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3주일 2007년 7월 1일
루가 9, 51-62.
오늘 복음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려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불러내려 불살라 버리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예수님을 따르겠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식구들과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와서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보도하는 문서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구약성서를 잘 아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표현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그들이 한 새로운 체험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분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향해 가셨고 그것은 하늘에 올라가시는 일이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구약성서(2열왕 2,1)는 예언자 엘리야의 죽음을 하늘에 올라간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분노하여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말하는 것은 구약성서 열왕기 하권(1,10. 12)에서 빌려 왔습니다. 사마리아의 왕이 엘리야를 잡으러 군사를 보내었더니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했다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언자들은 복수하고 벌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을 꾸짖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병자를 고쳐 주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생활 조건이 개선되는 것도, 경제적, 사회적 수준이 격상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도 외면하는 패륜아가 되라는 말씀은 물론 아닙니다. 여기서 죽은 이는 하느님의 나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같은 루가복음서에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갔다가 폐인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15,24).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죽은 이들은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라’는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죽음을 위한 대책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집에 있는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식구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과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과거의 자기 공적에서 보람을 찾지도 않고, 과거에 남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거나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다보는 어리석은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새로운 내일이 펼쳐집니다.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내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복음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무서운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 덕분으로 재물이나 지위를 얻어서 이 세상에서 행세하고 사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행세하는 일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을 따라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소박하게 삽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재물이나 지위에서 삶의 보람을 찾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분의 은혜로우심이 자기를 통하여 주변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죽음 후의 일을 걱정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새롭게 삽니다.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그분의 자녀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기에 우리도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의 공로에 자만자족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과거에 대해 통회(痛悔)의 눈물만 흘리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봅니다. 그분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실천하면서, 그 자비가 흘러 넘쳐 이웃에게 흘러들어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우리 안에 고여만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듯이...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의 뜻을 성취한다.”(55,10-11).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를 흠뻑 적시면, 그 자비와 용서는 주변을 위한 우리의 새로운 실천 안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열리는 내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새로운 실천 안에도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