우리 나라에서는 절대로 편히 머물러 살 길이 없으며, 성교(聖敎) 또한 따라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서양의 대박을 보내어 일장판결 한 연후에야 신부가 편안할 것이며, 성학도 시행케 될 것입니다"라며 서양 선박을 통한 신앙의 자유를 호소했다.
<평화신문 647호(2001년 10월 14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황사영, 배론 토굴서 '백서' 완성
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 배론의 김귀동씨 집에 은신해 있던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 황사영(27.알렉시오)이 10월29일 중국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비밀 서한을 완성했다.
비단에 해서(楷書)로 또박또박 쓰여져 "백서"로 불리는 이 비밀 편지는 가로 62㎝, 세로 39.1㎝ 크기에 총 1만3384자를 담고 이다.
황사영에 따르면 백서 내용의 70%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최창현, 정약종, 강완숙 등 30여명의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순교열전을 기록했고, 나머지는 박해에 의한 교회의 어려운 상황과 박해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했다고 한다.
황사영은 또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개 방안을 백서 안에 제시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교회 재건을 위해 △ 서양 국가들의 재정 원조 △ 북경교구와의 긴밀한 연락 △ 교황을 통해 청 황제에게 '청의 종주권'을 발동해 조선 정부에 외교적 압력을 청원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 청의 조선 감호책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조선의 국왕을 부마로 삼을 것 △ 선교사와 함께 서양의 큰 선박이 조선에 와서 우호조약을 맺도록 하는 '대박청래'(大舶淸來)를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김귀동의 집에 토굴을 파고, 8개월간 그 안에서 기거하면서 정약종의 하인인 김한빈과 황심 등이 입수한 박해 정보를 토대로 백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은신한 토굴은 김한빈과 김귀동이 팠으며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해 구어진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 저장고로 가장했고, 토굴 천장 위는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모양으로 위장했고, 크기는 김한빈이 한때 같이 숨어 있었을 만큼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만큼의 좁은 공간이었다.
한편, 황사영은 지난 3월25일 김 대왕대비로부터 "3일 내로 잡아들이라"는 특별 체포령이 내려진 인물. 황시복(黃時福)이라고도 불린 황사영은 본관이 창원이며 자는 '덕소'(德紹)로 서울 아현동에서 1775년에 태어났다. 15살 되던 해인 1790년 9월 사마시에 급제해 진사가 된 황사영은 그 해 정약종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정난주)과 결혼하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평화신문 647호(2001년 10월 14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초기 조선교회 신자들의 성모신심과 묵주기도
성직자와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태동해 성장하고 있는 조선 가톨릭 교회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자발적인 신심을 키워가고 있어 주목 받고 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까지의 초기 조선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는 '묵주의 기도'를 매일같이 정성껏 바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신유박해 중 체포된 가톨릭 신자들의 압수품 중 묵주가 가장 많이 나왔을 뿐 아니라, "묵주신공", "성모매괴경", "성모염주묵상" 등이 초기부터 우리말로 번역 출간돼 신자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것이 이 같은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1798-1799년 사이에 순교한 이도기(바오로)와 방 프란치스코는 사형 직전 "성모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라며 큰 소리로 기도하고 치명했다.
1801년 4월 8일에 최창현, 정약종, 최필공, 이승훈 등과 함께 서소문에서 순교한 홍낙민(바오로 또는 루가)은 매일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그는 공무를 집행하는 중에도 그의 집에 많이 찾아오는 손님과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묵주의 기도를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었다고 했다.
8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도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큰소리로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 이를 본 구경꾼들은 한결같이 "참 이상한 일이로군. 죽는 것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며 형장으로 가는 사람은 처음 본다"라고 말했다.
지난 7월 4일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윤점혜(아가다)는 동정 성모의 발현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녀는 "성령이 하늘의 모후 위에 내려와 그 성심 위에 앉는 것을 보았다"고 주문모 신부에게 진술했다.
조선 천주교회에 성모 신심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지난 5월31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공이 큰 것으로 드러났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동정녀'들의 존재이다. 신유박해가 한창인 10월 현재 기록에 나타나는 동정녀들은 윤점혜를 비롯해 정순매(바르바라), 김경애, 조도애, 박성념, 이득임, 문영인(비비안나), 강경복(수산나) 등이다.
조선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은 "동정녀들이 늘어나는 것은 주문모 신부와 교회내 널리 보급된 교회서적 '칠극'의 영향이 크다"며 "칠극의 내용 중 정결과 동정을 중시하는 내용이 교우들의 동정관을 형성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동정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충실하려는 확고한 신심의 발로일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면서 "초기 신자들의 동정에 대한 인식 확산은 성모 신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평화신문 647호(2001년 10월 14일), 리길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